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오유과거]산문-풍장
게시물ID : readers_52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X
추천 : 7
조회수 : 37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2/03 00:05:29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양 어깨와 머리, 발끝에 죽은 아버지의 유품에 쌓인 먼지처럼 눈이 소복이 쌓였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몽골에 간 지 삼일째 되던 날 보게 된, 그녀의 첫 모습이자 일곱번째 모습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째 그러고 있었다.


-바이가 죽은 뒤로 텡그리에게 홀린 게지.

곰방대를 물며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밧투흐는 말해주었다. 텡그리는 몽골의 신이다.

-바이? 누굽니까?

-그 녀석을 키웠던 사냥꾼일세. 그 녀석이 죽기 전까지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표현 대신

쓰인 이름이기도 하지. , 사실 지금도 그렇게 바이를 부르는 사람이 안 쓰는 사람보다는

전쟁이 끝나고 벌이는 잔치의 마유주 수보다 많지만.

이름이 수식어였다는 것에서 이미 바이란 사람의 사냥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이젠 이름으로 쓸 일이 없어졌으니 아마 사람들은 수식어로 예전보다 더 자주 쓰지 않을까.

-그 녀석에게 저 녀석이 유일한 건 아니었지만, 모든 사냥에 데리고 다닌 것은 저 녀석이 유일했지.

-뭔가 특출났었나 보죠?

-글쎄...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밧투흐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곰방대를 길게 빨았다.

-스물이 훨씬 넘은 다 늙은 녀석을 쓰려고 데리고 다니진 않았겠지.

그녀가 부리로 날개를 비볐다. 눈에 가린 고동색 얼룩무늬 날개가 다시 드러났다.


밧투흐 말로는, 바이는 말을 타기 시작한 세 살때 이미 아버지인 오구투와 사냥을 다녔고, 그 해 가을 첫 늑대를 잡았다고 했다.

가을이 다섯 번 돌아온 해 바이는 오똑한 부리와 눈매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숑홀(송골매) 그녀~그녀에겐 어드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를 얻었다고 했다. 매를 잡아 길들이고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밧투흐의 표현을 들어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그의 말로는 매로 사냥하는 일은 “여름 들쥐를 한 나절만에 스무 마리를 잡는 정도” 라고 했다.)

그렇게 만난 바이와 어드커는 말 그대로 칸과 케식의 관계라고 했다. 또래와 함께 매사냥을 나서면 항상 바이만 말에서 내려 돌아왔고,

그날 잡은 가장 큰 꿩의 목을 누르고 있는 매는 항상 어드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바이보다 어드커에게 반해 바이에게 말을 걸던 처자도 있었지.

가래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밧투흐가 웃었다. 멋진 개를 데리고 다녀 인기를 얻는 사람으로

해석하면 되는 걸까...평소 어딜 가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지만, 몽골도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새삼스런 신기함이 부러 들었다. 나는 영감님의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어드커를 얻은 게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바이는 요절했군요.

-제 친구의 목숨과 바꾼 게지.

바이는 늑대가 데리고 갔다고 했다. 바이의 인기에 시샘이 난 친구 하나가 밤사냥을 멋대로 나갔다가

곤란에 처했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의 왼팔과 오른귀와 바이를 두고 도망온 친구는

겁먹은 조랑말같은 혼란이 가라앉자마자 마을에서 쫓겨났다.

-내가 기억하는 얘기는 대충 이 정도일세. 조금만 돌아다니면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서 더 재밌는 얘길

들을 수 있겠지만, 조심하게. 바이가 죽은 지 일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특히 뒷쪽 게르에 사는 수나르에겐 절대 묻지 말게. 분명히 자네 머리카락 수가

반으로 줄어들테니.

양고기를 다 먹은 나는 내일 일어나면 사람들의 눈치를 좀 살피기로 결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밧투흐 영감님의 코 고는 소리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분명 옆에서 코를 골고 있을 밧투흐가 보이지 않았다. 해도 뜨지 않았는데 어딜

나간 거지? 잠시 찾으러 나가보았다. 밧투흐? 영감님? 소변이라도 보러 갔나?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돌아다본 끝에는 그다지 정갈하다고 부를 순 없는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하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넌 누구?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어째선지 소녀는 꽤나 실망한 얼굴을 했다.

-처음 보다니? 그렇게 자주 만나고선.

-자주 만났다니? 내가 여기 온 지 열흘이 넘었지만 한 번도 못본 것 같은데...

-으음, 인사를 한 적은 없었지. 나는 어드커야. 어드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여긴 꿈이었다. 그리고 저 소녀는 바이의 매였다.


꿈이라는 사실을 꿈 속에서 깨달은 적이 있는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의외로 우리는

그런 경험을 자주 겪는다. 다만,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데, 어째선지 그날은

꿈이라는 걸 그 어느때보다 확실히 깨달았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스물이 훨씬 넘은 늙은 매라고 알고 있었는데.

-늙은이가 아픈 건 관절염보다 미처 못 늙은 마음이라잖아? 꿈이니까 마음의 나이에 따라준 거겠지.

고마운 일이야. 나도 털 빠진 양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긴 싫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만난 걸까.

-아마 그걸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런 것보단, 서로 다른 종족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

감동적인 상황을 좀 더 맛보는 게 낫지 않겠어, 이방인?

-그렇군.


-바이는, 내가 늙어서도 항상 데리고 다녔지.

-밧투흐 영감도 그렇게 얘기했어. 하지만 어째서 그랬던 거지? 다른 매도 있었을 텐데사냥하기에는

기운이 부족한 매를...

-어차피 생전의 바이에게 사냥에 매는 필요하지 않았어. 내 도움 없이도 잡고싶은 건 얼마든지 잡았으니까.

-넌 왜라고 생각해?

-글쎄...팔 위의 매에게 그런 걸 털어놓을만큼 바이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친구를 구하고 죽은 그날까지도 비몽사몽한 날 데리고 함께 나간 걸 보면, 아마 바이는 나를 길잡이로

생각한 건 아닐까 싶어. 사람들은 날짐승들이 텡그리에게 자신들의 혼을 데려다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지.

풍장이란 장례 방식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 얘기겠지.

-바이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새가 아니라 내가 그 역할을 맡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게 의미가 있었던 걸까...

-글쎄. 그 답은 스스로 찾아봐. 난 이제 가봐야겠어. 안녕.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곧바로 어드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 오똑한 부리와

매력적인 깃털과, 처음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죽어 있었다. 나는 바이에 대해 더 알기를 포기했다.


밧투흐 영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열닷새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한국에는 마침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져온 어드커의 가장 긴 꼬리깃을 꺼내들었다.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