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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본인글 펌] 이래서 어제 그알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게시물ID : sewol_522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흔한교회오빠
추천 : 4
조회수 : 36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20 03: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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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자체펌글입니다. SNS글이라 반말을 쓰는것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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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어제자 그알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월호 희생자 친구들과 그 유족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박근혜를 필두로 한 국정농단세태에 화가나서
마음이 미워진다...

털어내기위해 SNS에 몇번이나 글을 썼었다.
그때 그 모습은 내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기 때문에.

군입대전에, 그러니까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할 자본과, 학교도 안다니는데 부모님께 손벌리는 모습이 싫어서 독립할 준비를 한답시고 생활비를 버느라 했던 일들중 하나가 중고등학생 수학과외였다. 그것도 딱 세월호 희생자 또래의 친구들을 가르치는. 2014년 4월 16일 아침 8시반쯤에, 내가 상병때였는데 왜 막내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근무판 변경을 하다가 부대 상황실에서 TV를 통해 배가 기울어진 모습을 보고는 혹시 평택 소재의 학교 학생들이 타고있는게 아닌가(왜냐하면 그 즈음해서 평택여자고등학교가 배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타고있지는 않은가 그게 두려웠고, 단원고 학생들이라는것과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듣고 완전히 마음을 놓았었다. 그리고 그날 점심이었는지 근무가 끝난 오후늦게였는지 270여명의 학생 및 여행객들이 배에 타있는 채로 가라앉았다고, 전원 구조는 오보였다고 하는 그 방송을 보며 내 마음도 철렁하며 가라앉았었다.

그리고 한달쯤 뒤, 갑작스레 바빠진 부대. 희생자들의 시신운구작전이 계획되었다. 원래는 팽목항에서 안산소재의 병원까지 헬기가 직통으로 시신을 운구하지만, 병원의 헬기착륙장 직원들이 퇴근하는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유족이 원할경우 수원소재의 우리 부대까지 헬기로 운구한 후, 119 엠뷸런스로 다시 안산까지 운구하게도 가능하게끔 작전이 세워졌다. 다만 비행체가 이착륙할 경우 수많은 지원부대가 대기해야하고, 내가 근무했던 소방중대도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 대기해야하는 부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구조용 조명이 꽤나 밝아서 헬기에서 엠뷸런스로 운구시 조명으로 사용가능했기 때문에 근무자 OFF도 없는(원래 새벽에 일정시간 이상 근무하면 다음날은 근무를 빼주고 푹 자고 쉬게 해준다.) 초과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낮에는 평소에 하던 일들도 같이 해야했기 때문에 새벽근무조는 최소한의 인원만, 그것도 비행이 시작되면(팽목항에서 헬기가 이륙하면) 자고있는 근무자를 깨워서 근무에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간부들은 2인1조로 2조를 구성하라고 했지만(원래는 최소4인1조에 최소 3조가 원칙이다.) 나름 1년간의 짬으로 자신있던 나는 혼자 소방차 한대를 담당하겠다고 부대상황실에 얘기했다.

왜그랬을까. 세월호 침몰을 전후로 당시 나얼이 새벽 라디오를 했었기 때문에 그걸 듣겠다고 새벽에 몰래 깨어있기도 했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에 내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수 있을까 고민되기도 했고, 어짜피 힘든일은 일병들이 다 하니까 새벽만이라도 푹 잘수 있게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여러가지 생각들이 겹쳐서 근무표를 짤 때 부대 상황실에 가능하면 나를 많이 넣어달라고, 거의 고정처럼 넣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고 거의 매일을 하루에 4-5시간정도 자며(사실 낮에 몰래 자기도 했고, 부대 간부들이 생활관까지는 못보내주지만 근무지에서 자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친구들을 맞이해주고 보내주고 있었다.

이런 일상이 한달이 넘게 지속되면서 점점 익숙해져 싸늘하고 물에 불은 시신을 보는게 지루해지고 피로해지던 어느날, 늘 적어왔던, 그리고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내 몸 곳곳에 남아있는 그때의 그 기억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자녀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허리를 접어가며 고맙다고 울며 감사하고 있었다. 아직도 떠오를때마다 그때 그 감정이 되살아나고, 이 감정이 무슨감정인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고 정신이 맑아지며 가슴이 아프고 왜인지 모르게 시신을 전달해드려야만 하는 내 모습이 미안해지는, 어떻게든 살려내고싶다는 마음이 드는, 그렇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답답함.

그리고 그동안 잊고있었던 기억이 이번에 그알을 보면서 떠올랐다. 새벽에 그렇게 근무를 하던 어느날, 갑자기 부대 내부의 도색을 다시 한다길래 피곤해죽겠는데 무슨 페인트칠이냐고 간부한테 물어본적이 있다. VIP가 격려차 방문한다고, 그래서 페인트칠 다시하고 신발자국 내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를 들었었다. 더 웃긴건 이런일은 군대에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병신들이 또 이러네 이러고 그냥 비웃고 넘어간 내 모습이었다. 사실 마침 도색하는 날이 내 휴가와 겹쳐 본의아니게(?) 열외를 받았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단 세월호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국가와 정부가 구석구석 안썩어있는곳이 없다. 얼마전에 SNS에서 본 가장 공감가는 글을 인용하자면, 정의를 이야기하면 따를 당하는, 청년들조차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고 정치를 외면하는 상황이다.

나라꼴이 이렇게 된게 청년들 탓은 아니다. 그치만 지금 청년들은 이 사회에 속한 일원임을 인식하고 일말의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정치에 관심둬봐야 머리만 아프다고 신경끄라는 사람들은 민주시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삶이 아무리 힘들고 팍팍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구제를 요청하지 마라. 헌법상 민주주의 공화국 국민의 자격이 없다.

P.S 1. 요즘 개인적으로 생각나는게 있어서 늘 잠을 제대로 못잤는데 오늘은 그 생각에 이 생각이 합쳐져서 잠못이룰것 같다.
 
 P.S 2. 나는 이 사건 이후로 내가 얼마나 인간쓰레기인지 깨닫기도 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 시신을 보며 지루해하고 피곤해할수 있다니... 내가 이런 인간이다 라는것.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P.S 3. 결국 VIP는 우리부대에 방문하지 않았다. 결국 페인트칠도 뻘짓... 군대에서 VIP는 대통령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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