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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공부
게시물ID : sisa_3833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잡초농사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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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4/29 14:41:21
 

중세에 천민, 평민은 국가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중세국가가 사라지고 민족국가(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혁명이다. 근대국가와 근대이전의 차이는 바로 주권의 유무(국민들의)에 있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 프랑스는 귀족의 나라였었다. 즉 신분제 국가였다.

중세국가의 특징으로 왕은 세금을 자기 마음대로 썼으며 위생개념이 낮고 범죄율이 높았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전을 건설하였고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 당시에 사회적 모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국가는 나 몰라라 하였다. 당시에 전쟁도 많이 했었는데 대부분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만 의의를 두었다.

중세에는 점차 상품의 유통과 자본의 순환으로 평민에서 지위가 상승한 근대시민계급, 즉 새로운 부르주아들이 나타나며 ‘계몽주의’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성과 과학이 근대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시험해보고 남의 의견에 대한 무조건 수용을 반대했다. 이는 기존의 사상적, 학문적, 철학적 권위를 부정한 것이다.

조선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기존의 학문은 주자학(서구는 가톨릭)이었고 바로 실학이 계몽주의 사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귀족들로부터 차별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프랑스는 영.미전쟁에서 영국에게 엄청난 지원을 했으며 재정파탄의 첫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그 빚을 갚지 못하자 망하기 시작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미쳐가기 시작한다. 나라는 망하고 있는데 왕은 여전히 무능했으며 변화를 주고자 금융개혁을 실시했지만 실패해서 더욱더 프랑스는 망해간다. 추위가 불어 닥치고 물가가 오르고 곳곳에 소요사태가 일어난다. 은행들이 재무장관을 임명하자 하였는데 임명된 장관은 ‘전국삼부회’(귀족, 성직자, 평민 세 계급의 대표 600명이 참가한 대의기관)을 소집하라고 한다. 이는 175년 만에 열렸다.

당시 계급도는 귀족->성직자(학문,철학)->농민,평민 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국가에서 귀족과 성직자는 전체인구의 3%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삼부회에서는 97%의 평민들과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반발이 생겨났다. 그 때에 ‘로베스 피에르’가 나타난다. 피에르는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내야한다 주장하였고 그것은 실패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법을 고치겠다는 ‘테니스코트 선서’를 한다. 그리하여 ‘국민의회’가 생겨났으며 이 모임은 의회권력이 될 만큼 커졌다. 그런데 이때 왕이 친위대를 만들어서 화가 난 국민들이 민병대를 결성하였다. 민병대는 총과 화약을 찾고자 ‘바스티유 감옥’(전제정치의 상징)으로 돌격하였다. 이런 상황에 재무장관은 파면당하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서 군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때 프랑스의 국기가 만들어진다.

결국 바스티유 감옥은 점령당했으며 교도소장이 죽고 그 교도소장의 머리를 들고 행진을 하였다. 국민의회는 대중의 폭력을 인정하였으며 국민의회에서 인권선언을 선언하였다.

*프랑스 인권선언 : 근대 시민혁명의 이념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며 생명의 존중, 평등 등이 담겨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이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장 폴 마라에 의해서 ‘인민의 벗’이라는 매우 과격한 신문을 만들어졌다. 기존에 기득권집단에 대한 모든 적개심을 신문에 삽입하였으며 극좌, 선동적이었다. 그러나 문자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왕족들이 혁명의 성공을 알리는 삼색기를 밟고 병사를 집결하려하자 장 폴 마라는 시민들에게 ‘움직여라’는 행동을 알린다. 생선장수 여자들이 행동으로 옮기는데 이때 루이16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인권선언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더욱 모이고 있었다. 군중들이 파리로 이동하라고 했는데 루이16세는 대답을 주저하였고 거기에 더욱 화가 난 군중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간다. 이 때 침대가 찢기고 난리가 났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왕실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은 대중들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단점이자 한계이다.

이제 프랑스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왕의 모든 결정은 의회의 통과를 받아야하기에 권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때 루이16세는 다시 베르사유를 정복하고 권력을 찾고자 탈출을 시도하였다. 외국군대의 필요성을 느껴 프랑스를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경계에서 잡혀버린다. 이때 국민들은 충격을 받는다. 이제 권력은 의회와 혁명세력에게 주어졌다. 혁명세력은 극악한 사형제를 없애고 ‘길로틴’이라는 그나마 나은 사형제를 만들어낸다.

루이16세는 경계에서 잡혔지만 몇몇 왕족은 오스트리아로 도망갔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지원을 와주었고 혁명세력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싸우자고 했는데 ‘로베스 피에르’만 반대하였다. 하지만 전투는 이뤄졌고 결국 혁명세력은 패배하였다.

프랑스 주위 국가들은 근대사회의 실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러한 분위기가 전파되는 것을 우려했다. 혁명세력은 내부(왕실세력)과 외부(외국군대)와의 싸움을 했었다. 혁명세력은 이중의 걱정을 해야 했다.

혁명세력과 외국군대와의 전쟁에서 혁명세력은 계속 패하고 권고문도 받아 혁명세력은 매우 분노하여 결국 왕궁으로 돌격하였다. 이때 루이16세를 ‘길로틴’으로 죽이고 프랑스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즉결심판을 당하여 온갖 살육이 일어났었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 프랑스공화국이 탄생하면서 공화제가 생겨나는데 여기에 ‘국민’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근대국가가 탄생하였으며 대중을 의식화된 국민으로 만들자는 ‘국민주의’가 등장한다. 이제 주권국가로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여기서 근대민족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짧은 기간에 진정한 근대국가로서 성장하고 국민스스로가 바뀔 것인가?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혁명세력은 외국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며 힘들어했었는데 그때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프랑스를 지켜낸다. 근데 의아한 것이 국민들은 프랑스를 지켜낸 나폴레옹을 또 다시 황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나라도 수백 년 동안 왕조국가였고 대한제국 때도 왕조국가였으며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시절에도 왕조국가였다. 그리고 8.15를 통해서 해방을 이뤄내지만 국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배우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이승만이라는 독재자를 낳게 된 것이다.

우리는 민주적 덕성을 키워가며 토론하고 점진적으로 발전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문화적 성장을 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저급한 민주주의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귀족들은 봉건체제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자유를 맛본 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1차 프랑스혁명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데 1830년쯤에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는 봉기, 혁명을 통해 공화국이 성립된다.

프랑스혁명의 시작은 1789년이지만 완전히 중세의 티를 벗게 된 시점, 근대국가(자유,평등,박애)로 발전하기에는 약 100년(1870년대)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가 학교를 통해서 근대적 가치의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귀족, 성직자가 존재하는 봉건사회는 우리가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렇듯 근대국가로 발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값비싼 것이다.

국가는 Nationalism(국민주의, 민족주의)이념으로 발전하여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가치관을 형성해야 한다.

민족주의에서 국가란 국민들의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자 틀이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공통의 문화, 의식들을 국민들끼리 지니고 있어야 한다. 소위 국민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삶의 방식(국민문화, 말, 행위, 연대, 책임의식, 가치, 규범, 의무)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공생, 공존의 환경이 필요하다. 그것이 국가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소위 민족주의, 국민주의라는 것이다. 흔히들 민족주의라 하면 민족과 민족의 대립을 생각하는데 그것뿐만이 아닌 것이다.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등등 이런 것들은 권력에 의해서 민족주의의 본뜻이 왜곡된 것이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타민족과의 공생과 공존도 필요한 것이다.      


‘위기의 남유럽을 가다 - 그리스’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관광산업이 무너지고 국가기업도 매물로 나와 외국기업에 팔리고 있다. (항만, 철도, 공항 등등)

국가부채는 쌓이고 있으며 디폴트(채무불이행)로 인해 국가부도 상태이다. 이런 배경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가 국민들에게 잘못된 습관을 들인 탓이다.

그리스정부는 ‘유로존’에 가입하고 GDP가 4%나 성장하며 돈도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과 경쟁력 있는 산업에 투자 하지 않고 경기에 민감한 서비스업과 같은 소비적인 시장에만 투자를 했었다. 게다가 20일 마다 국가의 세무계획이 바뀌었으며 곳곳에 탈세가 일어났었다. 탈세규모가 GDP의 2.5%~3%나 되었다. 엄청난 것이다.

정치적 근대화가 늦었던 그리스는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선거 때마다 공무원자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선심성공약을 남발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재정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별의 별 수당 같은 것을 만들어서 다 챙기려 하였다. (그리스 국민의 4명 중 1명은 공무원이었다.) 이 선심성정책을 받아들인 것은 다양한 계층이었다. 전부다 정부와 부당한 거래를 한 것이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부정부패였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집행과정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며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갔으며 그것은 곧 국가부도로 이어진 것이다.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저렇게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국민의식을 향상 시키고 올바른 민족주의가 정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근대국가의 형성과정, 근대국민의 형성과정을 프랑스혁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근대국가는 국민들이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

몽골이 지금은 가난해보이지만 10~13세기에서는 세계제국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모든 국가가 한 번에 발전하지는 않는다. 모든 국가가 프랑스, 영국, 미국처럼 발전하지 않았다. 이 나라들은 시민혁명을 통해서 근대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 산업혁명의 힘은 군사력으로 전환된다. 부국은 강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군사력은 주변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강제로 통상을 당하기도 하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군사력을 기르고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런 식의 성장은 프랑스와 달리 밑에서부터의 성장이 아니고 귀족, 왕족중심의 성장이 되는 것이다. 봉건 영주들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자본가가 되는 것이다. 엘리트 주도의 근대화가 되는 것이다.

근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근대적 산업이 발전하려면 중세적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 정치, 사회도 자본주의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을 떠나서는 발전할 수 없으며 시장이 발달하려면 영업에 방해되는 것을 없애야한다. 자유로워야지 시장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세의 신분적 제도 및 특권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형성된 근대국가의 민족주의는 애국심이 매우 강하다. 이 애국심의 뿌리는 공화주의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국가가 적합한 조건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형성된 근대국가의 경우 그 나라는 근대국가지만 국민이 원하는 국가는 아니다. 중세 귀족층은 똑같이 지배층으로 전환되며 이들은 국민들의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국가결속력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전쟁, 스포츠경기를 만드는 것이다.

독일, 러시아, 일본 같은 나라들은 지배계급들이 선진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래로부터 형성된 근대국가가 아니라 지배층 위주로 형성된 근대국가이다. 봉건적 지배계급은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바뀌었다. 이런 경우에는 근대국가가 되더라도, 신분제가 폐지되더라도 국민통합, 자유로운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살기는 매우 어려웠다.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어 아래로부터 형성된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을 보자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은 천황이다. 천황은 근대국가 형성과정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사상적 통합을 위해 조작되어 나타났다. 천황을 신으로 만들어서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국민문화를 만들어내었다. 매우 계획적이었다.

사실 당시 국민들은 천황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메이지유신이 생기기 700년 전에 천황은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했었고 일본은 무사들에게 지배당했었다.

1853년 페리제독이 일본으로 함선을 이끌고 통상을 위한 무력시위를 했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가 되기를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근대국가가 되기를 원했었다. 그리하여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양으로 보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천황을 앞세워서 다른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시도하였다. 절대자인 천황을 앞세워서 합법적인 권력을 잡은 것이다. 게다가 교육칙어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황실을 다해 희생, 헌신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천황은 도구에 불구했었다. 서양의 전제군주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음식, 문화, 습관들을 서양의 모습으로 바꾸려 하였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이상한 방법이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에서 군사들이 받은 교육은 가미가제를 할 정도로 국가에 헌신, 천황을 위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들을 국민의 의식으로 심어버린 것이다. 조작된 사상이 국민문화가 되어 지배층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또 다른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북한과 비슷하다.

교육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천황을 위한 교육이었다. 심지어 천황사진을 보호하려고 불에 타죽은 사람도 발생하였다. 기미가요가 국가로 강요되기도 했었는데 이를 거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를 법으로 제정하여 모든 학교에서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경기침체, 대외관계 등 위기의식을 느낄 때에 조작된 국민통합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꼼수를 부린다. 주로 우익들의 꼼수이다. 나라가 위기에 봉착하니 일본에서는 우익적인 성향이 강해졌다. 일본은 이벤트가 상당히 많은데 이게 다 국민문화, 통합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배워온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많은 전통들 중에 정치적, 사상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일본은 중세사회 지배층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것이다.


러.일전쟁의 주목적은 식민지를 계속 만들고 서구열강에 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선진국을 흉내 낸 것이다. 당시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이 만연하게 퍼졌었다. 그 당시 일본이 추구하던 정책은 식산흥업(산업화)이었으며 국가가 주도해서 자본주의식 기업을 유치하였다. 경제발전, 신분제 폐지, 근대화는 되었지만 농민이 노동자로 전락하는 등 민중의 삶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래서 민권운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운동의 핵심은 생존권, 정치적 기본권 확보 등이었다. 이것이 나타나게 되면서 관료주도의 식산흥업 정책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운동은 민주화운동이라 볼 수 있으며 결국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민족주의는 외부의 침략에서부터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굉장히 배타적이며 침략적인 민족주의다. 이와 비슷한 것이 독일의 나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이 동아시아를 침략한 것이고 오늘날에 기미가요를 부른다거나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침략하겠다는 의도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는 사라져야 할 민족주의가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국민주권 사상의 발전, 즉 통치자와 피치자의 지위 및 계급의 수정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프랑스, 영국, 미국은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근대국가로 이행되었다. 국민들이 만드는 근대국가, 이것이 공화주의 국가이다. 반면에 귀족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근대국가는 여전히 봉건적이다. 그러한 곳에서는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외세의 침략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으므로써 애국심을 인위적으로 고취시킨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들은 이와같이 문화적인 부분에서 민족주의가 표현되었다. 민족감정, 동질성은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으며 변형되어 나라를 유지시키고 있다. 이 후천적, 인위적으로 민족감정,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은 사회화라고 한다.

민족주의는 하나의 정신상태이며 의식적인 행동으로 그것은 프랑스혁명 이후 점점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공통된 집단의식을 가지는 데에는 교육의 역할이 크다. 집단의식으로서 민족주의는 하나의 심리학적 사실이자 사회학적인 사실이다. 고로 민족주의는 가변적이다. 민족이란 사회의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다. 민족주의의 상징은 일반 민중을 공통의 정치적형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5, 60대와 3, 40대의 민족주의가 다르다. 민족주의는 얼마든지 새롭게 변화한다. 민족은 역사에 살아있는 힘의 산물이다. 민족형성에 가장 중요한 외적요소는 국가이다.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 민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민족형성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생생하고 적극적인 공동의지이다.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의 나라를 만들자라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언어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는 그 사회의 구성원 전원에게 스며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정신상태이다.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것이다. 국민이 없으면 민족주의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민족의 범위 밖에 있는 타민족에 대한 무관심, 불신, 증오하는 민족주의가 있는데 이것은 파시즘, 즉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인 것이다. 굉장히 배타적인 민족주의다. 자국위주의 폐쇄적인 민족주의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세계시민주의인 것이다.

국가간에도 상생적인 평화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없애고 세계시민주의, 세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민족주의 형성에 아주 중요한 계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동학’이다. 19세기 조선이 세도정치로 이름을 떨칠 때였다. 기존의 왕권이 힘을 많이 잃었고 비변사를 특정세력이 지배하여 이익의 도구로 전락했었다. 그리고 당시에 민심은 점진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한다.

1810년에 평안도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홍경래의 난이다. 그리고 1833년에는 세도가들과 상인이 결탁해서 매점매석을 하여 물가가 폭등하여 크고 작은 항쟁을 불러일으킨 서울의 쌀 폭동사건이 나타난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1862년에 농민항쟁(임술민란)이 생겨난다. 이는 삼정제도, 즉 조세법에 대한 반발로 인해 생겨난 항쟁이었다. 예를 들면 군포가 있다. 형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군역을 하게끔 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 양반들은 하지 않았으며 전세(토지세)에 있어서는 탈세, 감세, 면세를 일삼는 부호들과 거기에 결탁한 향리들도 생겨난다. 거두어야 할 세금이 모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것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진다는 이유로 그 부담을 일반 민중들이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환곡제도도 문제였는데 흉년일 때 관가에서 빌려주는 쌀인 환곡을 평상시에 필요없는 사람에게도 줘서 이자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심각한 문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부자평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신분이 상승해버리고 군포도 제외가 되버리니 점점 거두어야 할 세금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최하층계급은 도주를 해버리고 마을이 난장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농들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도결제도’가 생겨나는데 역시나 부농들의 반발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2년에 농민항쟁(임술민란)이 일어나는데 여기에는 계층을 불문하고 양반, 부농, 빈농들 모두가 합세한 항쟁이 되었다. 이는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학’이 창시되는 배경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1824년 울산의 몰락한 양반가문의 서자로 출생한다. 1840년 부친 타계시까지 가학으로 성리학을 수학했으며 1854년까지 10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각 지역의 인심이나 풍속을 조사, 그 과정에서 성리학에 대한 회의를 했으며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역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고 용담정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한다. 1860년 도를 깨우친다. 1861년에 포덕에 나섰으며 1862년 삼정문란으로 전국에 민란(임술민란)이 일어난 시기에 ‘동학’공부를 하러 모이는 사람을 보고 탄압을 하니 최제우는 전라도로 피신했으며 1863년 귀향하여 체포당해서 경상감영으로 압송당한다. 당시 ‘동학’에서는 접주제를 하면서 포교활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동학’은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양반들이 문제 삼아 ‘동학’은 이단, 서학 취급을 받고 조정에 집단상소를 올려서 체포, 사형을 당하게 된다. 경상감사가 잡아서 죄를 찾는데 찾을 것이 별로 없어서 ‘사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그리하여 ‘동학’은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된다. 최시형은 산으로 피신하였고 많은 군중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지속되는 민중들에 대한 수탈에 반발하여 고부민란이 일어난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자 하였고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하고자 하였다. 황토재 전투에서 관군은 대패하였고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으로 진격해오는데 무언가 위기감을 느낀 조정과 농민군은 서둘러 전주화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 후 일본군은 경복궁에 쳐들어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고 청군에게 기습을 하여 피해를 주었고 청.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청나라는 패하고 만다. 농민군들은 경복궁 쿠데타에 저항하여 남원대회를 열고 재기병을 논의하고 결속강화를 주장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 이후 전라감사 김학건과 농민군 전봉준이 합의하여 집강소가 합법적 통치기구로 활동하였으며 농민군의 지방통치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에 저항하여 전봉준을 대장으로한 제 2차 농민전쟁, 즉 항일전쟁이 일어난다. 하지만 12월을 고비로 농민전쟁은 전국적으로 진압되었다.

결과적으로 ‘동학’을 통해서 근대적문화와 가치를 전파하였으며 그것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국민문화의 단초는 ‘동학’이다. 이것이 이후 우리 민족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독립협회운동’

독립협회운동은 갑오개혁이 그 배경인데 갑오개혁은 법제적으로 근대국가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국민의식이나 문화적의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아관파천 등 여러문제가 나타났고 그것을 배경으로 독립협회운동이 나타났다.


서재필

김옥균이 서재필을 일본에 보내 교육을 받게하여 근대식 군대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조련국이 만들어졌으며 이 조련국 사람들은 갑신정변에 동원되었으며 이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이후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는 개화파내각이 꾸려져서 이들을 모두 사면시켜 주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일시 귀국하여 국민들을 개화시키는 방법으로 독립신문(언론)을 만들어 계몽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정부와 개화파 관료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이어서 시민단체를 만들어 국민들을 계몽시키는데 도움이 되고자 독립협회를 만들어 근대적 민족운동을 할 수 있게끔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정부와 마찰이 없도록 하였고 정부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으며 한 번에 알수있도록 큰 이벤트 형식으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혁명보다는 체제내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독립문 건립, 독립공원 조성들을 통해서 확고한 독립의식을 가지고자 하였다. 그러니 갑오개혁에 참가한 개화파 사람들과 일반서민, 관료들이 참여하여 아주 빠른 속도로 사업을 진행하였다. 성과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니 서재필은 나아가서 근대국민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많은 강연회가 진행되었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적 국민으로 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함양되었고 나아가서 이런 시민들과 함께 국가가 직면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관민공동회’가 만들어져 토론도 하고 결론이 나면 관료들이 국정에 추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거기에 독립협회는 더욱 나아가서 일종의 정치제도로 만들고자 하여 지방에 독립협회 지부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는 국가를 의정부(내각회의)형태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국왕의 전제적 권력을 줄이고 중추원이 의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려 논의했다.

그러나 보수세력(세도가)들은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종을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했었고 독립협회 사람들은 하나, 둘 구속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회원들이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이에 대한 저항을 하였다. 결국 미국시민권자인 서재필은 추방당했으며 나머지는 다 잡혀버리고 만민공동회는 실패로 돌아가버린다.

이 독립협회 운동은 근대적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시민운동을 함으로써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에 큰 의의를 지닌다.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운동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 미국식 시민운동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부분이 차이가 나며 평등사상과 기본적 인권,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리고 각성된 대중의 주체로 자주적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1차적 결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으로 나타난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였고 갑오개혁도 친일파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국민주권의 실현이 실패하였다. 이는 아관파천으로 오히려 왕권이 강화되었다. 결론적으로 국민주권 요구는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가 유의미하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외세를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시대는 근대국민주권의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사회는 따라가지 못했다.

을사조약 이후 조선은ㅌ 반식민지 상태로 들어가고 일제에 의해 국가중요기관들이 지배당한다. 이제 정부기구로서 독립은 불가능하며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대중들의 애국계몽, 의병전쟁 등이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그렇다고 고종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헤이그특사를 파견을 하였지만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들을 하나의 구심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것들이 다 실패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바로 ‘단군사상’이다.

단군사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홍익인간 정신이 근대국민주권의 역사와 공통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중심사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대종교’가 만들어진다.

수 많은 인재들이 대종교도였다. 민족운동가, 역사학자, 국어학자 등등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나철이 주도하여 을사오적 암살사건이 나타나는데 이 시기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으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였으며 헤이그 특사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의병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항일투쟁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철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와 라이벌 관계인 정치가들을 만나 독립을 꾀하려 했는데 실패하고 만다. 이는 민간외교항쟁에 속하며 매우 적극적이었다.

1907년을 넘어서 조정이 무너지고 민족의 구심점이 사라졌는데 그때 ‘신민회’가 만들어진다. 이 ‘신민회’는 서울에 있는 민족운동가 대다수가 망라되었고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고자 하여 그 이념을 대종교인 ‘단군사상’으로 결정했으며 직접 탐사하고 스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왜 대종교의 단군사상이 당시 우리 민족의 사상적 구심점으로 만들어졌을까? 첫 번째로는 민족의식이 있으면 언제라도 독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문맹률이 높아 대중들을 결속시키기에는 종교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간도에는 신흥무관학교가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단군으로 무장하였다. 이 시기에 주로 단군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대종교는 종교를 넘어서 민족사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는 점차 확산되어 4대본사로 나누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일제는 대종교의 확산을 두려워하여 종교통제령을 통해서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철은 종교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살을 한다.

그러나 나철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3.1운동에 앞서서, 기미독립선언에 앞서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이것이 3.1운동의 도화선이라 추측된다.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중 25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선언 이후로 이들은 점차 공화주의 사상에 물들게 된다. 그리고 훗날 공화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단군의 역할이 약화되어 간다.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

‘대동단결선언’

나라가 빼앗기고 민족운동을 하기 매우 어려워진 시절, 독립운동가들은 어디서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회의를 하여 만주에 기지를 건설한다. 당시 중국은 군벌들이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으며 만주는 치안이나 통치력의 영향이 좀 느슨했었다. 이 독립운동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신흥무관학교이다.

‘이회영’은 신민회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나라가 빼앗기자 형제드을 모아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으며 형제 중 이석영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다 처분하고 형제들은 전부 만주로 망명했다. 그들이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망명한 사람 중 ‘이상용’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함께 모여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다.

이 학교는 결국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폐쇄되었다. 이 독립운동이 중구난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일어나니 통일성이 부족했고 그러니 전쟁에서 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대동단결선언’을 하는데 뭉치면 서고 나뉘면 쓰러지는 것에 대해 강조하였다.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때문에 망했으며 독립운동이 힘든 것은 각기 다른 지방색으로 인한 파벌, 통일성의 부족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총단결을 주장하였다. 기존의 독립운동은 복벽운동으로서 대한제국의 복귀로 하였지만 이 ‘대동단결선언’에서는 그와는 다르게 국민이 주권자가 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국민이 되고 그런 기관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 다음 나타난 것이 ‘무오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동등한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에게 베풀어 남녀빈부를 골고루 다스리며 차별하지 않으며 교육의 기회를 고르게 준다고 하였다. 이 선언문에는 더욱 더 구체적인 근대국가상을 제시한다. 기존의 중세적인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단군사상이 나타난다.

당시 국민들은 대한제국을 굳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이 선언문에는 단군을 언급하여 민족운동을 결집하였다. 이것이 단군민족주의이다. 균등을 보장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을 추구하였다. 국민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후에 만들어진 기미독립선언서의 내용에는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지만 대한독립선언서에는 존재했다. 오히려 국내에 있었던 3.1운동 정신은 무오독립선언서의 정신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겨나게 되며 헌법이 생겨난다.


동학사상, 독립협회의 민권사상 이런 것들이 헌법에 수록되어진다. 이제 독립운동이 단순히 항일투쟁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예전에 시험공부할때 썼던 노트필기

 

 

걍 심심해서 올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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