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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논박글 종합
게시물ID : history_5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히로준
추천 : 7
조회수 : 75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4/15 23:43:28
1. 대한독립만세 님의 주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7232.html
위 기사의 내용은,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 :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수서(隋書) 지리지)
 2)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
 3)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
==>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

결론 : 수성현, 갈석산, 장성 세가지 요소를 만족하는 곳은 하북성 창려군 뿐이므로, 낙랑군의 위치는 하북성 창려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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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딜레마 님의 주장
http://orumi.egloos.com/2969313
위 링크의 내용은 하북성 창려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 이후 낙랑군이 새로이 위치한 장소라는 내용입니다. 근거는

1) 태강지리지에 대한 반론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실전(失傳)된 책이고 당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라는 학자가 [사기색은]이라는 주석집을 만들 때 [태강지리지]를 인용했을 뿐이다. 그 내용을 보면, 
太康地理志云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수경에 전하기를“(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蓋碣石山有二,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此云「夾右碣石入于海」,여기에서 말하는“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當是北平之碣石.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

2) 이덕일이 말하는 하북성 창려현은 한반도에서 축출된 낙랑이 후에 다시 자리잡은 곳일뿐이다.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 :
遂城舊曰武遂。
수성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불렀다
後魏置南營州,准營州。置五郡十一縣。
북위가 남영주를 두어 영주에 준하게 하고 5군 11현을 두었다. (*5군은 광도,요동,낙랑,영구,여(혹은 창려))

이후,
북제-> 5군 중 창려군만 남기고 다 폐지
수 -> 개황 원년(581년)에 주를 이동
      583년에는 창려군도 폐지, 상곡군에 현들(영락현과 신창현)을 소속
      598년에 수성으로 이름을 변경
3) 2의 근거
<한반도에서 낙랑이 축출됨>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미천왕 14년 (313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아왔다.
[자치통감] :
건흥 원년 (313년)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웅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이에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군 태수에, 왕준을 낙랑군참군사로 삼았다.
==>모용외의 본거지는 창려군이었으므로 옮겨간 낙랑군도 그 부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축출된 낙랑, 대방이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증거>
위서 세조기(世祖紀) :
연화 원년(432년), 영구, 성조, 요동, 낙랑, 대방, 현도 6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로 옮겼다.
위서 지형지 : 
樂良郡前漢武帝置,낙양군은 전한 무제가 두었다.
二漢、晉曰樂浪,後改,罷。양한과 진에서 낙랑이라 불렀는데 후에 고쳤다가 파하였다.
正光末復。정광(520-525) 말년에 복구.
治連城。領縣二。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치소는 연성. 현을 둘 . 호는 219, 인구는 1천 8.
永洛正光末置。有鳥山。영락현은 정광말에 두었으며 조산(鳥山)이 있다. 
帶方二漢屬,晉屬帶方,後罷。대방현은 양한과 진에 속했는데, 후에 파하였다. 
正光末復屬。정광말에 다시 속하게 했다.
위서 지형지:
537년에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기사
==> 정광말년(522-525)에 낙랑군이 다시 세워졌다가 537년에는 남영주에 설치되었다.

<비여=노룡현>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노룡현 조:
위 임금 도(세조)가 연화 초에 조선민(朝鮮民)을 비여(肥如)로 사민하여 조선현을 두고,
아울러 북평군을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였고
북제가 북평군 치소인 신창(新昌)을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하여 이에 들게하였다.

요약 :
313년 낙랑군,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모용씨의 요서 지방으로 이동함
432년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사민시킴. 북평군에 조선현을 둠 (낙랑군은 쇠락하여 폐지된 것 같음)
정광 말년(520-525) 북위에서 다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함
525년 영주를 잃어버림. 낙랑군도 이무렵 없어진 듯
537년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됨. 남영주는 [수서] 지리지에 나오는 수성임

결론 : 이덕일 소장이 말하는 하북성 창려군의 낙랑은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요서지방으로 옮긴 것이므로, 한사군(링크의 주인장은 동방변군이라고 부릅니다)의 위치가 하북성에 있었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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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 읽지를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해를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것 같아 나름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이후 저 내용에 대한 논의는, 딜레마 님이 가져오신 링크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우선되어야 할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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