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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청춘팩션] 17171771 4편 -完-
게시물ID : readers_71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ickyo
추천 : 3
조회수 : 53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4/30 21:46:40

다음 날우리의 연습은 예상과 달리 파토가 났다기타나 쩡이의 문제는 아니었다낡은 건물 지하에 있던 합주실 이었는데겨울의 추위로 인해 동파가 되면서 전기가 나가버린 것이다수리를 하는데 2~3일은 걸린다는 관리인 아저씨의 말씀을 들었다다른 연습실을 찾아보았지만 당일에 찾기는 쉽지도 않았고 거리도 너무 멀었다결국 우리는 합주실을 쓰지 못하는 동안 개인연습을 하기로 했다어쨌거나 각자 익혀야 할 곡과 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일정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날씨가 좋았지만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일어나자마자 집에서 가사집에 쉼표를 표시하며 한창 노래를 듣고 있는데 쩡이에게 문자가 왔다. '오빠 점심 먹었어요?' '아니 아직.' 그러자 바로 쩡이에게 전화가 왔다쩡이는 근처 마트에 왔는데 같이 밥을 해먹지 않겠냐고 했다어디서라고 물으니 오빠네 집에서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것이다..갑자기하며 헛웃음을 짓자그녀는 '파스타 재료를 세일하는데 혼자 해먹기는 쫌 그래서.. 오빠네 집 비죠?' '....' '그럼 한 삼십분있다 전화하면 마중나와줘요~' 딸깍---




30
초정도 멍하니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여전히 상황은 정리가 안됐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 방이랑 집을 정리해야했다물론 부모님과 같이 사는 학생이기 때문에 딱히 더 손을 댈 곳이 많지는 않았지만 맞벌이를 하시는 터라 내 방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지는 않았다미친 듯이 움직이며 옷을 다시 개고 걸고침구류를 정리하고 각종 여자 아이돌 포스터를 떼었다책상 위의 두루마리 휴지도 없애두고휴지통도 비웠다아차 싶어서 컴퓨터도 정리했다으아.. 나의..나의 미녀들이.... 그러나 주저할 수는 없었다백업의 생활화가 꼭 필요한 일임을 그때 절실히 느꼈다잘 가라 내 보물들아! 3초간 묵념을 했다.





쩡이는 생각보다 엄청 편한 차림이었다청바지에 패딩 후드를 푹 눌러썼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예뻤다날씨가 너무 춥다는 이야기를 하며 발을 동동대는 그녀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긴장감이 장난 아니었다머리속에 있는 생각은 너무 많았지만 깔끔하게 정리했다. '밥이나 먹자.' 그 이상은 도저히 사고회로가 버틸 수 없었다쩡이는 우리 집을 보며 오~~ 오빠네 집 깔끔하네요주방은 어디에요오빠도 나 도와줘야 하니까 손 얼른 씻어요라며 쉐프 모드로 돌입했다나는 생전 처음 양파도 썰고베이컨도 자르고토마토도 씻었다쩡이는 생각보다 엄청 본격적으로 요리를 했는데 굉장히 능숙했다지금 내가 하는 파스타들도 다 쩡이가 가르쳐 준 레시피를 따르고 있는데맛이 참 좋다.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파스타의 이름은 로제 크림 파스타라고 했다베이컨과 양파양송이 버섯에 미트볼이 올라간 토마토 크림소스 스파게티였다나는 그때 처음으로 파스타다운 파스타를 먹어본 것이었는데생각보다 꽤 맛있어서 놀랐다순수하게 감탄하며 '요리 되게 잘한다라고 말하자 쩡이는 처음으로 수줍어했다그제서야 쩡이가 엄청 귀엽고그리고 우리 집에 단 둘이 있다는 상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우와방금까지 맛있던 파스타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나 여자애가 해준 음식 먹어보는 거 처음인데..  난 면이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도 잘 모르는 채 어찌 저찌 접시를 비운 뒤쩡이에게 잠깐 앉아있으라고 하고는 커피를 찾았다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핸드 드립을 이용한 원두커피를 즐겨 마셨는데그걸 대접할 요량이었다달그락 달그락대며 그럴싸하게 커피를 우려내어 서로 양 손에 쥐고 앉았다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향긋한 커피의 내음이 거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
와 오빠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
엄마가 자주 해 드셔서그냥 따라 해봤어."

"
향 좋다.. 커피 잘 못 마시기는 하는데 이건 향이 너무 좋아요."

"
먹기 힘들면 다른 거 줄까주스 같은 것도 있어."

"
아뇨 커피 마실래요 직접 타준 건데 아깝게.."

쩡이는 그러고는 연신 '커피가 별로 안 써요!'만 반복했다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커피숍이 골목마다 있거나 학생들이 즐겨 다니는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나는 쩡이와 커피를 마시며 빙빙 겉도는 대화만을 반복했다왠지 모르게 서로 포인트를 피해가고 있었다그리고 역시 그걸 깬 것은 내가 아니라 쩡이었다


"
오빠기타 오빠가 저한테 고백했잖아요..."


"
!"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목소리가 커졌다쩡이는 약간 놀란 듯그러나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자기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생각해보겠다고는 했는데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연습할 때 보기 좀 껄끄러울 것 같다는 이야기 등이었다나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응그렇구나 하고 맞장구를 쳤다쩡이는 평소 기타오빠가 그럴 줄은 전혀 몰랐다고,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러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네가 그만큼 예쁘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절대 내뱉을 수가 없었다쩡이는 얼마 남지 않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연신 잘 모르겠다고 했다그건 조금 기쁜 말이었다쩡이가 기타랑 사귀는 건 싫었으니까.





한참 동안 그렇게 쩡이의 이야기를 들었다쩡이는 조금 속이 시원해진 듯, '오빠는 요새 애인이랑 어때요?' 라고 물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왜 쩡이가 굳이 나한테 찾아왔는지쩡이에게 있어서 밴드 멤버 중 유일하게 '애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뿐이니까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난 쩡이에게 '애인 없다니까라고 말했고쩡이는 '헤어졌어요?' 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난 쩡이에게 차근차근, '정말애인이 없었으며 그건 진짜 형의 물건이었다고 이야기했다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내게 그제서야 쩡이는 깔깔대며 웃었는데자기도 반신반의 했다는 것이다솔직히 오빠가 그런걸 살 수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며게다가 크리스마스에도 연습을 하러 나왔으니 없는 거 같긴 했다고그치만 오빠는 애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라고 말을 조금 끄는 순간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좋아하는 사람은..있어." 나도 모르게 심장 밖으로 나온 마음이 멈추지 않고 튕겨져 나갔다




"
와 대박진짜요누구??? 우리학교연상연하?"




사뭇 다른 표정의 쩡이는 신이 난 듯 물었다이번엔 내가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어요 생각만 해도 좋아라는 쩡이의 말에티 많이 나냐라고 물었다쩡이는 아까보다 더 크게 웃으며 연신 대박 대박 누군지 진짜 궁금하다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서두.. 크리스마스에 근데 연습이나 하고 있었어요뭐라도 해보지!! 라고 타박했다.그리고는오빠는 잘 됐으면 좋겠다내가 뭐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요 저 연애상담 완전 잘해줄 수 있어요쩡이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었다말이 잘못 튀어나갔다고 생각한 건 조금 지나서였고눈이 마주친 쩡이는 당연하죠 오빠라고 말해주었다나는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는데아마도 그 순간 쩡이는 뭔가 느꼈었나보다




"
왜요잘 안 되요?"

"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것도 걔는 잘 모를걸?"

"
오빠는 그런 거 진짜 못 숨길 거 같은데~"

"
그럼 알아 챘을까?"

"
...나라면 아마 알아 챘을 걸요?"



베시시 웃는 쩡이의 모습을 보며난 잠시 말을 멈추었다쩡이는 홀짝이며 남은 커피를 다 마셨고우린 몇 초간의 침묵을 공유했다그제서야 쩡이는무언가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음을 느꼈나보다나는 쩡이의 눈을 마주친 채 수많은 생각을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있었다그 생각들은 '하지마'로 간단히 나뉘었지만그보다 더 많은 생각들이 입을 떨어지지 않게 했다지금은 아니었다이럴 예정도 없었다그런데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조금 더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쩡이는 먼저 커피잔을 들고 일어나 '커피잔 어디다 둘까요?'라고 물었다.' 그 근처에 그냥 두면 된다는 말 대신내 입에서는 '쩡아'라는 이야기가 나왔다쩡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그저 달그락거리며 '설겆이는 오빠가 해요~'라고 말했고난 다시 '은정아라고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서야 쩡이는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왜요라고 물었다이름으로 부른 건쩡이가 날 오빠라고 부른 이후 처음이었다.






그건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었다굳이 그랬어야만 했을까지금 생각해봐도 모르겠다그치만 그때의 나는 쩡이의 손을 잡고 그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고 했다쩡이는 장난치지 말라며 손을 뿌리치려 했고난 놓아주지 않았다그제서야 쩡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쩡이는정말이냐고진심이냐고 물었다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쩡이는 한참이나 날 우두커니 바라보았는데그 침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길었다그렇지만 더 이상 내가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고요를 깨뜨린 것은 쩡이였다. '커피 한 잔만 더 주지 않을래요?' 그제서야나는 내 손이 축축하게 젖었음을 알고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





쩡이에게 따뜻한 커피를 주자쩡이는 한동안 말없이 찻잔만을 내려다 보았다몇 분이 지났을까쩡이는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미안해요정말정말 미안해요그 말은 정말 아팠다쩡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더 작은 목소리로 한번 더 미안하다고 했다나는 그제서야 겨우 조금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미안해 할 일 아니잖아.' 라고 말했다그 때 나는 쩡이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그건 차였다는 사실보다도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쩡이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비로소 확실하게 느꼈다쩡이 에게 집에 있는 손수건을 쥐어주며괜찮다고 몇 번이나 토닥여 주었다쩡이는 한참을 미안하다고오빠가 싫은 건 아니라고 말했다울음이 잦아들고조금 진정을 찾자 그제서야 정이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이의 어렸을 적 꿈은 가수였다고 한다그런데 중학교시절어머니를 따라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요리가 너무 좋아졌다고 했다그래서 지금 꿈은 쉐프가 되는 거라고 했다원래는 고등학교를 요리유학을 위해 프랑스로 가려고 했으나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일년을 미루게 되었다고 말했다밴드를 시작한 건 할머니께서 겨울에 돌아가시고한국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라고 했다어릴 적 꿈을 이렇게라도 느끼고 싶었다고그래서 조금 뻔뻔하게 '자기도 껴 달라고했다고 한다노래를 못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얼굴만으로 밴드를 할 만큼 예쁘지도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  할머니는 어릴 적 제가 불러드린 동요를 참 좋아했어요정이는 메이는 목소리를 조금 다듬으며자기는 내년에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다그래서이번 공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그리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오빠가 싫은 게 아니라고그리고끝까지 동료로 남아줄 수 없냐고머릿속으로 너 참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이기적인 것 보다 훨씬 더 네가 좋았으니까.





며칠 뒤 연습실 수리가 끝나고 모였을 때쩡이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기타 친구는 '공연이 끝난 뒤에대답을 들려달라고 했다고 한다어쩌면 밴드 생활중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를 나날들은 생각보다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었다쩡이와 나도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시 동료가 되어 웃었다그렇게 우리는 연말 공연까지 큰 위기 없이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 나갔다중간중간 장소 섭외의 어려움이나기계 대여 비용 같은 게 문제가 되었지만 다행히 잘 해결이 되었고우리는 연말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있었다.




공연을 일주일 앞에 두고 나는 악기를 다루는 친구들과 마지막 곡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나의 마지막 곡은 앞 곡이 끝나고 짤막한 MC멘트를 한 뒤에 하기로 했는데마지막 곡이 끝나고 멤버를 다시 한 번 소개하고 다 같이 합동으로 한 곡을 더 한 뒤 앵콜곡 두 개 정도를 메인 보컬과 듀엣이 나오는 걸로 정했다쩡이가 없는 회의에서나는 내가 부를 곡의 순서를 바꿔달라고 했다친구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딱히 어려운 일도특별한 일도 아니었기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우리 공연은 꽤 큰 사이즈의 라이브 하우스를 빌렸다다만 조명이나 음향을 잡아줄 사람을 그쪽 하우스에서 빌려 쓸 돈은 없었는데다행히 연습실을 빌려준 선배의 소개로 조명과 음향 엔지니어까지 있는 '진짜 그럴싸한공연 리허설을 경험했다이제까지 연습했던 걸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리허설이 끝날 때쯤엔 다들 사뭇 기분이 고조되어있었다비록 리허설 내내 신나게 까였지만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는 없었기에 굉장히 흥분되어있었다그날 밤에는잠이 안 온다고 연습실에 죄다 모여서 새벽까지 악기를 퉁기고 집에 돌아갔다.





리허설 다음날공연 본방은 생각 보다 많은 실수와 트러블을 겪으며 진행되었다기타 현이 끊어진다거나 선을 밟아서 엠프가 튄다거나 말을 더듬는다거나그래도 초청한 사람들이 전부 친구동창지인이었기에 다들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관객이 되어준 친구들은 나름의 야유와 환호를 보내며 우리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즐겼다처음에는 완전히 잘 맞춰야 한다고 서로 부담을 가졌지만 공연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그깟 자잘한 실수가 뭐 어때!' 라는 생각으로 신나게 놀았다정말 최고였다.평생 이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무대의 시간은 흘러어느새 내 마지막 멘트와 곡이 남았다헐떡헐떡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친구들을 한번 돌아보았다이제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마지막 말을 할 시간이다나는 목을 살짝 가다듬고 마이크를 잡았다.


"
제가 처음으로 이렇게 공연을 해봤는데요진짜 재밌네요아무래도 가수를 해야 하나?"

하는 소리와 몇몇 아이들의 '얼굴을 봐라~~푸하하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사실 제가 이거 공연 준비하면서 사고를 하나 쳤어요우리 밴드의 예쁜 홍일점 보컬 쩡이쩡이한테 고백을 했거든요?"

우와저질렀다입 속 침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관객석은 이야우와아오오오오오오푸하하하하 대박와 사귀냐사귀냐사겨라~!!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조명 때문에 친구들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엄청 재밌어 한다는 걸 목소리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나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

"
사귀긴 뭘 사귀겠어요그냥 축구공마냥 뻥 하고 차였구만."

사람들은 자지러지듯 빵 터졌고우리 드럼은 센스 있게 그 대목에서 두르르르쾅퉁탕 챵챵 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이쯤 되니 준비한 말이 많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서그냥 되는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
아무튼진짜 불편해질 법도 했는데 쩡이도 하나도 어색해하지 않고 이렇게 공연까지 함께 힘내줘서 정말 고마움을 많이 느껴요사실 기타도 쩡이한테 고백을 했는데얘는 공연 끝나고 대답 듣는대요와 쟤네 끼리 사귀면 나 진짜 완전히 새 되는거 아닌가?" 하고 슬쩍 싸이의 새 처럼 으쓱으쓱 했더니 관객들이 -우하하하하하하 하고 다시 한번 빵 터졌다이번 반응에는 베이스가 둥가당둥당 하며 흥을 돋궈준다난 기타를 치는 친구를 향해 씨익 웃어준 뒤말을 이어갔다.


"
그치만 그래도 전 정말 우리 정이가.. 정말 좋았어요일년 동안 너무 즐거웠고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준 우리 친구들이 너무 좋습니다기타는 정이랑 잘 되면 친구 안 할거에요하하농담이구요둘이 잘 되더라도전 마음 깊이 축하해 줄 겁니다..이제 마지막 곡 하나 남았네요."


잠깐 숨을 골랐다시덥잖은 말을 몇 마디 더 했다근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그저 그 때 들었던 생각은이제 진짜 보내야 할 시간이다 라는 것이었다그래끝낼 때다.


"
원래는 이 곡을 지금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제가 바꿔달라고 고집을 부렸어요정이는 왜 곡 순서를 바꿨는지 몰랐겠지요."


슬플 줄 알았는데웃음이 자꾸 터진다.


"
얘들아일년 동안 진짜 고마웠다!! 그리고 우리 쩡이!!!! 난 니가 정말 좋았다좋은 남자 만나라!!!!갑니다-!!!"




탁 탁 탁 쟈가장 징쟈쟈쟝-

 

 

....

안개처럼 사라져 간 다시 못 올 그 지난날 


함께한 추억 모두 흘려 보낼게 


널 잊어야 해힘들어도 


널 지워야 해기억 속에서 


네가 떠난 후에 난 죽을 것 같이 아파도 


두 번 다시 울지 않을게 


잊을께 잊을께 


....

 

공연은 '나름대로즐겁게 끝났다우리는 프로가 아닌 그저 스쿨 취미 밴드였고 음도 실컷 틀리고 박자도 실컷 틀렸다나중에는 관객 친구 중 흥에 겨운 친구 몇이 무대까지 올라와 춤도 추고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기까지 했다비록 지금처럼 술 같은 게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즐겁고 신났다고교 2학년이 정말로 끝나가고 있었다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꼽으라면,절대 빼놓을 수 없을 시기였다고 확신한다.



관객이 다 빠지고우리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었지만 장비를 대충 정리하며 무대에 주저앉았다아예 벌러덩 드러누운 베이스는 내게 '너 멋있더라차였지만.' 하고 낄낄대었고,  쩡이는 그런 베이스의 허벅다리를 발로 뻥 차버렸다그리고는 내게 와서 쪼그리고 앉아 이마에 딱밤을 딱 치고는, '진짜 사람 난감하게 한다니까.' 하며 배시시 웃었다기타를 치던 친구는 내 얼굴에 피크를 탁 던지며, '늦게도 저지른다 새끼야.'라고 퉁명스레 말했다나는 씨익 웃으며내가 요령이 좀 없었냐하고 물었다베이스를 따라 벌러덩  드러누우니무대의 바닥이 생각보다 엄청 차갑다는 걸 느꼈다온 몸이 땀으로 젖은 찝찝함을 달래주는 기분 좋은 시원함이었다.




처음에는 뒷풀이를 하려고 했지만다들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각자 집에 돌아가서 주말에 모이기로 했다서로 한번 꽉 껴안아주며수고했다는 한 마디가 새삼 정말 끝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각자 차례차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며마지막에는 쩡이와 나만 남았다우리는 공연 때 삑사리가 난 이야기나춤을 추러 올라온 관객으로 온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집까지 도착했다쩡이네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려는 찰나쩡이는 잠깐만 더 이야기 하자며 날 벤치로 끌고 갔다추운데 감기 걸릴 거라는 내 말에아직 너무 아쉽고 꿈만 같다는 그 아이의 손길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두개 사서 서로 나눠 쥐었다쩡이는 날 툭 치면서,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어쩜..' 하고 날 흘겨보았다나는 씨익 웃으며 능청스레 캔커피를 마셨다쩡이는 옆에 앉아서 이제 우리 다시 모이는 것도 별로 없겠다며 아쉬워했다. .. 나도 이제 고 3이니까 대학 갈 생각해야지하는 말에오빠 공부는 잘 해요라고 물어왔다. ...잘 못하니까 열심히 해야지라고 하자쩡이는 헤헤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낮설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말이 없다가쩡이는 동당대며 입을 열었다.


"
유학 가기 싫다.."

나는 그 말에 쩡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
네 꿈이잖아?"

쩡이는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
알아요당연히 갈 건데.. 오늘처럼 좋으면 그냥.. 오빠들이랑 헤어지기 싫고 그래요내일 되면 괜찮아 지겠지만지금은 그래요."

나는 피식 웃으며이번엔 내가 쩡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쩡이는 금세 웃으며, '오빠도 이런걸 다 하네.'하고 키득댔다.


"
이제 진짜 오빠랑도 얼마 못 보겠다 2월 초에 출국하거든요한 달도 안 남았어."

"
정신 없겠네.."

"
그다지준비는 미리 거의 끝내놨어요공연에 집중하려고 미리 착착 다 해놨지누구누구 씨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
그거 내 얘기?"

"
... 누구누구가 두 명이니까 누구누구 씨 들~인가히히."

"
인기 좋다고 자랑하는 거 봐라~."


쩡이는 헤헤하고 다시 웃었다

"
오빠랑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겠다."

나는 괜시리 그 말에 조금 설레며장난스레 되물었다.

"
그럼 나랑 사귀었겠네?"

"
-귿쎄오늘 같았으면..넘어갔을지도사실 오늘 쫌 멋있었어요감동했어."

그럼 유학 가지마라고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고, "이게 선배를 놀리네."하고 웃어버렸다쩡이는 살짝 미소 짓더니손에서 데굴거리고만 있던 캔커피를 내게 주었다. "따줘요나 지쳐서 힘이 잘 안 들어가요." 


따뜻했던 캔 커피는 꽤 식어서딱 정이의 손 온도겠거니 싶은 미지근함이 남아있었다찰칵-하고 캔 커피를 따 주자쩡이는 캔 커피를 받는 대신 갑작스레 입을 맞추었다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녀와 키스했다납뜩이가 본다면 뽀뽀라고 했을 것 같은그런 키스였다살짝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입술은 잠깐 동안 내게 머물러갔다.



쩡이는 키스를 끝내자마자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첫 키스에 커피냄새 나는 건 싫으니까..'라고 중얼거렸다나는 멍하니 정이를 바라보았다정이는 이내고개를 살짝 들어 날 보고는 말했다


"
오빠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지만만약 내가 여기 계속 있었다면 오빠를 더 좋아하게 됐을 거에요그러니까이건 내 나름의 보답오빠한테 내 첫 남자친구의 자리를 주지는 못했지만.. 첫 키스는 오빠한테 준거니까."


그리고는 '-내가 미쳤지!' 하고는 잡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캔 커피는 오빠 줄게요뒷풀이날 봐요!!"하고는 현관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나는 멍청하게잡다 만 손을 허공에 뻗은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입가에 남은 말랑한 감촉이 현실인가꿈인가 하고 의심하게 만들었지만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미지근한 캔 커피는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며칠 뒤우리는 다 같이 연습실에 모여 치킨과 피자를 잔뜩 시켜두고 뒷풀이를 했다베이스를 치던 친구는 몰래 가져온 거라며 맥주 피쳐를 네 개나 들고 왔다우리는 에라 모르겠다하고는 종이컵에 맥주를 담아 마시며한 해의 시작을 우리의 1년을 보내면서 맞이하였다다들 술을 마시기엔 조금 어렸기에 금세 혀가 꼬부라졌고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단지 기억나는 건거기서 마지막으로 다 같이 노래를 불렀고쩡이는 울었으며기타치는 친구가 쩡이를 안아주었다는 것이다.그리고 나는 그런 기타에게 좋냐며 쿡쿡 찔러대었고물론내가 쩡이와 키스를 했다는 건 여전히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쩡이는 그날자기가 왜 밴드를 했으며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았던 것 같다유학이야기나할머니 이야기 같은 거그날우리는 공연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한 팀'으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자 고3으로 돌아갔다다른 친구들은 벌써 한참 공부를 했을 텐데 우리는 벌써 한 달 가까이 늦은 셈이었다웃기는 건그 와중에 각자 따로 끊었다고 생각한 사설독서실이 전부 같은 곳이었다는 점이다참 지독한 인연이라며 서로를 놀려대면서도우리는 그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했다뒤풀이 후에 유학준비에 바쁜 정이는 두어번 독서실에 놀러 와서 우리에게 출국일과이메일 등을 알려주며 손수 만든 김밥을 주고는 했다예전처럼 문자도 주고받고통화도 자주 하는 정이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뭔가 새롭게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정이의 출국 일에 우리는 다 같이 배웅을 가기로 했다그리고 그 전날정이는 내게 '나 다음에 한국 돌아 왔을 때 잊어버리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출국일 아침나는 친구들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핸드폰을 꺼버렸다배웅을 갔다간 울음이 터졌을 테니까정이는 유학에 가면 한국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다아마 이렇게 멀어지는 거겠지하며 정이가 들어보라고 녹음했던 시디를 틀고 이어폰을 꽂았다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던 때부터 공연 직전에 꽤 그럴싸한 목소리까지정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친구들은 정이가 끝까지 아쉬워했다고 했다나는 메일 주고받으면 되는 거라고이제 오로지 공부..공부뿐이라며 웃었다3이 지나고수능을 보고재수를 하고대학을 가고정이가 프랑스로 떠난 지 거의 10여년이 다 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었다그 동안 우리 각자는 새로운 사랑도 맞이하고여자친구도 생겼다그렇지만,나는 매번 어떤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될 때마다 17세의 쩡이가 떠올랐다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는데하며스스로도 놀랄 만큼 여자아이 앞에서 태연해진 내 모습이 때때로 재밌었다쩡이가 지금 날 보면 뭐라고 할까?

 

 

재수가 끝나고 대학에 들어와 막 새로운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어가고 있을 즈음나는 평소에 들어가 보지 않았던 이메일에 접속했다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쩌다보니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나는 하도 접속하지 않아 까먹은 비밀번호를 세 번 이나 틀려서 핸드폰 인증을 통해 비밀번호까지 다시 찾은 뒤에야 접속할 수 있었다오랜 기간 방치해 둔 탓에 휴면상태로 전환되어 있는 것을 해제하고나니 과거의 잔뜩 쌓인 광고 스팸 이메일들이 가득했다한꺼번에 싹 지울까 하다가적당히 쓸만한 정보 같은 게 있을까 싶어 대충 페이지를 넘겨보았다그 스팸 사이에낯설은 이메일로 오빠에게’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이거 야한 사이트 광고겠구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클릭했더니 이게 왠걸쩡이가 보낸 메일이었다.

 


쩡이는 한국에 잠시 들어올 거라고 했다그리고혹시 이 메일을 읽는다면 자기가 한국에서 쓸 부모님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줄 테니 꼭 연락해달라고 했다마지막으로첨부파일에 넣어둔 노래를 들어달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나는 ‘17171771’이라는 제목의 첨부파일을 열었다자우림의 노래였다우리가 처음 단 둘이 낙원상가를 가며 꼭 들어보라고 그 아이가 추천해 준 노래였다.스피커에선 오랜만임에도 여전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고교 시절이 떠올라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겨우 눈물을 참았다. 3분여의 노래가 다 끝나고예전보다 진짜 노래 잘 하네.. 하며 술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첨부파일을 닫으려는 찰나스피커에서 끝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만약에요만약에.. 이 말을 듣는다면요그리고 혹시 지금까지 날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한국에 돌아갔을 때 날 만나주지 않을래요난 여전히 그날 그 벤치에 무언가를 뚝 떼어놓고 온 것 같아요그러니까.. 꼭 만나고 싶어요보고 싶어요.”


 

약간 울먹거리는 듯이 느껴진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나는 그제서야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닦았다재빨리 메일 주소에 대고 그녀의 이메일을 검색했더니 수십통의 메일이 떴다하나 하나 읽으면서 그녀가 외지에서 느꼈을 외로움힘듬그리고 왜 메일을 안 읽냐며 타박하는 것들 모두가 마음을 쾅쾅 때리는 것이 너무나 아팠다상념에 잠겨 쩡이의 이메일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문자에는 여자친구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불러내는 내용이었다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보다가 이내 알았다고 어디로 갈까 물으며 애써 밝게 답장을 보냈다그리고마지막으로 처음 열어본 메일을 한번 더 읽은 뒤 망설이다가 삭제 버튼을 눌렀다읽지 않은 메일들을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다가 결국 눈물을 무릅쓰고 휴지통에 넣었다은정아내가 너무 늦었나 봐조금 엇갈려 버린 것 같다 우리는..

 



천사의 미소처럼 새들의 노래처럼 이토록 사랑스런 당신이 좋은걸요

어서 내게로 와요영원히 함께해요우리 함께라면 두렵지 않은걸요-

세상에 단 한 사람 당신당신을 만나기 위해 난 이 세상에 태어난 걸 알고 있나요

어쩌면 우린 예전부터 이름 모를 저 먼 별에서 이미 사랑해 왔었는지도 몰라요.

5월의 햇살처럼 10월의 하늘처럼 그처럼 못 견디게 당신이 좋은걸요

어서 내게로 와요 느끼고 있잖아요 어느 새 어둠이 사라져 버린걸.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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