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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청춘팩션] 17171771 3편
게시물ID : readers_71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ickyo
추천 : 1
조회수 : 2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4/30 21:45:48

"선배!"


여러 상황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중정이의 목소리는 날 현실세계로 끌어내렸다쩡이의 입에 붙었던 오빠가 선배로 돌아왔다목이 타서 침을 삼키자 유난히 꿀꺽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똑바로 마주보기가 민망해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레 물었다.



"
응 쩡아.. 아 미안 귀찮게 두 번이나.. 그거 네가 챙겼구나근데 그 안에.."


"
네 선배."


"
 ..그 선물 혹시 뜯어봤니?"

말을 끝내고 눈치를 살피려 슬쩍 얼굴을 바라보니 가로등에 비친 얼굴이 미묘하게 읽기 힘든 표정이었다쩡이는 한 번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을 어물거리는 내게 생각보다 순순히 대답해주며 되물었다.


"
이거 선물이에요?"


"
아니 그러니까 선물이 아니고아니 선물은 선물인데 선물이 아냐."


"..
무슨 소릴 하시는 거에요?"


나는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말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거 그러니까 너 줄게 아니고.."


쩡이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세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
그쵸?! 아 진짜 깜짝이야전 저한테 주는 줄 알고 뜯었다가 깜짝 놀랐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뜯었으면 어쩔뻔했어요 진짜!!!"


"
....그 그러게 미안하다 야;"


"
진짜 다행이다전 솔직히 설마 설마 했어요선배가 그럴 사람이 아닌걸 알지만 너무 당황스러워서... 미안해요 겉 포장을 제가 뜯었네.. 그래도 내용물은 다시 티 안 나게 잘 접어 놨어요."



갑자기 머리가 띵해온다나는 그 내용물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그게 내 상상 이상의 속옷인건 분명하다형은 그런 사람이니까쩡이가 건네주는 까만 봉지를 받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쩡이는 그제서야 킥킥 웃으며 날 놀리기 시작했다.


"
선배 근데 진짜 대단하시네요.. 여친이 있는 줄 몰랐는데 심지어 그런 선물까지.."


"
그게 무슨..."


"
고등학생인데 여자친구한테 그런 선물을 하시다니 진짜 장난 아니네요 그런거 고르면서 눈치 안보였어요보기만 해도 진짜 민망하던데 킥킥.. 선배 생각보다 엄청 야한 사람이네요~~~~에비~~~~~"


"
야 아냐 무슨 소리야 나 여친 없어!!!!"



상황은 정리되는 듯 하다가 도리어 더 복잡해져갔다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쩡이양반 내가 커플이라니.. 내가 커플이라니.. 나는 아니라며이 속옷은 형이 여자친구를 선물해주려고 맡겨둔걸 내가 들려서 받아뒀을 뿐이라고 극구 변명을 하였다변명이 아닌 사실이었지만쩡이는 '여자친구 있는 게 부끄러워요?'라며 그러면 안 된다고 내게 '사랑'에 대해 짤막한 강의를 하였다그럼에도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자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자친구분이 지금 이러는 거 알면 엄청 슬퍼할 거에요같은 여자로써 쫌 실망이다.. 왜 당당하질 못해요?' 라는 말까지 나왔다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얼굴을 감싸 쥔 내게 쩡이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한마디를 뒤로 하고 집에 들어간다며 휙 돌아가 버렸다.





"
오빠소문은 안 낼게요그래도 청소년답게 건전하게~~~~꺄하하하하연습할 때 봐요~~~"





당시에 나는 음주나 흡연을 모르는 고교생이었는데만약 지금이었다면 그날 깡소주가 혈액이 될 때까지 부었을 것 같다멘붕상태인 머릿속을 정리하기를 포기한 채축 쳐진 어깨로 포장이 벗겨진 속옷상자가 담긴 까만 봉다리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집이 이렇게 멀었었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괜시리 형이 원망스러웠다핸드폰을 열어보니 쩡이에게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오빠근데 오빠 애인 연상이죠그거 학생이 입을만한 건 아닌거 같던데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답장을 차마 할 수 없었다애인이 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텐데차라리 너한테 줄 선물이라고 했으면 뺨이라도 맞으며 차이기라도 했지 이게 뭐야차이기 전에 차인 느낌이야.






그렇게 풍랑이 휘몰아치던 하루를 보내고나는 그 주와 그 다음주 연습을 모두 가지 않았다특별히 이유가 명확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기운이 빠졌다쩡이에게 내가 '애인'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싫었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난 뒤 쩡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까다로웠다모든게 귀찮고 맞닥뜨리기 싫어졌다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여겨졌다그 사이 쩡이는 서너번 내게 문자를 보냈다왜 연습을 오지 않느냐고그냥 시간이 없다거나피곤하다거나몸이 안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겼다베이스를 치는 친구는 종종 우리 반에 찾아와 벌써 차였냐며 놀려대었고난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어릴 때 도장에서 배운 이단옆차기를 사람에게 날렸다바닥으로 풀썩 하고 날아간 그 놈은, "여자한테 차인 분노를 왜 나한테 풀어 병신아!" 라고 외치고는 "까였다고 왜 말을 못하냐!!" 를 외치며 쫄래쫄래 도망갔다이가 뿌드득 갈렸지만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서 쫒아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틀린 말이 아니었다정확히는 '어떻게 하기도 전에 차여버린'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청춘은 끝나는가 했지만 아직 풍랑은 멈추지 않았다우리는 주로 방과후 도서관에 모여 이야기를 했었는데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내년에 다들 고교 3학년이 되었기에이번 공연을 좀 크게 하자는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서브 보컬인 나는 보통 공연에는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들의 이야기를 반쯤 빈둥빈둥 흘려 듣고 있었다그 때메인 보컬의 친구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내게 ''하고 말했다. '야 너 이번에 공연 같이 뛰어야 되.' 





갑자기 공연을 뛰라는 이야기에 나는 다짜고짜 퇴짜를 놓았다싫어니가 하는데 내가 뭐하러 해이번엔 공연 길게 할거야 한 시간 반 넘게 나 혼자 그걸 어떻게 다해.  야 우리 수준에 어떻게 그 많은 곡들을 소화하냐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리고 공연장이랑 시설은 어쩔 건데공연장도 큰 데서 할거야 중고등학교 친구에 친구들 다 불러다 놓고그리고 두 달이나 남았잖아 너랑 나랑 나누면 되예전에 하던 곡들도 넣고 하면 이번에 새로 연습할 곡 많지 않아그리고 니가 요새 연습 안 나와서 그렇지 애들 이제 작년만큼 허접 하지 않아아 몰라 나 연습 요새 안 나가는거 알잖아너 진짜 공연 한번 안 해도 만족스럽냐왜 그래같이 하자너도 우리 멤버야.





너도 우리 멤버야하는 건조한 한 마디에 말문이 탁 막혔다그 때만큼은 장난기 많은 베이스도 아무 말이 없었다솔직히 나는 무지 공연이 하고 싶었다처음에야 비교 당하는 게 싫었지만 지금은 나름 실력도 붙은데다가이왕 고교생활의 많은 시간을 이 친구들과 함께했는데 무언가라도 함께 남기고 싶은 건 당연했다나는 스스로의 쪼잔함이 정말 싫어졌다문제는 다른 게 아니었다쩡이쩡이가 걸렸다



"
아 그러니까.."



"
오빠!"



결국 스스로의 밴댕이 같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공연은 싫다고 하려고 말하려던 찰나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쩡이다아 맞다도서관은 여고도 같이 쓰는 장소였지쩡이는 멤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날 붙들고 잠깐 나와보라며 끌어내었다오랜만에 마주치자마자 있는 힘껏 팔을 쥐고 끌어내는 바람에 나는 이렇다 할 말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끌려나갔다.



"
오빠 뭐에요왜 계속 연습 안 나와요?"

도서관 밖으로 날 끌고 나온 쩡이는 굉장히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말했다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급격히 다가온 쩡이에게 슬쩍 멀어지며 침착하게 대답했다다행히 생각한 대로 변명을 할 수 있었다.


"
아 뭐..나는 서브고 굳이 연습 꼬박꼬박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쩡이는 그 순간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앙다물고 날 째려보았다그리고는 천천히, "오빠 그럼 진짜 공연같이 안 해요?" 라고 물었다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차마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스스로에게 어지간히도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쥐구멍이라도 찾아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결국 쩡이의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쩡이는 그런 나에게 화가 난 목소리도차가운 목소리도 아닌 처음 듣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
내가 하자고 했어요오빠도 같이난 오빠도 충분히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같이 하고 싶어요같이 해요.."


말문이 막힌 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말을 뒤적거렸다싫어좋아그래아냐대체 뭐가 걸리는지 나는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쩡이는 답답하다는 듯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와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
오빠 설마 그때 그것 때문에 내가 불편해요왜 그래요나 그거 아무렇지도 않아요오빠가 나쁜 짓 한것도 아니고."

"
그게 아니라..."

"
아님 뭐에요 그 때 이후로 갑자기 그러잖아요연습도 안 나오고 뒷풀이도 안 오고 문자도 안하고."

"
오빠 공연 안 하면나 다시는 오빠 안 봐요나만 나쁜 애 되는 거 같고솔직히 기분 나빠질 거 같아요난 오빠랑 같이 공연하고 싶고같은 동료라고 생각해요그냥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라요."



점점 빨라지는 말에 여전히 쩡이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자어느새 나온 밴드 친구들이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나는 그제서야머리 속에서 고집스레 쥐고 있던 '체면'과 같은 쓸데 없는 것이 꽁꽁 싼 내 마음을 작게나마 마주할 수 있었다그리고 처음으로 쩡이를 만난 이후 가장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네 내 노래에 맞추려면 고생 좀 할꺼다." 비록 쩡이의 말은 나와 쩡이와의 관계가 너무나 먼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욱신거렸지만그 때만큼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뿌듯했다나를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고마웠다울컥하고 목이 시큰거리는게 기쁨의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아마 그 때 눈물을 보였다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으리라.





우리는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맹연습에 들어갔다나는 공연의 후반부 약 삼십분과 마무리 듀엣, 3인공연을 맡았다연습해야 할 6개의 곡은 익숙한 노래들이었는데그럼에도 막상 공연을 하면 가사를 까먹거나 호흡을 놓칠까 두려웠다혼자 노래방까지 다니며 죽어라 연습을 했다기말고사가 지나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남은 약 한달 동안우린 매일같이 모여 연습실을 들락거렸다매번 합주실 빌리는 비용을 부담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메인 보컬의 아는 음악선배가 겨울에 지방에 내려가는 사이 자기들 합주실을 쓰라고 하였다관리비만 내면 된다는 말에 우리는 조금씩 돈을 모아 연습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공연까지 수많은 난관이 기다렸지만돈이라는 큰 문제를 쉽게 해결했기에 더욱 연습에 힘이 붙었다.





겨울방학은 12 19일에 시작했다우리는 방학을 하자마자 매일같이 연습실에 모였는데 그것은 크리스마스에도 마찬가지였다.그리고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던 공연까지의 문제들 중에는 포함되어있지 않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커다란 문제를 맞이하게 되었다크리스마스길거리에는 커플들을 위한 캐롤이 울려 퍼지고 너도 나도 사랑을 외치며 가장 많은 아이가 잉태된다는 그 날.기타를 치던 친구는 정말 뜬금없게도연습실에서 쩡이에게 '널 좋아해라며 고백을 했다그건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그 누구도 수습할 새가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그 건조한 고백이 차라리 거짓이길 바랬지만그건 엄연히 벌어진 현실이었다.

 

 

사태가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단 둘이 이야기하게 해 주자며나는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왜 내가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다른 사람이 해도 될 일을 굳이 내가 자처했다들키지 않기 위해 지은 환한 웃음으로장난꾸러기처럼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겨울 밤찬 바람이 맨 살에 부딪히는 추위도 타는 속을 달래주지는 못했다친구들은 차인다차이지 않는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렸지만 난 그저 웃기만 했다입을 열었다가는 쓸데없는 말들이 나올 것 같았다풀어야 할 곳을 모른 채 마음속에 화가 둥둥 떠다녔다하얗게 피어나는 입김들을 보며 빌었다차여라차여라졸렬한 스스로의 기도가 통하길 빌었다.




생각보다 일은 빠르게 해결되었다기타를 메고 나온 친구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됐냐며 떠드는 호들갑에다음 연습에 보자며 쿨하게 돌아갔다평소에도 과묵하고 쿨한 녀석이었는데이럴 때 마저 변함이 없었다그래도 내심 그 뒷모습에서 왠지 '좋게는 안 끝났다'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연습실에 내려가서 각자 짐을 챙기며다들 쩡이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려 애썼는데 역시나 베이스는 아주 자유롭게 '야 정아 뭐라고 했어사귀는거야 이제받아줬어뭐야 야 얘기해주라~~' 하며 정이 주변을 맴돌면서 귀찮게 굴었다나는 마이크 선을 정리하면서도 청각에 온 정신을 다 집중했다덕분에 허공에서 마이크 선을 몇 번을 감고 풀었는지 모르겠다쩡이는 웃는 듯 마는 듯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라며 나중 되면 다 알게 될 거라고 했다그 순간 덜컹 하고 아랫배가 꺼진 기분이었다대체 어느 쪽이니?





연습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쩡이와 나는 같은 방향이라 함께 귀가하기로 했다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묘하게 그 화제만을 에둘러 피했다대신에 공연의 레파토리 라거나곡 순서노래할 때 어려운 부분들 같은 이야기만 돌고 돌았다솔직히 그 때만큼 베이스의 천진난만함에 가까운 재주가 부러운 적이 없었다나도 그런 뻔뻔함이 필요했다티도악의도 없이 거리감을 휙휙 좁혀가는 능력은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차마 쩡이에게 묻지 못하고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에게 대신 물었다너도 걔가 좋니나는 네가 좋다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니그 말을 들은 넌 날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려나답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들이 허공을 맴돌았다입으로 하는 말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은 채로 우리는 내일을 기약했다연습은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지속되는 계획된 스케쥴 이었고 그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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