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시선
게시물ID : panic_466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데미우르고스
추천 : 8
조회수 : 152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4/29 12:45:28

    

 

 

 

 

군집한 인파의 시선이 별안간 한 남자에게로 몰려든다. 남자의 자세가 이상하다. 엉거주춤 하게 서 있는 꼴이 금방이라도 남자의 바지가 내려갈 것 같다. 게다가 눈치 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느라 남자는 주변을 신경 쓸 틈이 없다. 한 손에는 손수건을, 한 손에는 바지를, 남자의 자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묘하게 변해간다. 어디선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남자의 목에서 꼴깍,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은 태풍을 만난 파도처럼 격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곧 남자의 바지 안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비릿한 냄새가 군중의 코끝을 은은하게 파고들 때 즈음, 남자는 도망치듯이 버스에서 빠져나왔다.

 

타인의 시선을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시선공포증이 있다. 모든 시선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견뎌낼 수 없다. 그 때문에 오늘도 역시 출근을 포기해야 했다. 직장 상사는 그를 더욱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다. 당장이라도 상사에게 전화해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늘어놔야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건 바지였다. 핏이 맞지 않는 걸 억지로 입겠다고 생떼를 쓰다 이런 불상사만 겪었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기좋게 오줌까지 지렸으니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다. 새빨간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억수탕>이라고 쓰인 목욕탕 간판이 무심코 눈에 들어왔다. 마침 바쁘게 나오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목욕탕에 들어가면 우선 옷을 모두 벗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볼품도 이런 볼품이 없는 남자의 나체가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게 무방비상태로 노출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분명 남자의 벗은 몸을 보며 조롱과 경멸의 시선을 던질 것이다. 알 수 없는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집에 다시 돌아가자니 온 몸에서 진동하는 지린내는 참기 힘든 수준이었다. 옷가지라도 대충 빨 필요가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자들이 드문드문 탕 내를 서성거린다. 음료수를 마시는 이도, 계란을 까먹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일사불란한 시선은 아마도 곧 한 곳으로 꽂히게 될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몸짓으로 탕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물함으로 달려갔다. 바짝 세운 발뒤꿈치는 남자의 발소리를 최소화시킨다. 다행히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아니, 주목하지 않는 듯 했다.

 

그 때, 한 중년 남성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다. 남자는 병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숨겼다. 여기서 남자가 더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이상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볼 것이 뻔한 일이다.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동 할 필요가 있다. 남자는 타올 한 장을 들어 어설프게 몸을 가렸다.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다시 한 번 타인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꽂힌다. 남자의 한공(汗孔)이 반사적으로 열려 버린다. 이쯤 되면 방법은 오직 하나 뿐. 한시라도 빠르게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탕 문을 열자마자 후끈하게 데워진 수증기가 남자의 얼굴을 덮친다. 뿌연 탕 안은 사람들의 얼굴을 분간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남자는 가장 뜨거워 보이는 탕에 몸을 담갔다. 수면에 닿는 순간 감전이 된 듯한 느낌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그제야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온 몸이 천천히 이완되고, 조금씩 졸음도 밀려오는 듯 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번쩍 떠오르는 소름 돋는 사실 하나.

 

옷들을 고스란히 사물함에 두고 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다고 허겁지겁 서두르다 깜빡하고 몸만 그냥 들어와 버린 것이다. 다시 위축되는 심장의 근육. 꼴딱 꼴딱 침이 절로 넘어가고, 내가 왜 버스를 탈거라고 나대서 이 생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온다. 이따금 시선공포증을 이겨낸답시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억지로 찾아가곤 했다. 곤욕도 그런 곤욕이 없었지만 의사선생님은 그렇게 극한 상황에 노출될수록 인내의 임계점이 조금씩 상승 할 거라고 말했다. 물론 오늘 일로 그 치료법이 내게 명백히 시기상조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탕에서 빠져나와 재빠르게 문을 열어젖혔다. 스킨을 바르는, 젤을 바르는, 머리를 말리는 사람들이 도열된 순으로 차례차례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대는, 히히덕 거리며 계란을 까먹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색 유리병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에겐 저들의 시선이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레이저 보호 광선처럼 느껴진다.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드리워진 그들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뚫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 듯 남자의 머릿속을 스치니 그의 입에서 쉬이 한숨이 새어나온다.

 

대리석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남자는 보기 좋게 넘어져 버렸다. 장판이 생각보다 미끄러웠고,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아 발바닥이 축축했던 탓이었다. 꼴사납게 자빠져 버린 남자의 시선은 곧 삐뚤빼뚤한 글씨로 위태롭게 매달린 천장의 어느 푯말 하나에 머무를 수 있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키득거리며 웃음을 도통 참지 못하는 아이들도, 텔레비전을 보며 시답지 않은 신소리를 주고받던 청년들도, 사물함 칸 안쪽에서 묵묵히 옷을 갈아입던 아저씨들도, 탕 입구에서 먼발치 떨어진 흡연실 안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아버지들도, 목상(木床)위에 앉아 맥반석 계란 껍질을 까는데 열중 하고 있던 부자(父子), 모두 남자를 쳐다보며 웃기 시작했다. 남자의 정신은 돌이킬 수 없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남자의 성기에서 무언가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채 분수처럼 솟는 남자의 오줌줄기는 그 힘이 볼품없고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얼굴은 이제 형용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부끄러움의 눈물인지, 무서움의 눈물인지, 남자는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반면 오줌줄기는 조금씩 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고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씩 어리둥절함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몇몇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안대소를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남자에게 머무르고 있는 대다수의 시선들은 거의 호기심이 가득한 그것이었다. 남자는 대단히 상기된 표정으로, 그리고 여전히 자그마하게 훌쩍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남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발소였다.

 

이발사는 지나치게 엄숙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 남자의 수염을 다듬는데 열중이었다. 남자의 시선은 이발사의 옆에 세워진 카트 위에 멈췄다. 날이 선 가위가 사이즈별로 나란히 늘어놓아져 있었다. 남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워낙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발사가 남자의 행동을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남자는 날카로운 가위로 정확하게 자신의 두 눈을 찔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리둥절함에서 경악스러움으로 바뀐다. 남자의 눈에서 붉은 피가 중력의 법칙을 역행해 분수처럼 솟구친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남자의 온 몸을 놀라운 속도로 잠식해나가지만, 남자의 얼굴엔 조금씩 미소가 번진다.

 

, 해방이다.’

 

남자가 조용히 뇌까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엔 점차 괴기함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