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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길모퉁이 파출소 앞 행복 정육점
게시물ID : humorbest_5262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22
조회수 : 7169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9/11 22:31:10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9/10 23:58:30




선분홍 조명빛, 각종 돼지, 소, 닭의 부위별 상품들이 진열된 투명한 냉장고에서 스산한 냉풍이 느껴진다.
뻘건 조명, 뻘건 고기들 심지어 선반위 심심풀이로 설치해 놓은 15인치 작은 TV마저도 뻘것다.
새하얀 점원들의 유니폼은 언뜻 정육점의 분위기와 상반되며 깔끔하게 보일지 몰랐으나 이마저도
조명빛에 가렸을 뿐, 자세히 볼때면 핏물을 닦아낸 흔적들로 얼룩저 울긋불긋 손가락 모양의 뻘건 꽃잎이라도
달라붙은 것 마냥 보였다.

"아~ 이거 소고기 마블링 이쁘게 잘떴네~?"

"그럼요. 스테이크용으로 좋을 겁니다."

아직 신혼으로 보이는 여성, 앞머리가 앞으로 쏟아지는지 검지와 엄지를 모아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정한체 진열용 냉장고를 유심히 바라보고있다. 한손에는 손바닥 만한 지갑과 그위로 포게진 작은 메모장이
아무래도 저녁찬거리를 적어둔 것 처럼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신혼의 주부들이 우리 정육점을 찾는 것에 깊은 즐거움을 느낀다.

고기맛, 혹은 진짜 상등품의 고기가 무엇인지 아는 주부들이 늘어난다. 대형마트에서 저렴하게 판매되는
개차판 같은 고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기의 질에서도 우리 정육점은 일대에서 손을 꼽는 상등품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고기의 관리와 운반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의 칼손질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공장에서 손질된 고기를 받아오는 방식이 아닌 살아있는 가축들을 직접 받아와 손질을 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우리는
남다른 고기맛과 육질 덕에 다른 대형상가에 종속되지 않은체 단일 정육점으로 거리에서 장사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고객들은 그 차이를 점점 알아 차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확연히 느껴지는 정육사의 실력의 차이.

젊은 주부는 손가락을 입술에 기댄체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고민을 하는냥 골똘히 냉장고를 들여다 봤다.
왜 그런 그녀가 기특해보였을까? 나도 모를 흐뭇함에 가만히 웃음 지으며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젋은 주부가 결정을 지은듯 은근한 미소를 띄며 내게 말을 붙이려는데 정문으로부터 키작고 왜소한
아저씨가 한명 들어섰다. 벗겨진 머리와 볼록한 뱃살이 가늠짐작으로도 대충 오십대 중반이상은 되는 듯 했다.

주부는 스테이크용 한우 750g을 포장한체 돌아갔다.

주부가 자리를 떠나고 은은한 샴푸향과 비릿한 고기향만이 감도는데 오래전부터
들어선 중년의 남성은 손수건으로 얼굴만 훔치며 좀처럼 고기를 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주황색의 때타고 얇상한 가을점퍼와 흑갈색의 티셔츠를 배꼽까지 올려입은 면바지 안으로 넣어 입은 아저씨.
직업을 가늠하기 애매한 지저분한 운동화에 검고 붉은 때가 잔뜩 서려있었다.

아저씨는 헛기침을 "험험"하며 요란히 뱉더니 카운터 한폭판에 철제 서류가방을 얹으며 내게 속삭였다.

"댁이 사장되쇼?"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려 안는 중년의 아저씨.
나는 몸을 수그리며 아저씨의와 눈높이를 얼추맞춰 대답했다.

"네. 제가 사장인데요."

나의 대답을 들은 아저씨는 점점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마치 결심이라도 선듯 내게 물었다.

"여기, 사장님이 고기손질이 그렇게 대단하시다면서?"

칼질이 좋다는 평가를 어디에서 전해 듣게 되었든, 손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말로 대답하지 않고 기분좋은 미소만 머금었다.

"내가 사장선생한테 부탁이 있는데요."

"어떤 부탁이요?"

"그, 손질을 좀 부탁할게 있어서."

"어디서 불법포획하신 것 아니신가요?"

"아! 아니~ 아니, 그런것은 아니라."

야생 고라니, 사슴등을 불법포획하고 그것을 식용으로 조리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짐승이란 본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새삼 손질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없었다만
정육사 자격증을 취소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은 당연히 삼가하는 것이 좋았다.

나는 탐탁치 않은 얼굴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냥은 안되는거 잘 잘죠.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전에..."

중년의 아저씨는 서류가방을 돌려 손잡이를 더듬거렸다.
얼마 안있어 서류가방이 딸각하는 소리를 내며 내 앞에 입을 벌렸다.

"그냥, 그냥 와서 봐주시는 거. 그것만해주시면 일단 이거 한다발 드릴게요. 한다발,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한다발."

한다발? 서류가방에는 오만원권 현금 묶음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한다발이라는 것은 오백만원, 잠깐 물건만 봐주는데 터무니 없이 높은 금액이었다.

내가 깨림직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찌푸리자, 아저씨는 한다발을 더 꺼내들며 카운터에 얹어 놓았다.

"두다발."



오만원권 돈뭉치를 서류가방 가득담고 다니는 아저씨치고 자가용조차 한대 없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상적은 것이 너무 많았지만 잠깐 칼손질할 물건 좀 봐주고 천만원.

나는 천만원의 현금을 정육점 도마 밑 서랍장에 감춰둔체
여섯시 칼같이 정육점 셔터를 내리고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십오분 아저씨는 택시를 빌라 촌 앞에 세웠다. 근 일이십년은 지난 건물들인듯
적벽돌 미장마감에 허연색 페인트로 101, 102하며 동수를 세겨 넣은게 대충 둘러봐도 집값이
상당히 저렴한 동네처럼 보였다.

"이쪽이네."

아저씨의 급한 걸음을 쫒아 십여분을 더 걷자 동네 언덕배기 조금 못간 곳에 3층형식의 연립주택이 보였다.
아저씨는 말없이 몸을 빙글돌려 나를 처다본 후 연립주택 안으로 발걸을을 옮겨나갔다.

주위의 분위기가 마치 살인이 나도 찍소리한번 안들릴 곳 처럼 음산했다.

아저씨가 무거운 철문에 열쇠를 걸고 돌리자 녹이슨듯 끼긱하며 기분나쁜 소리가 들렸다.
현관에 대충 신발을 팽게치듯 벗은 아저씨는 "후~" 하는 한숨과 함께 웃옷을 대충 바닥에 널부러 트렸다.

거실부터 느껴지는 깔끔한 분위기, 의외로 정돈이 잘되어있는 집안의 행색에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아저씨 물건은 어디에 있나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나를 두어번 흘깃거리더니 손짓을 하며 주방으로 불렀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시큼한 김치냄새와 약간 시간이 지난 듯한 반찬들 냄새가 은근하게 밀려왔다.

"흠, 흠!... 여기."

아저씨가 주방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머뭇거리듯 몸을 움찔거렸다.
아저씨의 마음의 동요가 전달되는 듯 나 스스로도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말없이 아저씨가 문을 열기만 기다렸다.



스륵, "?!"


아저씨가 문을 연 냉장고 안에는 아직 열여덟, 열아홉 쯤으로 밖에 안보이는 소녀가 눈을 감은체 담겨있었다.
내가 놀란것이 당연스럽다는 듯 아저씨는 내게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아저씨는 잠깐 나를 지켜보다 다시 냉장고
속의 소녀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내 딸이요."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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