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투식량에 대해 항상 그렇지만 아주 약간만 짧게 다룹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진없습니다.
다른 동네의 식습관에 대해서는 그 동네의 문화에 대한 책자를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먹는건 그야말로 역사니 말입니다.
일본 역시도 우리와 같은 자포니카종 쌀로 밥해먹고 장류 문화권에 속한 곳입니다.
덕분에 어떤 면에서는 홉사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쌀은 의외로 영양가가 높은 곡물입니다.
비타민과 무기질만 적당히 맞춰주면 쌀로도 어느정도 버틸정도로 영양분을 가지죠.
밀보다 더높고 옥수수같이 하나만 먹다간 펠라그라에 걸린다든지 하는 일은 없는 겁니
다.
물론 비타민 B군의 결핍에 의한 각기병이 날 수 있지만 이건 도정과 관련된 거지 그냥
이전처럼 조악하게 도정된 쌀을 먹는다면 이것도 드물 지경이죠. (각기병을 일본 친구
들은 부자병이라 부른 경우도 있습니다. 진짜 백미만 먹어대는건 돈이 좀 있는 경우에
나 가능했고 비타민 B군의 보충이 안되면 탈날 수 밖에 없었고 가난한 사람이야 백미가
될때까지 도정해서 먹을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여튼 이렇게 영양가 높은 쌀은 인구 증가를 시키기에 더없이 좋았지만 대신 어느정도
인구가 차오른 이후로는 다른 것은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만듭니다.
과밀한 인구를 먹이기위해 더 품이 들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식재료를 경작 혹은 사육하
다간 답이 없었거든요.
여기에 습하다 라는 기후상의 특징에 의해 목축은 제한되고 주로 농사일하는데 써먹기
위한 소같은 동물을 키우는 정도로 끝나면 식단은 뻔해질 겁니다.
탄수화물과 식물성 단백질, 식물성 부재료에 목숨걸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거죠.
여기에 주변이 온통 바다고 강이 있으니 생선이 주요한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 될거고
말입니다. (산에서 나는 동물성 단백질이 없는건 아니지만 사냥이 항상 잘된다는 보장
은 없죠. 특히 인구 증가와 개발이 겹치면 말입니다.)
뭐 종교적 이유(불교)에서 육식이 금지되니 그렇더란 소리도 있지만 그런다고 아예 고
기를 안먹은건 아닌데다 생선이 그 위치를 차지한걸 보면 이건 그렇게 설득력이 있다라
고 보긴 뭐할겁니다.
이런 판인지라 저 동네 식단은 꽤 오랫동안 밥, 밥을 넘기기 위한 약간의 소찬류와 생
선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반찬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쓸데없이 낭비한다라는 것과 일맥
상통하며 경멸받는 상황이 됩니다.
'2홉반의 쌀과 약간의 소금, 소찬이면 하루 2끼를 먹고 지낼 수 있다.'
--- 사무라이의 녹봉에 대한 기준.
단, 에도 시대는 하루 3끼가 자리 잡은 때입니다.
그 전에는 하루 2끼였지만.
한편 면이나 떡같은 분식류의 경우는 주식이 아닌 간식류로 취급받게되고 간단하게 맛
을 낼 수 있는 장류는 매우 존중받습니다.
특히 이 장류에 대한 의존은 지금도 여전할 정도죠.
이런 상황에서 19세기에 돌입, 서양을 따라가게 되면서 이전에는 특별한 혹은 약용이란
명목으로 섭취되던 육류가 문명개화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며 육류 소비가 증가되게 되
죠.
게이오 숙이니 뭐니 하는 곳에서 먹더니 곧 고기 안먹어본 놈은 문명개화가 덜된 놈이
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게되니 말입니다. (재미있는건 이 시기, 고기요리를
파는 곳에서는 약고기를 판다는 식으로 광고했고 관련된 풍경은 솔직히 그닥 재미있던
건 아니지만 바람의 검심에서 잠시 나온 적이 있었죠.)
그런데 이런 발전에대해 일본 요리가 분기를 타게 됩니다.
전통요리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느니 화석화되며 기교에 치중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
게 되고 가정 요리와 같은 일상적인 것은 외국의 요리법을 홉수하여 전통적인 밥에 반
찬으로 삼는 모습을 띄게 됩니다.
심지어 장류조차도 외국의 장류 - 우스터 소스나 케첩같은 - 도 추가되게 되죠.
(그리고 이건 우리 역시도 받아들이죠. 밥에 소세지나 돈까스를 곁들여 먹는걸 한번 생
각해보시길.)
요기까지 대충 접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전국시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쌀 4홉이내, 된장(미소)와 소금 1작 가량에 해당
하는 식료가 지급됩니다.
이건 곧이곧대로 그대로 지급된건 아니며 전투중 그나마 짬이 날 때 먹는 진중식이냐
진짜 전투 혹은 행군중 먹는 것이냐에 따라 다르게 요리되거나 휴대가능한 형태로 변경
되어져 지급됩니다.
가령 주먹밥은 휴대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주 먹던 것이었고 여기에 소금이나 된장으로
간을 한다거나 분말 된장, 된장이나 소금등에 절이고 말린 형태로 만든 토란 줄기나 우
엉, 건어물, 오래 보관되는 염장 채소나 우메보시따위가 반찬으로 지급되죠.
또 쌀은 상황이 가능하면 밥이나 죽형태로도 지급되고 찌거나 볶은 형태, 아니면 떡으
로 만들어 말리거나 해서 보관했다 이 지급되기도 합니다.
그외 두부를 얼리고 말린 고야토후라든지 이거저거 혼합해 환으로 만든터라 간혹 닌자
식으로도 알려진 군량환이라든지 이런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거의 상상해볼 수 있는 보존방법이 그대로 사용됐고 가급적 농한기에 먹던 평시의 보
존식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단은 전국시대가 끝나면서도 거의 변화없이 유지되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일
본군이 만들어지면서 서양식이 추가되게 됩니다.
빵과 카레라이스, 그리고 통조림으로 대변될 수 있는 변화가 생긴거죠.
건빵.
일본 친구들은 乾パン 이라 부르는 이 물건은 익히 예상하셨듯이 서양의 비스킷에서 출
발합니다.
아마도 16세기경에 이미 포루투갈인들 덕에 비스킷의 존재를 알게됐지만 이게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같지는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분식을 간식정도로 보던 곳이다보니 이거 남만(南蠻)과자정도로 끝나고 나
가사키 중심으로 연구를 하긴 하지만 정착됐다고 보긴 어렵겠죠.
허기야 이미 찐쌀을 주재로 한 건반
이 있는데다 각 지역마다 병량환(兵糧丸), 비급병(備急餠)이나 증병(蒸餠)같은 떡 혹은
그에 가까운 물건들이 있었으니 반응이 시큰둥했겠죠.
그러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고 영국등에서 이거저거 배워오면서 서양의 비스킷을 도입
하게 됩니다.
서남전쟁 당시 일부에서 서양의 비스킷을 공급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때도 역시 그냥 잠시 스쳐가는 정도로 끝나버리죠.
그러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찝적대는 일이 잦아지며 자신들이 가진 건반이나
주먹밥으론 작전에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됩니다.
건반은 먹으려면 물을 부어 불려먹어야하고 - 아니면 입에 털어넣고 부풀어 오를 때까
지 마냥 씹던가 - 주먹밥은 빨리 먹으면 다행이지 오래 휴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으
니.
그래서 독일과 러시아등에서 그 동네의 야전식이던 비스킷을 배워와 자신들의 비스킷인
중소면포(重?麵麥包)를 만듭니다. (포자는 별 수 없이 麥包로 표기했는데 떡 포자입니
다.)
뜻대로 풀자면 잘구운 밀가루떡이란 의미죠. (?은 국수란 뜻외에 밀가루따위를 의미하
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물건, 그렇게 먹기 좋았던건 아니었던가 봅니다.
밀가루에 찹쌀 가루 약간등을 혼합하고 구운건 좋은데 보존연한을 7년정도로 잡아 수분
을 줄일만큼 줄이다보니 그 굳기와 맛이 괴랄했다죠.
오죽했으면 이거보고 비슷한 발음이 나는 중상(重傷)이란 별명을 붙여줄 지경이었으니.
먹는 쪽이야 어떻건 간에 오래가고 어쩌건 먹으면 배는 부르다는 덕분에 중소면포는 러
일 전쟁중에도 사용됩니다만 이때도 역시 불평을 삽니다.
무엇보다 쉽게 박살나 막상 먹으려면 가루 상태가 됐더라는 것이 컸고 이 때문에 얼마
안가 배합비등이 변경됩니다.
또한 사용된 밀가루도 글루텐 성분이 적은 미국산 밀가루 대신 유럽산으로 변경한다든
지 하는 노력도 하죠.
이렇게 개선된 중소면포는 건(乾)면포라 불리게 됩니다.
러일전쟁중 불평은 샀지만 그래도 야전에서 한끼 식사이자 비상식으로 먹을 수 있다라
는 점을 높이산 건면포, 당당히 제식 지급품이 됩니다만 타이쇼 시대에 들어서 군납 비
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건면포의 규격을 지정하여 검사후 납품받는 식으로 변경하죠. (이는
다른 물품 - 말 사료 포함 - 도 동일하게 처리됩니다.)
당시 건면포는 밀가루에 10%가량의 쌀가루에 감자전분, 약간의 참깨, 설탕과 소금이 들
어가며 개당 100g정도에 2개가 1끼분이었죠.
60개 - 30인분 - 이 방청처리된 양철통에 넣어지고 다시 나무상자로 포장되어져 지급되
며 통상 3끼분, 그러니 6개가 휴대됐다 하죠.
1920년대 들어서며 시베리아 출병이니 뭐니 하면서 한랭지에서의 당분 보급을 위해 별
사탕(コンペイト)이 추가됩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을 가지게 된거죠.
이 시기, 재미있는 일이라면 이 별사탕 색이 처음에 그냥 흰색이었답니다.
그런데 추운 동네에서 훈련받던 입장에서는 이 흰색 별사탕이 얼음같아 짜증스러웠나
봅니다.
그 덕분에 빨간색이나 황색, 녹색으로 물을 들리게 됐다 하죠.
이런 비슷한 물건은 해군에서도 사용됩니다.
아니, 영국해군에서 이거저거 배워온 일본 해군으로선 좀 더 무덤덤했을 겁니다.
한편 저 때 건빵은 2개가 1끼가 된다는 점에서 그 크기가 쉽게 연상될겁니다.
대충 가로 10cm, 세로 5cm정도에 두께도 1cm내인 커다란 놈이었고 이건 야전에서 부수
러지기 쉽고 먹기도 거북했다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아는 건빵 크기로 작아집니다.
이른바 한입 사이즈가 된거고 집어먹기 좋고 만들기 좋아 평이 좋아지죠.
이름 역시도 건면포에서 건빵으로 변경됩니다.
단, 해군에서는 이전의 큰 건빵 역시도 계속 지급이 됐다나요.
그 후, 건빵 자체에 당분이 더 많아지고 계란이 들어가는데다 쌀가루 함량이 더 많아지
면서 일본군에서 야전 식량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2차대전중에는 한끼당 200g가량, 별사탕 10g이상이 봉투 하나에 들어가 지급됩니다.
가볍고 오래가고 의외로 영양가도 있는데다 익숙해지면 먹을만해 자주 사용되죠.
물론 이건 군에서의 이야기지 그 이후 우리처럼 민간에서도 인기를 끈건 아니었다 합니
다.
지금 우리가 건빵을 과자처럼 보는 것에 대해 '비상식이 과자?' 라는 생각을 할 정도니
말입니다.
카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삼아 해군력을 키우게 되죠.
이 와중에 해군의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지니 바로 각기병이었습니다.
각기병(脚氣, beriberi, 스리랑카말로 할수없다, 할수없다라는 뜻)의 가장 눈에 띄는
증례는 아마도 부은 다리와 누르면 다시 나오지 않는 살일 겁니다.
초기에는 입맛없고 소화 안되고 늘 피곤하며 감각이 둔해지다 심해지면 다발성 신경염,
부종등이 나타나고 무릎의 반사작용이 감소하다 근육이 마비되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죠.
물론 심해지면 죽습니다.
여튼 일본 해군, 많은 각기병 환자를 냅니다.
1880년대까지 매년 30% 정도가 각기병에 걸렸고 한해 20명 이상은 각기병으로 사망할
판이었으니.
특히 이 병은 장거리 항행에 나선 함에서 빈발합니다.
심하면 절반 정도가 이 병에 걸릴 판이었으니.
일본 정부, 각기병을 연구하나 확실한 답을 얻어내진 못합니다.
허기야 서양 의사들도 유럽에선 보기 힘든 각기병이 일본을 위시한 동양에서 많은 것에
주목하여 이에 대해 풍토병인지 중독인지 세균인지에 대해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죠.
아주 잠시, 이전의 경험 - 이 병이 에도병이라 불리던 시대 - 에 의해 백미가 원인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 한의학자가 있었지만 깔끔하게 무시되죠. (에도병을 고치는데는 메밀
소바를 먹어라는 경험적인 조치가 있었으나 이 역시 잊혀집니다.)
사실 이 병의 원인은 딴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티아민, 비타민 B1의 결핍이었고 이건 보리나 콩등에서 충분히 섭취가 가능한데다
쌀에서도 배아만 잘먹어도 걸릴 일이 없는 병이었죠.
그런데 보리나 콩, 육류같은 것까지 잘 안먹고 아주 철저히 까서 하얗게 만든 백미만
먹어대면 걸리게 되버리죠.
당연히 쌀안먹는 서양에서는 안걸렸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걸릴 일이 없던 병이었죠.
문제는 정미 기술이 발전해 이전에는 백미라곤 구경도 못하던 사람들이 눈처럼 하얀 밥
을 먹으면서 일이 꼬인 겁니다.
돈이 있어 적당한 부식을 섭취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
린거죠.
1879년, 영국 유학을 마친 해군 군의관 다카키 가네히로(高木兼寬)가 귀국합니다.
그는 임상을 중시하던 영국에서 공부한터라 해군을 괴롭히던 각기병 문제를 해결하기위
해 꼼꼼한 조사를 시작하며 이 작업의 결과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부사관 및 병, 죄수에게 많이 일어나고 사관에서는 발병이 드물더라.
더 조사한 결과, 환자의 다소는 음식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란 점이 밝혀지고 여기에 질
소 요인설을 꺼내게 됩니다.
영양성분중 질소분이 다량 함유된 단백질이 탄수화물에 비해 적고 이게 혹시 각기의 원
인이 된게 아닌가 라는 가설을 세운거죠.
이게 설득력이 있었던게 당시 일본 해군은 영국해군처럼 쌀은 줬지만 부식은 그에 상응
하는 돈으로 줬는데다 병의 경우 이 금액이 형편없었다는 점이었죠.
당시 1일 기준으로 18센 정도였고 이 돈마저도 제대로 부식을 사먹지 않는 경우가 있었
으니 말입니다. (일단 장류만 있어도 밥은 먹을 수 있으니.)
즉, 각기병에 잘걸리던 계층은 쌀밥만 퍼먹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따라 1884년(메이지 17년) 1월 15일, 해군명으로, 금급제도가 폐지되고 현물로 주
는 방식이 채택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다카키가 요청했던 식단의 양식화는 추진되지 못합니다.
아니, 일단 빵이 지급은 됩니다.
그해 2월 3일, 해군의 연습함 츠쿠바는 시나가와에서 출항, 뉴질랜드, 칠레, 하와이를
거친 287일간의 원양 항해를 끝냅니다.
이 항해에서 다카키가 제안한 1일당 650g의 쌀, 300g의 육류, 생선이나 비스킷등이 포
함된 서양식에 준하는 식료가 공급됩니다.
이 실험은 성공합니다.
승무원 333명중 16명에게서만 각기가 발생했지만 사망자는 없었죠. (저 16명은 서양식
식단이 입에 맞지 않아 그걸 안먹은 사람들이었다죠.)
해군성, 다카키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미 영국을 모델로 공부해온터라 군의관련에서도 '근거로 기초를 한 의료'인 영국식에
대해 쉽게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니.
덕분에 급식에 대한 개선은 빠르게 진행됐고 1883년에 23.1%이던 각기 발생이 1884년에
는 12.7%, 1885년에는 1% 미만으로 격감합니다. (1984년 이후 사망자가 한명도 없었던
점도 눈여겨 볼만했죠.)
그런데 이 개선은 2가지 면에서 발목이 잡힙니다.
1. 인간 세상은 예산이 지배하죠.
다카키가 원한건 쌀밥 대신 빵과 양식을 주자였습니다.
그런데 양식, 돈이 더 듭니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는 아직 일본이나 우리나 여전히
유효합니다. 군에서 드셨던 군대리아 단가는 밥보다 더 비쌉니다. 자위대 역시도 마
찬가지 상황이며 다른 급식소에서도 그렇게 틀리진 않는다죠.)
게다가 이미 조리 설비등을 전부 구비한 상황에서 빵구우라하면 욕나오는게 인지상
정이죠.
당장 오븐부터 해서 바꿔대고 취사원들 교육도 다시해야할 판인데 말입니다.
2. 인간은 중독을 즐기는 동물이죠.
그동안 쌀밥에 길들여지고 쌀밥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빵주면 욕안나
오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오죽했으면 저 츠쿠바의 항해때도 식사시간대에 배 주변에 빵이 떠다녔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으니.
하루 세끼 밥먹는게 크나큰 즐거움이던 병사들에게 양식을 강요하다간 그 결과는 안봐
도 빤한데다 돈문제가 잡히자 차선책이 제시됩니다.
바로 빵의 원료이자 값싸고 영양도 풍부한 보리를 밥과 같이 주자였습니다.
1885년(메이지 18년) 3월 1일, 빵대신 보리(할맥) 혼식이 시작됩니다.
이 때 쌀과 보리 비율이 2:1 이었다 하죠. (1917년 이후부터 밥 한그릇당 1/4 수준으로
낮춰집니다.)
그런데 이 보리 혼식, 인기가 없는 정도면 다행이고 악평이 자자합니다.
결국 이 때문에 1890년 2월 12일, 해군 양식 조례가 공표됩니다.
주식은 쌀밥과 보리밥을 적당히 번갈아 주면서 빵도 주는데다 양식보다는 일본화된 양
식을 개발하여 준다라는 것이었죠.
이 조치는 나름 먹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일본화된 양식으로 카레가 등장하죠.
당시 영국 해군 및 육군, 특히 인도주둔군 사이에서 이국적인 식품이자 강장용 식품으
로 공급되던 스튜중에는 인도풍의 양념을 한 스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도식 양념인 카레로 맛을 낸 스튜였던거죠.
그리고 이 인도풍 스튜는 일본 해군에서도 받아들여지며 빵과 함께 내놓아집니다만 빵
은 얼마못가 퇴출되고 대신 밥이 들어서자 스튜가 아닌 밥위에 뿌려먹는 스타일로 변형
됩니다.
빵은 인기가 없었지만 카레는 인기가 있었던 거죠.
덕분에 일본식 카레는 빵을 찍어먹기 적당한 농도의 스튜가 아닌 밥에 얹어먹기 적당한
점도를 가지게 밀가루등이 첨가되고 이게 지금 우리가 아는 카레의 시초가 됩니다.
그 후, 이 해군 카레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 해군에 있어서는 토요일 밤의 식사이자 타
이쇼 시대 이후 민간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지금
은 일본인이 여름에 안먹으면 이상하다할 수준이자 해자대에서는 금요일 밤의 저녁 메
뉴로 자리잡게 되죠.
뭐 어쩌건 해군은 이렇게 나름대로 각기에 대응하게 됩니다.
그런데 육군은 안그랬던게 탈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해군처럼 다카키의 질소설보다 세균설에 중점을 두던터였죠.
게다가 해군에서 진행된 식단의 개선((양식 + 보리밥)에도 부정적이었죠.
뭐 그래도 청일 전쟁 직전을 기준으로 1일에 백미 6홉(900g), 고기나 생선 150g, 야채
류 150g, 절임류 56g 정도를 주며 이건 이론상 각기가 많이 발생할 식단은 아니었긴 합
니다.
문제는 야전에서 저런 부식류가 항상 정상적으로 보급될리 없었고 날씨등의 이유로 변
질된다든지 하면 그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해져 각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쌀은 잘 안변하지만 고기니 뭐니 이런건 더운 날씨와 오랜 운송 기간동안 변질되기 십
상이었고 덕분에 쌀밥만 줄창 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거죠.
더 나쁜건 이런 육군의 상황에 기름을 뿌린 일이 벌어집니다.
1895년 9월 18일, 해군 군의관이 각기를 근절하는거 힘들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에 대해
'니들이 우리처럼 식사에 신경 안써서 그런거다.' 라는 요지의 비판을 해버립니다.
안그래도 사이나쁜 상황에서 해군 군의관 나부랭이가 이런 짓을 해댔으니 육군이 참으
면 그게 이상한거겠죠.
당장 해군의 각기병 집계가 이상하다느니 근거가 뭐냐는 식의 비판이 돌다 일은 유야무
야 묻힙니다만 러일 전쟁이 터지면서 육군, 한번 더 엿먹습니다.
러일전쟁동안 해군은 87명의 각기병 환자가 발생한데 비해 육군은 전 병과별로 1%이상
의 인원이 각기에 걸리고 심하면 죽어갔거든요.
이렇게되자 육군도 상황을 인식하게 되고 해군의 변화를 따라가게 됩니다.
보리를 혼합했고 이미 대세가 된 일본화된 양식 식단을 도입하게 된거죠.
그후, 비타민의 존재가 알려지고 군에서 각기에 대응하는 노력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
가던 1930년대에 보리외에 현미가 추천됩니다.
그러나 이 현미는 보관이 어려워 선호되지는 못합니다.
반합
일본군은 처음에는 양철따위로 만든 단순한 그릇을 사용합니다.
청일전쟁당시 사용된 것은 길다란 도시락통 모양이었고 옻칠이나 법랑같은 것으로 칠해
져 불에 직접 올려서 조리하기에는 무리인 형태였다 하죠.
주먹밥이나 뜨거운 물에 불려먹는 건반같은게 지급되던 때니 취사보다는 그저 식기로의
역활에 중점을 둔 셈이고 서양식에 가까운 것이었죠.
그러나 이런 식사는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전장 부근에서 밥을 해서 추진한
다는 것도 불만을 없에는게 무리인데다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건지 취사가능 이란 단서
를 달게 되죠.
상황이 허락되면 보급된 쌀가지고 밥해먹으라는 거였죠.
이에 따라 조리가능한 형태의 반합이 필요해졌고 1897년경에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면
서 한쪽면이 오목하게 들어간 마치 콩팥같은 단면을 가진 물건이 나오게 됩니다.
일본 독자 모델은 아니고 독일군이 쓰던걸 참고한거죠.
참고로 이 독일군 반합도 스위스에서 나온 형태라고도 하며 일본에 온 독일군 무관이
전파했다는 것에서 일본쪽에서 독일군걸 보고 그 기능성에 주목, 채택했다고도 합니다.
어쩌건 이 때 나온 반합에는 일본군 나름의 개선을 하게 됩니다.
1. 독일식 반합에 있는 손잡이 달린 속뚜껑에서 손잡이를 없엡니다. (이 속뚜껑을 일본
군은 궤자掛子라고 불렀다죠.)
2. 반합 용량을 4홉의 쌀로 밥할 수 있게 했고. (1끼에 2홉정도고 4홉임녀 2끼분인 셈
입니다.)
3. 흔히 반찬 그릇 역활을 하던 속뚜껑에 쌀을 평평하게 담을 경우 2홉이 들어가게 합
니다.
그러니 계량컵 역활도 하게 한거죠.
단, 이 반합으로 늘상 밥을 해먹은건 아닙니다.
평시 주둔지 및 병영에서는 밥그릇, 국그릇, 3개의 반찬 그릇으로 취사장에서 조리된
식사를 식당에 모여 먹으니 반합 쓸 일은 없는거죠.
전장에서는 상황이 좋다면 대대 단위로 후방에 마련된 야전취사장에서 조리된 식사를
받아와 반합에 받아 먹게 됩니다. (식사는 밥에 반찬일 수도 있지만 주먹밥에 국물 정
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사추진이 어려운 경우에 반합으로 밥을 해먹게 됩니다.
반합으로 밥해먹는건 다시 조단위의 취사와 개별 취사로 구분되는데 조단위는 10명 기
준으로 반은 2인분의 밥을, 반은 2인분의 국과 반찬을 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개별 취사의 경우는 말그대로 병사 혼자서 밥하는건데 반합에 물과 쌀을, 속뚜껑에 국
따위가 될 재료를 담고 한번에 다해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하죠.
뭐 이러다 속뚜껑 내용물이 넘치면 걍 그런갑다 해야겠죠.
연료는 현지에서 나무등을 해서 쓰기도 하지만 고형 연료나 심지어 양초등으로도 취사
한 경우가 있습니다.
단,장교의 경우는 곤로같은걸 쓴 경우도 있다곤 하죠.
한편 시베리아 출병후 반합은 한번 더 변경됩니다.
4홉의 쌀로 밥하려니 하루 3끼 먹으려면 2번해야 하고 이거 귀찮더라, 아예 한번에 3끼
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반합안에 반합 하나를 더 겹친 꼴로 만들어 버립니다.
덕분에 8홉 분량의 쌀로 밥을 할 수 있게 된거죠.
이런 식으로 변한 92식 반합은 그저 신형 반합이나 그 모양 덕분에 이중 반합이라 불립
니다.
드디어 본론.
위의 참 뭔가 파고들면 더 많은 것이 나오지만 저의 게으름으로 대충 무마한 이야기들
을 배경으로 1930년대 이후 일본군의 전투식사는 대충 아래와 같은 골격을 갖추게 됩니
다.
일상적인 1일당 지급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6년 이후 기준으로)
쌀: 660g
보리: 210g
고기: 210g
야채: 600g
절임: 60
간장: 75ml
미소: 75g
소금: 5g
설탕: 20g
차: 3g
전투등을 위한 보존식은 이정도 양이 지급됩니다.
보통 반합속이나 배낭등에 휴대되죠.
쌀: 750g
건빵 혹은 압착구량 1봉(220g)
통조림 1개(내용량 150g, 전체 170g정도) 또는 건조육이나 어포류 60g
건조야체:120g
말린 우메보시나 반찬류: 30g
분말간장: 30g
분말미소: 30g
소금: 5g
설탕: 20g
차: 20g
몇가지 휴대 혹은 비상식에 가까운 것들.
압착구량(壓搾口糧)
건반을 좀 현대화한 형태랄까요.
爆彈アラレ 라는 별명으로 불린 팽창 현미에 반찬으로 건조 가다랑어포와 건조 매실
장아찌, 설탕따위를 통조림이나 봉지등에 담은 겁니다.
뜨거운 물 부어서 적당히 불려먹으면 좋다라는 식이고 맛은 그리 인기있을 것같진 않지
만 소련과 만주 부근에서는 물부어두고 잡고 있으면 따뜻했더라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진짜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뜨거운 상태에서 여차하면 적에게 던져서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사용법도 있었다나요.)
군량정(軍糧精)
분유, 효모, 포도당을 혼합, 압착하여 정제형태로 만든 겁니다.
휴대분말미소
건조 미소시루에 건미역, 조미료를 봉투에 넣은 것으로 물에 타면 국이 됩니다만 당연
히 인기없습니다.
저 동네라고 똥국이 인기있을리 없죠.
휴대미장(味醬)
미소, 간장 , 조미료를 혼합하고 열선에 분무하여 건조시킨 것으로 곧잘 야전용 조미료
로 활용됩니다.
쌀에 이거 넣고 물부어 죽을 끓여먹거나 한 경우가 있다 하죠.
휴대스프
분유, 전분, 콩가루, 고기등을 혼합, 건조한 겁니다.
물부어서 먹는 식이죠.
휴대감주
분말 단술에 당, 엿등을 혼합한 것으로 물에 타서 먹습니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하죠.
간이휴대부식(簡易携帶副食)
후리가케(ふりかけ)입니다.
작게 자른 말린 해산물, 조미료등을 혼합, 밥위에 뿌려먹는 바로 그 물건이죠.
열량식(熱量食) 제일선(第一線)
분유, 물엿, 포도당에 멘톨등을 혼합한 카라멜 비슷한 비상식입니다.
일단 특색이라면 각기병 문제로 보리 혼식이 이뤄졌고 나름대로 양분의 보충을 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또한 적어도 군대 급식이 규정대로 지급됐다면 일반 사회에서 먹는 것에 꿀릴 것없이
좋은 편이었죠.
미군의 평가에 따르면 일본군의 평시 병영 지급식은 일일 2800이상 3500칼로리 정도를
먹은 것으로 봅니다. (당시 미군은 하루 4 ~ 5천갈로리대)
그러다 작전 나가면 3700에서 4000정도로 늘어났다고 봤다하죠.
이정도면 저 당시 일본의 평균적인 식단보다 높은 축에 속합니다.
위의 휴대되는 식료는 상황에 따라 변경되기도 합니다.
건빵같은게 빠지고 쌀이 870g까지 증가될 수 있습니다.
밥은 보통 3:1의 보리 혼식이었는데 병사들은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답니다.
개중에는 보리를 적당히 없에고 쌀의 양을 늘려서 밥을 해먹었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런 비교적 일반적인 밥외에 이거저거 넣은 밥도 자주 먹었는데 특별한 날에는 팥밥이
나왔고 고기와 무우부터 이런저런 야채등을 넣고 만든 밥들이 나옵니다.
중국쪽에서는 볶음밥이 나왔다라는 이야기도 있죠.
한편 밥 통조림도 존재했고 여기에는 쌀밥외에 팥밥이나 고기와 야채등을 넣어만든 고
메반 따위가 존재했답니다.
단, 이 밥통조림의 경우 육군보다는 해군쪽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배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고 냉장고도 냉장고지만 통조림으로 처리하면 속편하다라는 소
리를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국의 경우 흔히 알듯이 미소시루지만 이거 아침과 그외의 경우가 좀 다릅니다.
보통 아침에는 시금치같은게 약간 들어간 맑은 국이 나오고 점심이나 저녁때는 고기,
두부, 감자와 같은 건더기가 많은 국이 지급됩니다.
요기까지 보시면 아마 한가지 일본군 보급품중 꽤 중요하게 취급된게 간장과 미소란게
감이 잡히실 겁니다.
실제로 취사장 인근이나 치중대에 간장과 미소통들이 굴러다니는건 흔한 풍경이었고 이
둘 모두가 분말화되어 지급됩니다.
개중에는 분말 된장국같은 놈도 있었지만 이건 인기가 거의 꽝이었다 하죠.
캐첩같은게 나온 경우도 있습니다.
이중 캐첩은 특히 해군에서 곧잘 써먹히는데 잠수함등에서는 분말건조한 덩어리 상태의
것이 나와 밥에 비벼벅는다거나 했다하죠. (잠수함의 경우 다른 동네에서 수상함보다
더많은 식료를 준 것에 비해 일본해군은 수상함보다 적은 양을 지급합니다. 운동량이
부족한 곳에서 많은 칼로리가 필요없고 피부병등이 번질 수 있다는 이유로.)
야채의 경우 배추와 무우, 시금치, 양배추, 오이등이 주종을 이루며 다른 반찬의 부재
료나 절임 혹은 무침 형태로도 곧잘 사용됩니다.
특히 양배추의 경우 샐러드 재료로 곧잘 사용되고 해군에서는 이 양배추를 주재로 한
샐러드가 다양하게 사용됐다 하죠.
이외에 건조 야채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건 주로 콩, 감자, 배추나 무우, 당근, 양
파, 버섯, 우엉외에 김이나 다시마등의 해초류도 들어갑니다.
야채 역시도 통조림으로 지급됩니다만 이건 인기가 영 아니올시다 였다하죠.
개중에 고기와 혼합된 놈도 있는데 이건 호오가 갈려 그래도 먹을만하다는 소리도 있었
지만 콩이나 죽순, 시금치로 가면 차라리 안먹는다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없었
답니다.
절임류도 자주 등장합니다.
주로 단무지나 우메보시, 후쿠진즈케(오복채)가 나왔는데 단무지가 단연 인기있었고 후
쿠진즈케의 경우 밥과 같이 혼합되어져 후쿠진즈케반을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보통 밥은 국과 야채로 만든 반찬외에 고기등을 쓴 반찬 1가지를 포함 1식 3찬 혹은 4
찬정도가 지급됩니다.
고기나 생선 반찬은 조림이나 프라이, 돈까스같이 튀긴 것, 볶음 요리가 주였다 하죠.
한편 좀 특별한 것으로 고기와 뼈국물을 사용한 우동이나 카레가 나오기도 하고 저녁시
간대에 식빵과 스튜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중 카레의 경우 육군에서는 해군보다 꺼려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죠.
빵의 경우 각기병 퇴치의 흔적이라면 흔적인데 한번에 200 ~ 300g정도가 고구마잼이니
버터, 미소버터같은 것과 나오기도 했다하죠.
아, 고기의 경우는 야전에서 통조림으로도 지급됩니다.
쇠고기에 야채를 넣거나 혹은 콘비프, 돼지고기와 야채의 혼합이나 연어, 게, 다랑어,
고등어나 정어리, 오징어 간장졸임등의 생선류가 있었죠.
이중 쇠고기 통조림등은 규깡이라 불리며 물물교환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인기를 끌죠.
해군항공대의 경우는 저런 것외에 달걀 통조림이 있었고 이건 비상식처럼 휴대되기도
합니다.
건어물은 주로 가다랑어류가 곧잘 사용됩니다.
그외 캬라멜이나 사탕, 양갱이나 도넛, 과자같은 감미품이 지급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한랭지에서의 경험과 피로회복등에 좋다는 이유, 병사들의 선호등을 이
유로 감미품의 지급에 꽤 열심이었답니다.
야전에서도 가능하다면 120g정도의 사탕이나 캬라멜, 초콜렛등이 지급됐다곤 하니.
여기에는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설탕졸임한 밤이나 귤, 파인애플, 복숭아 통조림이 있었
고 해군은 꽤 인기있던 단팥죽 통조림을 가졌죠.
이런 감미품중에서는 음료도 있었고 특히 사이다가 인기있습니다.
민수용의 라무네와 미츠야 사이다가 있는데 이중 미츠야 사이다는 그리 인기가 있진 않
았지만 공급량이 많아 이래저래 많이 마셨다고 하죠.
술이 지급되기도 하며 일본주 400ml정도나 맥주 1 ~ 2병, 혹은 상황에 따라 노획된 위
스키따위를 먹은 경우도 있다죠.
그런데 이 술, 중일전쟁이후 특히 중국내지에 있던 부대에서 술이 필연적으로 끼여든
각종 사고가 빈발, 병사들은 때려잡아 키운다를 취지로 삼던 대본영을 골치아프게 한
적이 꽤있었답니다.
술을 안주자니 그렇고 주면 사고나고 안주면 알아서 구해마시지.
해군의 경우라면 함에 창고가 있어 그나마 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하며 술에도 좀
관대한 경향이 있었다죠.
담배는 일본내 담배회사에서 판매하던 것들이 군납도 이뤄집니다.
당시 담배는 보통 10개피가 1갑이었고 이거 두갑이 한번에 나오기도 했답니다.
대충 하루에 5개피이상 정도 필 분량이 지급됐다는데 이보다 더 적은 양이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곤 하죠.
이런 식사외에 비타민 A와 D가 주종을 이루는 비타민 정제가 지급되기도하며
남방에서는 말라리아 예방겸해서 누구나 먹기 싫어한 키니네 정체가 나오죠.
해군의 경우 영국에서 이거저거 가져온터라 사관급이 되면 서양식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또 배라는 안정적인 공간 덕분에 육군에 비해 격식에 갖춘 식사를 할 수 있으며
통조림등의 사용도 많은 편이었다죠.
단, 전투상황에서는 제대로된 식사가 불가한터라 대충 아래와 같은 식단이 공급됩니다.
주먹밥, 삶은 베이컨, 우엉이나 다시마 조림, 샐러드등.
항공기 탑승원의 경우는 육군이 주먹밥등을 잘써먹은데 비해 통조림밥이나 각종 통조림
, 볶음밥, 달걀 프라이, 무우등의 조림에 증가식이라고 과일에 홍차나 사이다등의 음
료가 지급되며 비상식 개념이로 육군의 열량식과 비슷한 놈이 지급됩니다.
p.s:
작 < 홉 < 되 < 말 < 섬 은 각각 10배씩 차이가 나고 1되가 1.8리터니 말은 18리터,
홉은 180ml가 되겠죠.
p.s:
오래전 육식을 피한다 라는 덕분에 좀 별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사육하는 소나 말따위를 대놓고 잡아먹지는 않았지만 돈 좀 만지면 약이란 명목으로 쇠
고기등을 먹기도 했고 에도시대, 막부도 매년 된장에 절인 쇠고기를 약이란 명목으로
진상받았다 하죠.
이런 배경에서인지 메이지 시대초에 약고기라는 음식점 광고가 떠돈 거죠.
한편 사냥한 사슴이나 멧돼지등은 목단(보탄)이니 산고래(야마쿠지라)라는 별칭으로 고
기가 아닌척 위장되기도 했다하죠.
또한 토끼를 셀때 지금도 좀 별난 단위로 센다는건 일본어 공부하셨다면 들어보신 것일
겁니다.
조류는 저 육식의 범주에서 한발 멋어나 있던 존재였으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 야마쿠지라가 제일 걸작같네요.
고래는 물짐승이니 어류처럼 인식됐고 먹어서 궂이 탈날건 없던터라 이걸 다시 돌려쳐
저런 별칭을 만들어놨으니 말입니다.
p.s:
신선하면 회, 한물가면 구이, 더가면 탕이란 말이 있죠.
횟집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만 일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날로 먹고 안되면 구워먹고 그래도 안되면 말려 먹는다.
생선은 눈치보이는 육식에 비해 확실히 부담이 덜한 식료였고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었죠.
덕분에 생선 구하기가 어려운 내륙에서 객에게 생선을 그것도 수북하게 대접한다는건
객을 매우 환대한다는 의미였고 만약 샹선회가 나왔다면 칙사대접 받았다는 의미가 될
정도였답니다.
또한 사정상 생선을 올리지 못할 경우 생선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을 눈으로 먹는 생
선처럼 내놨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죠.
음, 그러고보니 뱀잡아 말려 생선포라고 속여 파는 대목이 나오는게 라쇼몽이었던가요?
미야모토 무사시였단가요?
이건 뭐 본지 오래되다보니...
p.s:
전국 시대 이야기입니다만 식료중에는 좀 별난 흔적을 남긴 경우도 있습니다.
토란 줄기를 말려 다다미를 짜고 그걸 성에 깐 누군가의 이야기도 있고 소금에 절이고
말린 토란 줄기나 우엉으로 가마니를 짜 군량을 운반하다 가마니를 반찬으로 먹었다든
지 하는 이야기가 있죠.
이건 어쩌면 양호한 이야기일겁니다.
몇백년 뒤인 태평양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빈랑나무의 속, 고구마 줄기, 바다에서 건진
해초외에 각종 풀까지 먹어댄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대대나 중대 전원의 변이 하루아침에 초록색으로 변했다거나 독초를 잘못 먹었
다느니 야생 담배를 잘못 먹고 드러누웠다든지 하는 희비극이 연출되기도 했다하죠.
전쟁에서 진짜 개새끼는 정신이 물질을 이길 수 있다 라는 소리를 서슴치않고 하는 종
자일겁니다.
야마토 정신이 지아무리 강해도 총을 벨 수는 없는거죠.
p.s:
각기병은 이미 에도 시대때부터 그 증례가 나올 정도였고 이때는 부자병에 속했습니다.
깨끗하게 도정한 백미를 먹던 계층에서 일어났으니.
최근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각기병으로 죽었다라는 주장이 나왔죠.
그러다 메이지 시대 들어서고 백미를 누구나 먹게되면서 각기는 결핵과 함께 2대 질병
이 되버리죠.
그리고 이 각기병, 원인이 밝혀진 이후로도 계속 됩니다.
타이쇼 말기에 연간 2만 5천명이 각기로 죽고 쇼와 시대에는 전쟁 터지면서 1만이상이
죽을 정도였죠.
그러다 1950년대 넘어서며 비타민 함유제등이 대중화되면서 줄어들었다죠.
단, 이거 지금도 언제든지 올 수도 있습니다.
탄수화물 위주로 해서 제대로된 식사 안하시면 풍요속의 빈공이라고 배부르면서 배고픈
상태로 병에 걸릴 수 있으니까요. (농담아니라 비타민이나 필수영양소의 결핍, 잘사는
곳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정크푸드는 정크푸드일 뿐인거죠.)
아, 혹시 아로나민이라고 들어보셨죠?
특정상표 광고해주는 것같아 찝찝하지만 이거 바로 저 각기병 고치기위해 일본에서 만
든 아리나민 - 아직도 시판중입니다 - 를 참고한 겁니다.
p.s:
저 군량정이란 물건과 비슷한게 우리 주변에도 있었죠.
원기소라고 들어보셨나요?
이거 먹어봤다면 나이 좀 되신 분이고 군에서 들었는데 하시면 통신병과와 관련되신 분
일거고 그게 뭔데 하면 네이버 찾아보셔도 됩니다.
이것도 효모에 이거저거 들어간 영양제인제 군량정과 비슷한 성격이죠.
p.s:
처칠 급여는 노획된 영국군 및 연합군의 식료품이었는데 이거 일본군들이 환장하고 덤
벼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영국군등도 후퇴할 때되면 자신들의 보급품을 모조리 폭파하거나 해서 처분해
버린터라 막상 처칠급여를 노리고 점령해도 재미를 못본 경우가 있었다 하죠.
이게 제일 극명하게 보여진게 임팔일겁니다.
처음에 쌀과 분말된장등 거의 20kg넘는 식료를 가지고 출발했으나 이거 떨어지고는 처
칠 급여 찾느라고 눈에 불을 켜게 되죠.
그나마 초기에는 운좋게 얻어걸린 경우가 있었지만 나중에 영국군이 처분하면서 이마저
도 얻어걸리기 힘들었으니.
그 와중에 형형색색의 낙하산으로 투하되던 영국군의 보급 물자를 목숨을 걸고 건졌더
니 못먹는 탄약이더라는 비극적인 이야기도 있죠.
그외 필리핀등지에서 노획된 미군 식료는 '맥아더 공여'라고 불리며 애용됩니다.
이 맥아더 공여와 관련된 뭐한 이야기도 있죠.
필리핀 점령 후, 보급이 잘되지 않던 일선의 육군 부대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데 처음보
다 영양 상태가 좋아진 곳이 많았다고 하죠.
이유는 바로 저 맥아더 공여 덕분에.
이 때문인지 전쟁 내내, 미군의 식료들도 일본군에게 인기를 끕니다.
특히 미국하면 나오는 그 콘비프가 인기가 좋아서 쇠고기 통조림(규깡)보다 인기가 높
았다 하죠.
허기야 노획이라도 해먹으면 다행이죠.
나중에는 미군 쓰레기를 뒤져 배를 채운 일본군 패잔병까지 나왔으니.
아, 처칠 급여가 제대로 털린 사례가 하나 더 있죠.
바로 싱가폴과 말레이.
저 때 일본군들 식료품부터 심지어 각종 연료나 장비까지 제대로 챙겨 영국제 연료에
영국제 폭탄, 영국제 식사를 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작전을 했다든지 이 때 노획된 술들
이 1945년 전함 야마토가 덴잇코 작전한답시고 마지막 주연때 꺼내져 돌려졌는데다 만
약 야마토가 침몰하면 주변에는 술취한 고기들이 떠오를 것이다란 농담이 나올 정도였
죠.
p.s:
우엉을 줬다가 나무 뿌리 준 걸로 오인되고 김을 줬더니 종이 줬다고 오인되어 나중에
곤욕을 치뤘다는 이야기가 있죠.
반대로 치즈보고 날이 더우니 비누까지 상했다라고 버린 병사의 이야기가 일본쪽에서
있죠.
p.s:
술하니.
뱃사람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다고 일본 해군에서도 술에 관련된 전설이 있었죠.
유명함에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술 때문에 진급못한 만년 수병이 존재한다는...
p.s:
현재 자위대에서도 건빵이 남아있습니다만 그리 인기있는건 아니라 하죠.
지금은 아마 1끼당 150g정도고 다른 통조림류와 같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인기없는건 비스킷으로 통칭되는 큰 건빵이라 하죠.
크기가 우리나라에서 파는 빠다코코넛 비스킷보다 약간 큰 그런 물건인데 재해용 비상
및 구호식등에도 포함되어져 있고 자위대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이건 좀 하는 분위기
라죠.
p.s:
이건 미군쪽의 이야기긴 합니다만 전투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휴대한 것에 대해 보여줄
겁니다.
전투에 임한 일본군 병사들은 흔히 쌀과 비스킷(건빵) 주머니와 가능하다면 고기 통조
림을 휴대한다.
이런 전투식량은 크게 2가지 형식이 있는데 첫번째는 누런색 포장지로 포장되며 3과 3/
4 * 3과 1/2 * 1과 3/4 인치의 크기이며 무게는 9온스 정도이다.
각 포장은 1끼분의 일본식 식사이며 몇개의 다각형 덩어리로 구성된다.
내용물은 압축된 밀(쌀인듯)과 보리, 4덩어리의 설탕, 3개의 갈색 건어물, 1개 또는 몇
개의 분홍색에 매우 짠 매실이다.
설탕과 곡물류는 질이 좋고 그냥 먹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 먹을 수 있다.
두번째 형식은 투명한 봉지(셀로탄인듯)를 양쪽으로 묶은 형태이다.
그 속에 2개의 종이 봉지가 들어있는데 하나는 압축된 생선과 야채가 들어있고 다른 쪽
은 곱게 간 쌀가루가 들어있다.
일본군은 이둘을 물로 반죽하여 먹는다.
미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비상시에 먹을 수 있다. (뭐 배고프면 뭐든 먹게 마련
이죠.)
그외 몇종의 항공용 비상식이 존재하며 일본해군 항공대의 것을 예로 든다면 압축한 말
린 가다랑어, 비스킷, 매실절임, 콩, 사탕, 캬라멜이 들어있고 위스키와 초콜렛이 들어
있다.
다른 것으로 밥, 삶은 달걀, 고기 통조림, 파인애플 통조림, 사이다, 초콜렛과 위스키
가 들어있다.
p.s:
이걸 옮기신 분에게 경의를 표하며 매우 실례지만 붙여넣겠습니다.
혹, 이 글을 보시고 언질 주시면 해당 부분을 제외토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츠지 마사노부 - 예, 바로 그 츠지입니다 - 까지 자신의 전후 책에다 적어놨던
것이고 고미카와 쥰페이(五味川純平)가 1980년초던가에 낸 '과달카날'에서도 나온거죠.
(시간나시면 고미카와의 인간의 조건이나 전쟁과 인간을 읽어보셔도 좋을 겁니다. 읽어
서 손해볼 책은 아니니.)
원본은 124연대 기수 오비 야쓰오((小尾靖夫) 소위의 진중일지에서 나온 거라죠.
11월 22일
군령에 의해 연대는 세 번째로 오스텐산을 사수토록 되었다.
운명의 산 오스텐산이여.
나머지 병력 450명이 서로 어깨를 부둥켜 안고 진지로 돌아 왔다.
11월 23일
미군 주력은 해안방면에서도 총반격을 개시한 모양이다.
포탄이 쉴새없이 날아든다.
글자 그대로 북을 두드리는 것 같다.
그들은 이 산을 눈 위의 혹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마어마한 철량이다.
제 1선 진지는 정글과 함께 발가숭이가 되다시피 파괴되어 버렸다.
황혼을 기다려 제 2선 진지로 후퇴했다.
드디어 마지막이 다가오는가 보다.
최후의 묘지로 기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신체의 쇠약. 형언할 수가 없다.
11월 24일
요즘 아침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아사자는 대개 한밤중의 어둠 속에서 승천하는 것이다.
어둠의 신비가 사람의 영혼을 가져가 버리는 것일까?
11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포탄이 날아들었지만 20분 정도로 그쳤다.
양지쪽에 앉아 언제나처럼 이잡이를 했다.
이제는 산에서도 도마뱀이 보이지 않는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그놈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이놈은 일등식료품 이나 특효약이다.
통째로 집어 삼키면 이상하리만큼 힘이 솟는다.
위주머니가 벌써 꼬륵꼬륵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최후의 힘을 기울려 내리치려 했을 때, 도마뱀을 홱 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검도 2단의 솜씨지만 이젠 도마뱀조차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그 부근을 찾아 보았으나 도마뱀은 눈에 띄지 않는다.
위주머니만 꼬륵꼬륵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나 도마뱀의 목숨도 며칠동안 밖에 지탱할 수 없으리라.
진지에는 이미 네놈밖에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11월 26일
오늘도 또 풀을 뜯으러 가야겠다.
그것만이 우리의 목숨을 연장시켜 줄 유일한 양식이다.
이미 보통 인간의 대변같은 것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주일에 한번 정도 염소똥같은 것이 나올 뿐이다.
이것으로 비료도 되지 않으리라.
오늘은 저 아래 샘터의 맞은 편 언덕에 가보기로 하자.
그러나 그곳에 가자면 포탄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약간 오른쪽이라면 안전할 테지만 우리들이 이런 위험한 곳에 온 것은 이미 이곳 밖엔
풀과 나무가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 3개월에 걸친 농성이다.
샘터는 고작 50m가량의 거리이고 그 맞은 편 언덕이라야 200m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몸에겐 10리 이상의 먼 길, 험한 길로 여겨진다.
쾅!쾅!
또 포격이다.
바로 저쪽 언덕바지의 나무가 뿌리채 뒤집혀진다.
포격이 그칠 때까지 잠시 큰 나무 아래에 드러누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빈랑나무 하나라도 잘라가지고 돌아와야겠다.
꽤 가까운 거리에 포탄이 떨어진다.
그러나 여기는 미군 포병의 사각이다.
우선은 안심할 수 있다.
갑자기 졸음이 온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다.
포격도 그쳤다. 휘청거리며 맞은 편 언덕을 기어올라갔다.
총검을 허리에 찬 채 뒹굴고 쓰러지면서 한 발자국씩 기어오르는 것이다.
20m가량 앞쪽에 빈랑나무가 10여 그루 솟아있는 것이 보인다.
두치 가량의 대나무같은 마디가 있는 그루였다.
나뭇가지에는 윤기있는 잎사귀가 날개를 펴듯 달려있다.
원래 빈랑나무는 연한 나무지만 쇠약할 대로 쇠약한 내 팔은 그것조차 단숨에 자를 수
없다.
숨을 헐떡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총검을 휘둘렀다.
치고 두들기고 하여 가까스로 한 그루를 잘랐다.
이제부터는 빈랑나무 요리를 만들어야 할 차례다.
잎사귀가 달린 데서부터 두자 정도 아래쪽을 잘라버렸다.
나머지 그루를 한장씩 겉껍질을 벗기고 나자 안에서부터 흰 속살이 드러났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보드라운 것이다.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산채 요리다.
12월 27일
오늘 아침에도 또 몇 명이 승천했다.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시체에 파리가 달라붙어있다.
우리들은 이미 인체의 한계점에 도달한 모양이다.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해골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머리털은 갓난아기의 그것처럼 듬성
듬성 보드랍게 남아있다.
검은 머리가 어느새 이렇게 변한 것인가?
체내에는 이미 머리털조차 키울만한 양분이 없어진 것일까?
머리털이 쑥밭을 이루고 운운하는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나지만 이런 체력으로는 그것
도 불가능한 모양이다.
야윈 형의 인간이 뼈만 남아 있을 정도 바짝 마르고 뚱뚱한 형의 인간은 푸석푸석 온
몸이 부풀어 올라 온몸이 생두부같다.
이빨이 모두 흔들리는 걸 보면 이틀이 무너지는 모양이다.
이 무렵, 오스텐산에는 이상한 생명판단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계점에 접근하고 있는 육체의 지탱가능일수를 통계결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비과학적인 이 생명판단학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의 수명은 30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인간은 3주일.
누운 채 일어설 수 없는 인간은 1주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인간은 3일.
말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은 2일.
눈을 깜박이지 못하는 인간은 1일. (원본은 내일)
아아, 인생 50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제 22세로 끝장이 나려는가?
지금이 인생의 꽃이며 꿈많은 홍안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생의 추악한 면과 사회의 이면도 모른채 나는 아직 순결을 더럽히지도 않았다.
나에겐 앙양한 앞길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오직 아사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2월 31일
쇼와 17년(1942년)은 간다.
가버리는 이 해와 함께 오늘밤에 사라져 갈 목숨도 많으리라.
인간세상에선 연말국수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딴 세상의 이야기.
요즘 오스텐산의 인종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언어란 체력을 크게 소모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원래는 아우스텐산이지만 Austen이라 오스텐이라 수정합니다.
* 저 일기 처음의 450명은 나중에 구출당시 50명 안되는 숫자만이 살아남습니다.
오비 소위는 살아남고 대위로 종전을 맞아 후일 자신의 경험을 수기로 펴내죠.
* 빈랑 나무는 저 지역 원주민등에서는 열매를 씹기위해 곧잘 키웁니다. (아마 동남아
여행가신 분들은 이거 씹는거 보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군들은 전쟁중 식료 부족시 이걸 잘라다 속을 내먹곤 했는데 이 때문에 원주민들
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