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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대칭전(게릴라)에서 정규군이 헤매게 될까?(2/2)(스압)
게시물ID : military_21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스터크
추천 : 3
조회수 : 9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06 01:10:04

 아래 글은 박용수님이 번역하신 논문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의 러시아 : 군사전략 문화와 비대칭 분쟁에서의 파라독스' 를 퍼온것입니다.
 
체첸에서의 러시아군의 모습을 분석한 글이며 최근 세계 여러곳에서 진행중인 내전(정규군 VS 혁명군)의 양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여
 
퍼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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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파라독스 (The Paradox of Will)
 
 약 2천년 전, 로마 군단의 전문적이고, 봉급을 받으며, 연금이 지급되는 전문직업 마인드의 시민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종족이나 종교를 위해 기꺼히 죽고자 하는 전사들과 싸워야 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이들의 상급자들은 전투 사상자에 민감했으며, 이는 훈련된 병력의 가치는 매우 비쌌고 시민 인력의 충당도 대단히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장을 통해서 "제국 세력"과 비제국세력 또는 "야만인" 세력들간의 분쟁에 있어서의 심오한 불균형을 읽을 수가 있다. 핵심 강대국의 경우 중요하지 않은 전쟁(peripheral war)을 통하여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감내할 수도, 감내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반면 약자측의 국가적 참을성 내지는 의지, 고통에 대한 감내의 정도는 종종 대가가 엄청난 수준이 되더라도 감내할 정도가 되곤 한다 - 비록 그것이 "대규모의 잘 훈련된 보병들의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 이는 종종 약한 세력이 강대국을 상대로 성공하게 하는 원인이 되곤 한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Teutoburg Forest;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전멸당한 전투)에서부터, 장정(Long March;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벌인 전략적 행군, 공산군 승리의 한 전환점이 됨), 디엔비엔푸 포위전(Dien Bien Phu; 베트남군이 승리한 프랑스-베트남 전쟁 당시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유형전력 - 무기, 기술, 조직 - 측면에서 명백히 열세한 측이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쟁취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손자와 모택동에 대한 한 전문가는 왜 "의지(will)"가 중요한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게릴라전은 복잡한 기계 장비의 효율적인 운영이나, 잘 조직된 군수 시스템, 또는 전자장비의 우수성에 의하여 그 성패가 좌우되지 않는다. 이 전쟁의 기본 요소는 사람에 있다. 사람은 이러한 기계들 무엇보다도 복잡하다. 사람에게는 지모, 감정 그리고 의지가 있다.

 

 모든 비대칭 분쟁에서는 동일한 의지의 모순(contradiction of will)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한 베트남전 영화에서 나온 이 대사야말로 이러한 불균형에 대하여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리라: "어떻게 당신은 활과 화살로 헬리콥터에 대항코자 하는 적을 이길 것인가?" 또한 소말리아에서는 적들이 헬리콥터에 대항하여 새총(slingshot)을 발사하였으며, 전투 중에 여자들과 아이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였다. 베트남에서의 적 전술은 "자신들의 피해에는 아랑곳 않고 미국인들에 대해 사상자를 내겠다는 의도로" 되어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전에 대한 한 랜드 연구소 분석(RAND analysis)에 따르면, 적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사상자도 감내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피해를 결정적인 피해로 보거나 평화를 청하는 이유로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세한 재래식 군사력이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경우에는 승리를 방해하기도 한다. 약한 측은 외부 강대국의 군사력을 격파할 기술적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과 같은 무한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반드시 대도시에 대한 정치적 효과를 골몰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패배를 면하기 위하여 "폭도들은 반드시 최소한의 생존성을 갖춰야 하며" 승리를 위하여 강자에게 지속적인 비용 지출을 강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략적 시각에서 보면, 반란군의 목표는 강대국으로 하여금 분쟁을 확대시키도록 자극 하는 데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하여 외부 세력이 지출하게 되는 정치적, 경제적 비용 - 병력 사상자 및 장비 파괴 등의 비용 -이 증가하게 되며, 해당 강대국의 안보가 직접적으로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비용이 너무 높게 느껴지게 된다.

 

 인명 피해와 장비 피해의 직접적인 비용은 이들이 강대국 시민사회에 심리적, 정치적 불안정을 증폭시키는 간접적인 결과를 낼 때만이 비로소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된다. 국가의 핵심 이익에 별다른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 적에 대한 전쟁에 전투 손실과 경제적 비용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강대국 내에서는 비판론 우위를 점하게 된다: "제한전쟁에서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계층이 이러한 희생이 왜 필요한지에 대하여 잘 납득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국가의 생존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징집병에게나 직업군인에게나 죽음을 감수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사항은 대반란전에서나 평화 작전(peace operation)에서 모두 적용되는 사실로서, 모두 강대국들이 현대 군사력을 저개발 지역에 투사하는 경우이다.

 


아프가니스탄

 

 브레즈네프가 설정한 개입의 상한선은 당시로서는 다소 낮은 것이었으나, 고르바초프 입장에서는 너무 높은 것이었다. 소련의 여론은 더욱 더 시끄러워졌다; 게다가 서방 측에 대한 "매력 공세(charm offensive)" 측면에서 이 전쟁은 점차 반대할 이유가 많아졌다.

 

 의지의 파라독스는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뚜렷한데, 이는 최초 소련의 직접 개입 당시에서부터 브레즈네프 행정부가 소련군의 개입을 일정 수준 이하로 한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클라우제비츠식 사고 방식의 소련 안보 기구들이 아프간 촌락과 수확물을 파괴하는 것이 게릴라들의 저항수단을 제거함으로써 저항의지를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하였다. 소련인들이 아프간인들을 폭격함으로써 "석기 시대"로 보내는 데에 성공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아프간인들은 원래 석기시대에 있었던 것이다. 수없이 많은 폭탄들과 수십만명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적의 의지는 완강했으며, 반면 소련인들이 전쟁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려는 의지는 제한되어 있었다. 무자헤딘에게는 소련 군사력이 전쟁을 일으킬 능력을 파괴할 군사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쟁의 비용을 증가시키고 모스크바가 계속 전쟁을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갉아먹는 방향으로 집중하였다. 모택동은 이를 "적의 단결력(unity)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맥(Mack)의 경우에는 보다 명료하게:"만약 외부 세력의 분쟁 지속 의지가 무너지면, 그 세력의 군사적 능력은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라고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내부적 측면의 분쟁 차원이 지하드, 즉 침공하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으로 변환되었다. 이슬람주의와 애국주의가 서로 짬뽕이 되었으며, 보다 세속적인 부족관점에서였던 것들이 소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성전으로 변화하였다. 게다가 소련의 침공으로 인하여, 보다 현대적이었던 아프간 정부에 기존까지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침공 이후 아프간 군대의 수천명의 장병들이 무자헤딘으로 전향하였고 병사들의 탈영으로 버려진 수백개의 정부군 초소들이 폭도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1980년 봄에 마수드(Massoud)가 판시르 계곡(Panjshir Valley) 전역을 석권하게 된 것을 들 수 있는데, 소련 침공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군대는 단지 계곡 윗쪽의 대단히 좁은 지역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소련측은 전쟁에 따른 인명 손실에 대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처음부터 전쟁에서의 역할을 한정하려고 하였다. 소련은 전장에서의 즉각적인 승리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도 장기적인 전략으로 무자헤딘의 역량을 갉아먹고 분할시키고자 하였다. 이 전략은 3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소모전 및 보복전을 펼친다; 국경선을 차단하여 보급로를 막으며, 폭격과 테러리스트 작전을 통하여 파키스탄에 직접적인 압력을 넣는다; 저항운동을 돌파한다(penetrating the resistance movement). 또한 소련은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실패를 교훈삼아 전쟁을 국지전으로 제한하고 저강도 분쟁으로 유지하여 확전되거나 주변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일명 "베트남 신드롬"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길 바랬다. 또한 소비에트 연방은 자국의 최상의 부대들을 아프가니스탄에 장기간 투입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소련 제국의 유지는 그의 위성국들에 강력하고 영속적인 군사력을 배치해 두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데 대하여 꺼렸던 탓에 모든 측면에서 소련은 군사적으로 조심스럽고도 보수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소련은 아프간에서 10년간이나 전쟁을 벌이면서도,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 전문부대나 대반란전 교리를 만들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아프간 전쟁을 저강도로 유지하기 위해서, 소련은 인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 비용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소련은 병력 한도를 115000명으로 설정하였으며, 파키스탄의 해방구(sanctuary)까지 적들을 추적하지도 않았고, 사상자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자 하였으며, 외교적 고립은 피하고자 하였고, 소련군의 직접 개입을 줄이기 위하여 카불 정권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수준 뿐의 개입을 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 조차도 장기적으로는 가능하지가 않았다. 비록 1985년에 소련의 아프간 전쟁 비용은 실제로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새로운 정책들은 이러한 수준의 개입을 감내할 수가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Glasnost) 정책에 따라 소련 여론이 더욱 더 시끄러워짐에 따라, 동일한 비용임에도 불구하고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은 훨씬 낮아졌다; 서방에 대한 "매력공세(charm offensive)" 측면에서도 전쟁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쿠바나 베트남과 같은 비효율적인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하여 점점 더 난색을 표하게 되었다.

 

 결국 "크렘린 지도부는 승리를 위해 필요한 병력 수를 알 수 없고 이러한 병력 증가가 몰고올 정치적, 경제적 비용이 너무 높았다는 점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 바라지 않았다." 그 결과 소련은 폭격과 공군력에 크게 의존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선택 - 이는 무자헤딘들이 쉽게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는 방법인 동시에 그 자체로 저항을 제압할 수도 없는 방책이다 -을 하게 된다. 무자헤딘들이 계속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생존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자 하며 주변국들이 해방구와 외부지원을 제공하는 한 최종 결과는 비기기(stalemate)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체첸

 

 체첸인들은 전투에서 실제로 러시아군을 격파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적의 싸울 의지를 파괴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많은 관찰자들과 러시아 정부에서 체첸인들의 저항의지를 과소평가하게 된 주 이유를 들자면, 두다예프 정권이 너무 엉망인 것처럼 보였고, 휘하 병력들 역시 대다수 체첸 주민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놓친 것이라면 "체첸인 사회와 체첸 전통에 지난 200년간의 역사로 인해 단련되고 강화되면서 깊게 깔려있던 힘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러한 특질로 인하여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정체의 형성 역시도 형성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 특질은 체첸인들로 하여금 매우 강력한 저항능력을 부여하게 되었다. 체첸인들이야말로 오늘날 역사의 대단한 전사민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첸인들에 대한 과소평가는 민족지리측면에 대한 일부 식민주의적 접근방식에서는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동일한 측면에서 적의 사회를 원시적이고도 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저개발지역의 적들을 과소평가하는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버릇에 대해서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제 1차 체첸전쟁이 발발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물러나고 겨우 6년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아프간 전쟁을 통해서 비대칭 분쟁에서는 반-원시적인 적군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체첸 전쟁의 시작 당시에서부터, 러시아측은 이를 실행할 의지를 상당부분 결여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로즈니에 입성한 러시아군들에게는 처음부터 전투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장비 및 피복 지급 상태가 불량했고, 작전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평균적인 러시아 병사들과 일부 장교들은 마주친 사람들을 동포 러시아인들이라고 생각하여 별로 싸우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반대로 이 침공이 있기 전에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던 두다예프 정권에 대한 체첸 사람들의 지지는 별로였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침공과 이들이 사용했던 부적합하고 무절제한 무력 사용이 결부되어 체첸인들의 저항운동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엄청난 의지의 비대칭성이 그 결과 발생하게 되었다: 체첸인들의 전술과 전기는 이곳에서 싸워야 할 뚜렷한 의지나 이유가 결여되어 있었던 러시아인들에게 대규모 인명피해를 안겨주었으며, 반면 러시아인들의 과도하고도 무차별적인 무력사용은 민간인들 사이에 대규모 사망자와 파괴를 발생시킴으로써 체첸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지속하게 하는 의지를 불어넣게 되었다.

 

저들의 신은 자유이며, 저들의 법은 전쟁이다.

  - 레르몬토프

 

 일부 체첸인들의 특이한 문화 특징도 체첸인들이 외부 지배에 저항하게 만드는 의지를 갖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adat와 teip라는 2가지 주요한 전통이 있다. adat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보복 시스템으로, "눈에는 눈"이라는 보복 원리에 입각한 불문율이다. teip은 씨족의 독립과 문화, 고유성을 지키기 위하여 각 씨족원들이 맹렬히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다. 그 외의 전통으로 체첸인들은 늙은이에게는 지혜를 구하고 젊은이들은 전사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2가지 특질들이 체첸 사회를 한데 묶었으며, 이들이 외국 저항에 대하여 저항의지를 갖게 되는 점을 설명하게 된다. 이러한 의지는 우세한 전투력과 우세한 기술력을 무찌르는 원동력이 된다. 체첸의 전사 문화를 외에도,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한 체첸인들이 갖고 있던 역사적 증오심을 빼놓을 수가 없는 일이다. 1816년 예르멜로프 장군의 초토화 정책(scorched-earth policy)으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는 수십년에 걸쳐 초토화식(cut-and-burn) 대반란작전과 강제 이주책을 실시하였고, 끝내 1944년에는 스탈린에 의하여 체첸 주민 전원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는 등,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심은 어느 민족도 체첸 민족만큼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일로서, 이미 강한 상태였던 체첸인들 사이의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심을 더 증폭시키게도, 1949년에 소련 정부는 그로즈니에 에르멜로프 장군의 동상을 건립한다. 이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씌여졌는데, "태양 아래 어떤 사람도 이 사람처럼 비열하고 거짓투성이이진 않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체첸에서의 의지의 전쟁을 이기기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 즉 주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자기편으로 하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반란전에 관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체첸에 들어간 러시아군은 민사작전이나 심리전 관련 부대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상대방의 의지와 기술 모두에 있어 고려하지 못했으며, 이런 상태에서 가장 어려운 전투 분야인 시가전에 말려들게 되었다. 반면, 러시아측의 리더십 부족과 정치적 신념의 부재야말로 체첸인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취약점이었다. 처음부터 옐친의 침공 결정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미약했기 때문에, 옐친 행정부와 체첸인들 모두 러시아인들의 의지야말로 중요한 목표물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옐친은 왜곡 정보 - 정부는 아군 사상자와 민간인 사상자의 수, 사용한 무기 종류에 대하여 왜곡하여 발표하였다 - 를 통하여 국민들의 전쟁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러시아인들의 전쟁 지지의사를 바꿔놓기 위하여 2가지 심리적 작전 수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즉 언론매체의 활용과, 러시아 본토에 대한 드라마틱한 습격작전이었다. 체첸 게릴라들은 2곳의 도심지역 - 부됴노브스크(Budyonnvsk)와 페르보마이스코예(Pervomaiskoye) - 에 대한 습격을 실시함으로써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짐과 동시에, 러시아 사람들과 세계 여론 속에 전쟁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군사전략 문화에서의 모순 : 클라우제비츠주의 대 모택동주의 (The Contradiction in Military-Strategic Cultures: Clausewitz versus Mao)

 

 소규모 군대로 광대한 국가와 싸우고 있는 적들은 단지 대도시와 주요 통신선, 그리고 일부 평야들만을 점령할 수 있다. 따라서 적의 치하의 영토 중에는 수비대가 존재하지 않는 광대한 영역이 존재하며 이곳들이야말로 우리 게릴라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모택동

 

 모든 강대국들은 어느 정도 군사 사상에 있어서 동질성을 갖고 있다 - 보불전쟁 당시의 프러시아의 놀라운 승리 이후, 강대국들은 클라우제비츠를 마치 전쟁의 신으로서 간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프러시아식 모델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강대국 군사문화 속에서 독특한 조미니식 특질(Jominian trait) 역시도 존재함을 눈치챌 수 있다 -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정치와 군대는 별개라는 주의이다. 이는 강대국들로 하여금 비대칭 분쟁에서 2가지 문제를 발생케 하였는데: 1) 정치와 군사간의 통합이 불가능하거나 잘 이뤄지지 않게 되었다, 2) "당신이 아는 대로 수행하시오"식 접근이 이뤄지면서 선호되는 패러다임인 중강도 내지는 고강도 재래식 전쟁을 벌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조직에서의 변화가 매우 느리게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더하면, 그 결과는 비대칭 분쟁에서와 같이 재래식 접근이 부적합한 경우에도 군대가 재래식 접근법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아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처럼 이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 사례는 없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은 대게릴라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된 군대가 아니었으며, 단지 유럽 평원에서 재래식 고강도 전쟁을 수행하도록 훈련된 군대였다. 한 저술가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의 전쟁은 교리상으로 중전차부대-기계화부대에 의한 종심 공세작전의 특징을 갖게 되며, 이들이 집단 대형을 이뤄 밀집 방어를 돌파하고 적의 후방으로 신속히 진격하여 적을 포위 섬멸하게 된다."라고 설명하였다. 지상 공세는 항공부대와 장거리포, 미사일, 협조된 공중수송 및 낙하산부대 공격과 기타 전 수준에 걸친 복합 군종 활동에 의하여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소련의 교리는 압도적인 무력의 사용에 의한 결정적이고 신속한 승리를 추구한다 - 이는 열강들이 역사적으로 항상 추구해 왔던 대전쟁 패러다임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저개발, 산악 지역에서의 대게릴라전에서는 이러한 군사구조 및 교리가 명백히 부적절함에도, 초기 7년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이러한 재래식 사고방식이 소련측 접근 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소련 정치 지도층이 소련군에게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시하기는 했지만, 유럽식 대전쟁 패러다임을 선호하는 군사문화를 갖고 있던 소련군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사고방식이나 기술들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산악 지역이나 적들의 특징 모두 게릴라전을 펴는 데에 유리했다. 집결된 대규모 기갑부대를 통해 돌파할 재래식 "전선"이나 "후방지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로 소련군은 비표준적이고 끈질기며 교활한 적을 맞닥뜨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겠다는 목표야말로 신속하게 비현실적이 되어버렸다.

 

 올리비에 로이 역시 소련군이 대전쟁 패러다임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소련군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당시와 동일한 군사전술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던 파블롭스키 장군(General Pavlovsky)이, 아프가니스탄 최초 침공 때에도 지휘했었다는 것이다. 소련군은 1982년 이전까지 매년 2회씩 대규모 기갑 작전을 벌였으며, 여기에는 중앙 유럽에서 나토군과 싸우도록 훈련된 차량화 소총 사단을 사용하고, 보다 가볍고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던 공수부대는 투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2년에는 소련군이 장비와 전술면에서 변화를 주게 되는데, 게릴라들과 상대하기 위하여 점차 300여대의 MI-24 전투헬기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84년에는 SU-25 전폭기를 도입하게 되며, 표준 공세 절차로 먼저 대규모 공습 및 포병 준비사격과 이어 헬리본 부대의 착륙, 이어 기계화부대의 직접 공세가 이어지는 것이 확립되게 된다. 만약 소련인들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인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연구하고 배웠더라면 더 많은 기술- 헬리콥터 기동력과 발달된 폭격기-이 활용이 대전쟁 교리에 빠져있는 군대를 더 성공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과도한 군사력 투사와 무차별적인 파괴는 민심을 잡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 정답이며, 1980년대 중반에 실시한 소련의 초토화식 접근은 적에게 더 쉽게 모병할 수 있는 토양만을 제공하였다. 한 예로 1984년에 실시했던 판시르 7 공세(offensive Panjshir VII)를 살펴보자. 이 작전에서 소련군은 TU-16 폭격기를 이용한 고공 폭격을 실시하고 4월에는 판시르 계곡에 대하여, 6월에는 헤랏(Herat) 인근 지역에 대하여 공세를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 서쪽 20킬로 지점 내에 있는 모든 마을 및 교외지역들을 파괴하였다. 소련군은 마자리 샤리프 시(city of Mazar-I Sharif) 주변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딛쳤으며 1984년 소련군 사상자 수는 2060명 전사라는 역대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예전 패턴과 동일하게도, 판시르 7 작전으로 획득한 목표지점에서 정부군은 금방 퇴각해야 했으며, 그 지역은 다시금 무자헤딘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떤 저술가들은 소련군이 도로와 폭탄, 포병, 로켓, 네이팜, 가스등을 의존한 것을 미군이 베트남에서 실시했던 아텔보로 작전(Operation ATTELBORO)이나 정션 시티 작전(Operation JUNCTION CITY)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두가지 작전 경우 모두 작전간 대규모 파괴행위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결정적인 성과는 얻지 못한 특징이 있다. 사소한 차이점들이 있긴 하지만, 러시아인들도 미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사용한 접근방법 - 일명 대게릴라 "듀헤주의(douhetism; 항공전 이론의 선구자 중 하나인 줄리오 듀헤의 사상. 전략폭격에 의한 적 공업지대, 핵심시설 및 민간지역 파괴로 승리 쟁취 주장.) - 과 동일한 방식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접근했다. 문제는 비대칭 분쟁에서 강대국 군대의 경우 드라이버로 해결하는 것이 적합한 문제를 대형망치로 풀려고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무자헤딘은 재래식 전쟁 기준에서의 적의 형태를 띠어 주지 않았다 - 소련군이 맞닥뜨린 적은 흐릿하고 형태가 없는 모습이라 그에 대하여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다는 개념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게릴라들은 소련이 국제적 비난속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전쟁을 길게 끌면 끌수록 소련의 전투 의지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무자헤딘들은 적을 공격할 시간과 장소를 선택했고, 소련군 기계화부대를 매복에 적합한 곳으로 끌어들였다. 게릴라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웠고, 조건이 유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유령처럼 주변 지형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들은 화포, 대전차무기, 대공무기 등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소련군이 깔아뭉개버릴 축성진지 따위를 애초에 갖고 있지가 않았다. 게다가 전쟁 초기의 소련군이 기계화부대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시기, 소련군은 공세마다 항상 동일한 패턴으로 작전하곤 했다: 목표지점에 대한 항공기, 헬리콥터, 포병에 의한 광범위한 준비사격을 실시한 뒤, 화력지원을 동반한 기계화부대가 산악 골짜기를 따라 나 있는 주도로를 따라 공격해왔다.

 

 이런 식으로 예측 가능한 공세 패턴에 게릴라들은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공습이 시작되면 무자헤딘들은 그냥 그 지역을 떠났다가 소련군이 본부로 돌아가면 다시 그 지역으로 돌아갔다. 한편 매번 이런 공세를 겪게 된 뒤에는 게릴라들이 소련군들의 접근 및 퇴각로에 대하여 잘 알게 되므로, 이동하는 소련군들을 매복하여 공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소련군의 준비상태도 무자헤딘의 저항에 대비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준비된 진지에서 증집되어 기다리고 있는 재래식 적군이 아닌, 이곳 저곳 치고 빠지는 방식의 골치아프고 완강한 게릴라가 적으로써 기다리고 있었다. 게릴라들은 경무장 화기만으로 무장한 상태였고, 중화기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갖고 있었다. 20에서 50명의 소그룹으로 움직였다. 무자헤딘은 모택동식 힛트 앤드 런 게릴라 전술을 실시하였고, 이들의 분권화된 작전 특성으로 인하여 소련군에 대한 조율된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으로 인하여 이들은 분산의 이점을 갖게 되었고, 역으로 소련군이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낳았다.

 

 게릴라들의 표준 전술은 보급차량행렬의 선두와 후미 차량을 공격하여 마비시키고 이들을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매복의 한 예로 1981년 6월에 있었는데, 판시르 지역의 게릴라들이 살랑 고속도로(Salang highway)를 지나고 있던 소련군 차량행렬을 차단한 사건으로, 이 당시 소련군은 병력들을 탈출시키느라 120대에 달하던 트럭들을 스스로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사례로 1983년 여름의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우르군(Urgun) 지역을 증원하기 위하여 이동 중이던 2개 대대규모의 행군제대가 꼬불꼬불한 계곡길의 진흙탕 속에서 뒤엉켜 있던 중에 저항군의 공격을 받았다. 지뢰로 선두 전차가 파괴된 뒤 실시된 저항군의 공격으로 800명의 소련군 중에서 300명이 전사했다 - 당시 악천후로 인하여 항공 지원이 곤란했다.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제 40군이 경험한 교훈들을 체계적으로 공유하지 못했다. 개개 부대들은 각자 고유의 경험에 따라 발전시킨 전술과 전기에만 의존했고, 이들 부대들간에 경험이나 전술 교류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파병 전에 어느 정도의 특수전 훈련을 받았던 자동차화 부대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선형 전술에 대해서는 잘 반응하지를 못했다. 결국 재래식 전쟁과 클라우제비츠 주의에 익숙해져 있었던 제 40군은 저항군 전사들을 제압하는 데에 실패하게 된다. 일부 혁신이라고 할만한 것으로 bounding overwatch(bronegruppa; 엄호하 교대전진)이나 enveloping detachment(중대/대대규모 작전에서 소규모 기갑 기동예비대를 편성하여 적의 측면 혹은 후방을 차단, 공격하는 전술[1])등의 기법등이 등장하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재래식 전술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여러 문제점들로 인하여 그 효과들도 한계가 있었다. 그 이러한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전장에 투입된 병력의 규모가 부족했다던가, 민간 관리들과 군간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민심을 잡기 위한 작전이 전혀 없었다는 것 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련군은 모든 성공적인 대반란전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원칙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체첸

 

 주민 한 명을 처형함으로써 수백 명의 러시아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수천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반역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예르모로프 장군

 

 아프간에서 철군한지 5년만에 있은 러시아군의 체첸 침공이 갖는 역사적 연속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러시아는 훨씬 허약해졌으며, 1994년 12월에 그로즈니로 침입한 러시아군은 훨씬 덜 훈련받고 장비상태가 훨씬 나빴다. 러시아가 강대국 지위에서 추락하고, 러시아군의 질이 엄청나게 저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첸을 침공한 러시아군은 강대국 군대들이 갖게 되는 군사전략상의 선호방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옐친은 체첸에 강경책을 사용했고, 그 주변 보좌관들도 모두 매파였다. 그는 신중한 지휘관들을 해임시키고 국방부에서 비둘기파를 몰아냈으며, 언론에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쫒아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대하여 대규모 항공 공격 및 포격을 이용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함으로써 무분별한 대규모 참화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지난 아프간 전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수 주가 흘러갔고, 수천명의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 속에서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점령했으며, 이어 같은 방법으로 다른 도시들을 힘겹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예르메로프 장군이 무덤 속에서 미소지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3면에서 포위하였고, 북쪽으로부터 진입하여 지옥으로 직행하였다. 체첸군은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무장 민병대와 일부 정규군이 혼합된 혼성부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 장비들은 1993년에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것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러나 체첸인들 역시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고, 과거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으며, 러시아군 군복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러시아인들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전술을 쓸 것이며, 어떻게 러시아군을 기만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또한 체첸인들은 그로즈니 전투에서 지역을 잘 아는 토착 방어자라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게릴라들은 도시의 하수도, 지하철, 지상전차 시스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뒷골목, 건물, 길거리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군은 그로즈니에 대해 잘 몰랐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고, 그 결과 자주 길을 잃었으며, 체첸군의 매복에 걸리거나 아군끼리 전투하기도 하였다. 제대로 된 지도가 없었던 탓에 부대간 협조를 위한 지경선을 긋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비록 그로즈니 전투에서의 게릴라들은 이후의 전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래식 방식으로 싸우긴 했지만, 이들이 사용한 전술 자체는 비표준적인 파비안 접근방식임은 마찬가지였고, 러시아군의 기술 우위를 상쇄시키기 위하여 복잡한 도시 지역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이들이 선호한 전술은, 러시아군을 몇몇 골목으로 유인하여 고립시킨 후 매복 공격을 펼쳐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그로즈니 전투 이후, 체첸인들은 계속 다른 도시들로 옮겨가며 시가전을 벌임으로써 그로즈니에서처럼과 같이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고통을 주었다. 이들은 아르군, 샬리, 기타 여러 도시들에서 작전을 펼쳤는데, 도심지 전투를 통하여 크게 2가지 이점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가전을 하게 됨에 따라 러시아군의 장점인 헬리콥터, 항공기, 전차의 화력 효과를 크게 상쇄시킬 수 있었다; 또한 지역 주민들과 섞여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로써 민간인과 전투요원간 구분이 어려워졌고, 러시아측에서 무차별 공격하도록 만들어서 체첸측으로 하여금 주민들 사이에서 병력을 쉽게 모집하게 되는 효과도 주었다. 러시아군은 도시로 진입하면서 통상적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하였다 - 민심을 장악하는 데에는 별로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1995년 2월 9일, 체첸 지휘부는 그로즈니에서 대부분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심한다. 이는 군사력의 추가 불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이곳에서의 전투에 러시아군이 점차 적응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체첸인들이 이곳에서 많은 러시아인들을 살상하긴 했지만, 체첸인들 역시 그로즈니 전투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진정한 모택동주의자 방식인 "치고 빠져서 나중에 또 싸운다" 방식으로서, 체첸인들은 손실을 이것으로 끝내고 작전지역을 산악지대로 - 기계화 재래식 부대에게는 역시 불리한 지역 - 옮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일단 산악지역으로 옮기게 되면서, 체첸 방위위원회는 이에 빨치산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며, 이는 고립된 러시아군 초소에 대한 습격이나 도로 매복, 철도에 대한 양공이나 보급선 공격 등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게릴라들은 러시아군과의 정면 대결은 항상 피하였으며, 기습 공격에 치중하였고, 전사자들의 시체를 항상 회수했다.

 

 재래식 방식의 러시아군의 약점을 이용한 체첸인들의 모택동주의식/ 비대칭 방식의 전투 방식 몇가지를 살펴보자. 한가지 방식은 러시아군 부대들 사이에 제대로 협조가 되지 않는 것을 이용한 것으로, 양개 부대 사이에 침입하여 양쪽의 러시아군이 서로에게 사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소규모 체첸 전사들이 야간에 러시아군 사이로 침입하여 양쪽 방향으로 기관총 및 유탄발사기를 발사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뜨로찔로 강화된 대전차 수류탄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군이 사격에 대응하기 시작하면 체첸인들은 퇴각했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은 서로에게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때까지 한동안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가끔씩은 동이 튼 후에 날아온 지원 헬리콥터가 상황을 파악해 줄 때까지 계속 싸우게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가끔씩은 체첸 게릴라들이 러시아군 무선 통신을 가로채서 러시아군 항공기가 러시아군을 폭격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도심지 환경에서 러시아 하차보병이 게릴라들을 추격하는 일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체첸 보병들은 전쟁 내내 지속적으로 러시아 병력들을 유인했다. 러시아 기계화부대가 체첸 부락을 포위할 때마다, 체첸인들은 대부분 포위를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체첸인들의 강점은 파비우스 주의와 모택동주의를 혼합한 비대칭적 접근 방식을 사용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들의 전술은 간단했다: 이들은 경량 휴대용 유탄발사기와 기관총, 대전차 무기 등을 휴대했고 그 결과 이들은 기동성이 우수했다. 또한 이들은 러시아측이 숫자와 재래식 무기로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곳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 이들은 강점을 피하고 약점을 공격했다. 반면에 러시아군은 클라우제비츠 주의자들이었고, 유럽 평원의 다른 정규군 부대와 싸우는 재래식 방식으로 싸우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도심지나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집단으로 구성된 적들과 싸우는 훈련은 받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의 파라독스 - 분산과 집중의 수수께끼 (The Paradox of Time and Space - The Dispersion/Concentration Conundrum)

 

 전략은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는 예술이다.

 - 나폴레옹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모택동은 교묘하게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분산하도록 만들었다. 관동군을 분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중국 게릴라들은 고립된 초소들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각개격파할 수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약한 측이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이용하여 집중과 분산이라는 키메라를 활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대칭 전략가들은 공간을 활용하여 적을 시골 지역으로 끌어냄으로써 강대국이 집중을 통하여 자신들의 숫적 우세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재래식 군대의 경우 자체 통신선을 방호하기 위하여 점점 더 많은 병력들을 투입하여야 하게 되며, 그 결과 수 많은 고립된 초소들이 생기게 된다. 약자 측은 이로써 신장된 적의 부대에 대하여 국부적인 병력 집중으로 우세를 획득할 수가 있게 된다. B. H. 리델 하트는 이를 정통 집중의 법칙의 역으로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분산은 게릴라 측에 있어서 필수적인 생존과 성공의 조건이다. 이는 적에게 목표물을 제공하지 않아야 하고 단지 미세한 입자로만 활동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작은 수은 입자들이 일시적으로 크게 뭉칠 수도 있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규합하여 몇몇 약한 적의 목표물을 압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합리적인 약자는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여 강자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분쟁을 장기화시킨다: "모택동과 보 응웬 지압 모두 제국주의자 군대 입장가 즉석에서 대결하려고 하는 주요한 모순이 이들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분산되면 너무 얇야져서 공격에 취약해 지기 때문이라고 반복 강조하였다." 또한 만약 강자가 이런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병력을 집중시키면 나머지 지역은 무방비가 된다. 강자측에서 병력 규모를 대규모로 증강하게 되면 이런 작전상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럴 경우 전쟁 비용이 증가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반대로, 강자가 내부 저항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철군하게 되면 반대로 작전상에서의 모순은 더욱 심각해진다.

 

 모택동은 "게릴라는 적당히 인원을 집결 및 분산시킴으로써 투쟁 기간을 연장시킬 수가 있다"라고 하였고, 상대적으로 약하게 분산된 적의 분견대에 대하여 집중하여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영토 공간에 있어서 이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의 수가 있고 이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T. E. 로렌스(T. E. Lawrence; 일명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대전 당시 중동에서 게릴라전 수행)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아랍인들의 반란을 통제하기기 위해서는 매 평방마일마다 터키군 20명이 있어야 (결국 계산하면 총 60만명이나 됨) 된다라고 하였다. 같은 원리로 비록 러시아군이 숫자상으로 훨씬 우위에 있긴 했지만, 이들은 지형상의 문제로 집결할 수가 없었고, 상대 무자헤딘 및 체첸인들은 이를 전쟁을 장기화하는 데 잘 활용하였다. 이들 게릴라들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취약한 통신선을 보호하기 위해 분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병력과 힘을 분산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 모택동

 

 제대로 된 교통 사회간접시설이 없고, 지형이 험한 아프간 지역의 특징은 넓은 범위에서 전투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는 주요 도시들을 잇는 대형 고속도로가 한개 있긴 하였고, 소련 국경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있긴 했지만, 아프간에 도로망이 그리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현대적인 기계화 및 차량화 부대들은 중부 및 북부의 험한 지형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소규모 게릴라 떼에 의해 쉽게 공격당했다. 그럼에도 소련인들은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반군 장악지역을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작전에는 통상 공중 폭격이 수반되었고 대규모 인구가 피난가도록 만들곤 하였는데, 어떤 아프가니스탄 전문가는 이를 '이동 대학살(migratory genocide)'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소련군은 베트남에서의 미군과 같이 적군이 있을만한 지역을 폭격하고, 농산물을 파괴하며, 가옥이나 기타 게릴라 작전을 도울만한 모든 것들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인들이 자신들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게릴라를 사냥하거나 뿌리뽑지 못했으며, 게릴라들은 산악지대나 계곡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소련군이 철군하면 폭도들도 돌아왔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이기지 못하게 만든 것은 단지 게릴라 전사들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련의 재래식 교리는 이런 종류의 자연환경 속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유렵의 개활지 지형과 평온한 기후 대신, 소련군은 아프간에서 사막 및 척박한 산악 지역과 맞닥뜨려야 했으며, 이곳의 기후는 온도와 날씨가 대단히 극단적으로 변화했다. 또한 도로, 철도, 기타 군수 관련 사회간접시설들이 대단히 열악했다. 이러한 환경은 무자헤딘에게 유리하였는데, 이로써 무거운 소련군의 이동과 화력을 제한시켰고 아울러 지휘 통신 측면에 대단한 부담을 안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련군 자체의 항공 및 지상 군수 시스템도 이처럼 복잡한 지형에 분산되는 부대들을 지원할 만한 능력을 처음에는 갖추고 있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광대한 영역과 제한된 소련군 병력의 양은 실질적으로 소련군에게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안겨주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소련군 규모는 80000명에서 115000명 사이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 중에서 최소 30-35퍼센트는 통신선(LOC) 및 기지 방호를 위해 투입해야 했다. 예를 들어 "게릴라전 이야기에서 가장 흔한 레파토리인" 수송대 습격에 대해 방어하기 위하여 대단히 많은 방호병력을 투입해야 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도로망의 부족과 반복적인 무자헤딘 습격으로 인하여 아프간의 수송 네트워크는 용량 초과상태였다. 하지만 소련군에게는 소련으로 향하는 통신선을 방호하는 것이 최고 우선순위로 꼽혀 있었다. 그 다음 우선순위가 무자헤딘 보급망의 교란이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불리한 시간 및 공간 요소로 인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집중과 분산의 파라독스가 심각한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대다수 소련군은 기지에 집결해 있었고, 이들의 통신로와 나머지 병력들은 지나치게 분산되어 있었다.

 


체첸

 

 적이 분산할때 내가 집중하면 나는 적의 일부를 공격하는데 내 힘을 사용할 수가 있다. 이점에서 나는 숫자상 우위를 점할 수가 있다. 만약 내가 특정 선택 지점에서 다수로써 소수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면, 이곳의 적은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다.

- 손자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도심지역 및 비도심 지역의 지형을 잘 사용하여 적에게 큰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러시아 정치 및 군사지도자들이 원하던 신속하고 결정적인 전쟁을 회피하였다. 러시아 국방장관 그라체프는 신속한 승리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1개 공수연대만 있으면 몇시간 내로 두다예프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체첸인들이 전쟁 당시 수행한 내용을 크게 2가지 측면으로 볼 수가 있다: 도시 게릴라전과 산악 게릴라전이다. 도시 지역은 모택동이나 손자가 분산, 집중, 시간, 공간을 논하면서 상정한 지형과는 대단히 다른 지역이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그로즈니를 잘 알았고, 이들이 비대칭 방식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집중과 분산의 수수께끼를 잘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로즈니에서 러시아군이 방어 태세를 취할 때에는 항상 주변 모든 건물들에 몇명씩을 배치하곤 하였다 - 즉 도시지역 방식의 전초를 설치한 것이다. 그 결과 이러한 러시아군은 분산된 셈이 되었고, 체첸군은 이러한 점을 활용하여 분산된 전초들을 각개 격파하곤 하였다.

 

 도심방어에는 "방어않는 방어"라는 개념이 있다. 체첸인들은 특화점에 의한 방어를 포기하고 기동성에 의존하여 적이 찾기 어렵게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들은 도심지에서의 히트 앤드 런 작전을 실시함으로써, 러시아군이 이들을 찾아 고착시키고 화력을 쏟아붇는 과정을 실시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힘을 쓸 수가 없었고, 자주 각개 격파당했다. 다른 저술가의 의견에 따르면, 19세기의 도심 숲(urban forests) 개념이 이제 체첸인들이 활용한 새로운 "도심 숲(urban forests)" 개념으로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체첸인들은 18세기 및 19세기에 숲속 전투에 능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것이 다시 그로즈니와 다른 도시에서의 도시 숲 전투에서 발휘된 것이다. 19세기의 러시아군은 숲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비대칭 전술이 적합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오늘날 화포와 폭탄으로 파괴된 도시는 멀쩡한 도시와 마찬가지로 그 나름대로 게릴라전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 아나톨 리에벤은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게릴라 타입의 방어군은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도시 숲을 이용하여 저격, 지뢰매설, 부비트랩, 매복 등을 실시함으로써 적의 기병, 기갑부대, 공군력, 포병등을 이용한 우세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체첸인들이 러시아인들과의 적접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도시게릴라 및 산악게릴라 방식을 사용하긴 했지만, 전쟁을 장기화하고 게릴라 병력을 계속 유지할 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예르메로프의 후임자들이 19세기 경부터 체첸 지역 상당수 지역의 숲을 지속적으로 베어버렸기 때문에, 1990년대 무렵에는 장기간의 게릴라전을 펼칠만한 숲 지역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가 않았다. 또한 1995년과 1996년에는 체첸인들이 양적으로 우세하고 막강한 화력을 투입하는 러시아군에 밀려 어려운 처지에 몰리게 되는데, 이때 선택한 것이 러시아 영내에서 벌어진 2차레의 테러공격 - 부디오노브스크와 페르보마이스코예 -이었다. 즉, 체첸인들은 창의적으로 비대칭 기술을 발휘하여 러시아의 공간에서 전투를 벌인 셈이다. 이 공격은 충격 효과를 내어 러시아의 정치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도록 하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1995년 6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군 분견대가 러시아 군용 트럭을 타고 러시아의 스타브로폴 지구로 침투하여 부디노브스크 시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사살하고 인질을 잡았으며, 도시 병원을 점거하였다. 이 습격은 러시아 측에서 산악 마을인 노시 쥬르트(Noshi Jurt) 마을과 샤토야(Shatoja) 마을을 점령한 바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당시 러시아 사령관은 이제 체첸인들에 대한 산악전이 승리로 곧 끝나기 직전이라고 발표한 상태였다.

 

 1996년 1월, 살만 라두예프가 이끄는 250명 규모의 체첸 게릴라들이 다게스탄으로 침투하여 키즐라르 시를 공격하고 약 3000명의 인질을 잡게 된다. 협상 끝에 체첸인들은 인질들과 함께 몇대의 버스에 탑승하여 이동한다. 그러나 페르보마이스코예에서 저지당하게 되면서 체첸인들은 버스에서 내려 방어태세를 갖춘다. 이 습격사건은 러시아 측면에서는 대단한 언론 재앙으로 다가왔는데, 이 사건을 통해 러시아군이 얼마나 경무장 체첸 전사들을 상대하는데 무능한지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군이 도착하고 "엘리트" 알파 부대원들이 마을을 공격하였으나, 헬리콥터, 전차, 포병 지원 속에서도  여러 차례 격퇴당하고 말았다. 3일이 지나도록 마을을 함락시키지 못한 러시아군은 보병을 퇴각시킨 후 화력을 쏟아부어 마을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마을이 파괴되기 이전에 체첸군은 러시아군 진지들 사이로 몰래 탈출한 뒤였다. 언론은 이 공격에 대해 다루며 대규모 군인 및 민간인 피해를 보도했고, 그 결과 옐친 행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부디오노브스크 사건으로 옐친 행정부는 전쟁 지속에 대하여 대단히 큰 정치적 댓가를 치르게 되었고, 체첸인들이 비대칭 공격으로 얼마나 심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가 명백해졌다. 페르보마이스코예 사건으로 러시아와 세계의 여론은 러시아군의 형편없는 훈련 상태와 함께 이들이 포위된 소수의 적이 지키고 있는 조그만 마을을 탈환하는 데에도 몸을 사릴 정도로 사기가 낮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1996년 3월, 체첸은 그로즈니에 대하여 반격을 개시한다 - 이들은 도시 중심부를 탈환하고 약 150명의 러시아군을 살해한다. 그리고 3일 후에 퇴각한다. 마침내 옐친의 두번째 취임식이 있었던 8월 6일, 체첸인들은 "zero option"을 개시한다 - 이들은 그로즈니, 아르군, 구데르메스 등을 동시 공격하는데, 이는 전쟁 전체를 통틀어 체첸측의 최대 공세였다. 그로즈니에서 게릴라들은 신속하게 도심지를 장악했으며 정부청사를 점령하였고, 체첸군 병력이 러시아 수비대의 1/3 에 불과했음에도 러시아군 군사 초소들을 유린 내지는 포위했다.

 

 이러한 도시 지형의 활용으로 러시아의 전쟁 지속 의지에 직격탄을 날리게 되었으며, 2일째가 되었을 때의 러시아군은 전사자 500명과 부상자 1500명의 피해를 입은 채 1994년 12월의 공격개시선 지점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대패전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측은 휴전 협상을 벌여야 했고, 제 1차 체첸전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체첸인들이 실시한 "zero option" 공세가 1968년 베트콩들이 남베트남 주요 도시들에 실시한 테트 공세와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양개 공세 모두 강대국들이 소전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두 경우 모두 강대국의 무게 중심 - 제한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지 - 를 타격한 간접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비대칭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결론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 모두 러시아군은 기계화/중화력 부대라는 굴레와 재래식 교리에 묶여있음으로 하여 민첩성(agility)이 엄청나게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 모두 거친 산악 지형과 도심 지역의 대반란작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이었다. 반면에 무자헤딘과 체첸인들은 훨씬 잽싸고 숙련되어 있었다. 양개 분쟁에서의 개릴라들 모두 모택동식의 히트 앤드 런 전술을 사용하여 러시아의 전투시스템의 우수함을 회피하였다. 에드워드 루트왁의 말을 인용하면, "로마인들은 결국엔 적의 사상자를 최대화 하는 것 보다 자군 사상자를 최소화 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아래에서 우리는 아프간의 러시아군을 "군단병(legionary)"으로 대체하고, BMP를 "완전무장 흉갑(full breast plate)"으로 대체하게 된다면 이 표현은 정말로 놀라운 비유가 될 것이다. 다음 인용구는 로마인들이 주변지역 전쟁에서 실시한 역할에 관한 것으로, 러시아인들이 어째서 민첩성을 결여했는지를 확연히 드러내 줄 것이다.


 사상자를 줄이기 위하여 공격 능력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희생되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군단병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커다란 사각 방패, 튼튼한 금속 투구, 완전무장 흉갑, 어깨 보호구, 발 보호구 등은 너무 무거워서 이들의 민첩성을 대단히 제약했다. 군단병들은 극도로 잘 보호되어있던 반면,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단지 빠른 걸음으로 후퇴하는 적들을 따라가는 것도 장시간 지속할 수는 없었다.

 

 소전쟁에 논리적으로 따라붙게 되어 있는 의지의 비대칭성, 고통에의 비대칭성은 소련군과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에서 실패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소련과 러시아의 경우 이들이 상대한 게릴라들에 비하여 인내할 수 있는 사상자의 규모가 훨씬 적었다. 비대칭 분쟁에서, 약한측은 2가지 선택지만을 갖고 있다 - 승리 혹은 죽음. 강자의 선택지는 좀 다른데, 승리 혹은 집에가기인 것이다. 전체주의 정권에 정부에 의한 완전한 언론 통제가 이뤄졌던 소련 시기에도, 모스크바 정권은 성공을 이룰만큼 충분히 많은 병력을 충분히 오랜 시간 투입할 만한 의지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전투의 일부를 분담해 줄 토착민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체첸 전쟁에서는 이러한 의지의 결여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고, 이곳에서는 보다 짧은 기간에 더 많은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체첸에서의 2년 동안, 러시아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10년간 입은 총 전사자 수의 절반 가량을 전사자로 잃게 된다(6000명 대 14000명). 게다가 체첸에서는 러시아군에 상당한 사기 문제도 발생하였는데, 이는 생활수준, 봉급문제, 훈련부족 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것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첸 전쟁에서간의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94년에 체첸을 침공한 러시아군의 준비상태는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소련군의 준비상태에 비해 훨씬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한 저술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허약하고, 부패하고, 무너져가는 군사 조직이 게릴라 전술에 능한 잘 무장되고 사기가 왕성한 전사 민족들과 싸우도록 내던져졌다. 그 결과는 족히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의지의 파라독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 어떠한 강대국도 중요한 국가 이익이 달려있지 않은 전쟁에서 강대국 방식대로 싸우지 않는 적을 맞아 장기간 싸울 수 있는 의지를 보여준 바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는 상당히 다른데, 그 차이점은 적들이 먼저 우리의 고향 땅을 공격하였으며, 적들이 지속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와 소련, 현재의 러시아 연방은 지속적으로 영토 남쪽을 향한 영향력 확대를 꾀해 왔다. 제정 러시아의 경우, 팽창은 메시아적 십자군 원정으로 취급되어 다국적 제국을 "문명화"하고 러시아인화 하는 것을 숙명으로 삼았다. 소련의 경우에도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 지역 영토 및 주민들을 지배하고 점령하였지만, 다만 그 배경에는 이데올로기적 통합과 과거 제국 시절의 영토를 상속받겠다는 개념이 있었다. 1991년 이후에는 과거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 연방이 군사력과 경제적 억제력을 내세워 "준 외국(Near Abroad)"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과거 강대국 지위를 되찾고자 하였다.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 속에 들어박혀 있는 가부장적 감정"은 과거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들을 "떼놓을 수 없는 재산"으로 간주하여, 현실적으로 분리되려는 과거 공화국들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난 제정 러시아의 수세기 기간 동안, 한가지 사실은 똑같았다 - 러시아 제국의 유지는 강제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사실 러시아와 소련의 강대국 지위는 문화나 경제적 우수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 이것은 순수하게 강력한 군사력과 유라시아의 광대한 영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한 러시아 전문가는 이점을 지적한다 :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강대국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수단을 다시 사용하려는 유혹은 매우 강하다."

 

 소련군과 러시아 연방군은 변화보다는 연속성을 더 많이 보여주었고, 이 점은 대게릴라전 수행 과정에서 재래식 교리와 재래식 방식에 천착한 점으로 잘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인들은 접근방식을 헬리콥터와 특수부대 투입으로 다소 변경하긴 하였지만, 이런 점들 역시 재래식 접근임에는 마찬가지였다. 체첸에서의 전쟁에서도 러시아 군대는 다소 발전적인 방법을 사용하긴 했으나, 재래식 방식임에는 마찬가지였다. 흥미롭게도, 제 2차 체첸 전쟁 기간에는 러시아인들이 마침내 아프가니스탄에서와 제 1차 체첸 전쟁에서의 피의 교훈의 일부를 깨닫게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제 2차 체첸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포병과 스탠드오프 폭탄 사용 의존도를 높이고 도시전투를 회피하고 있는데, 이는 1994년에서 1996년간 도심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데에 대한 교훈을 얻어서인 것 같다.

 

 이 논문에서 설명된 파라독스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강대국이 소전쟁에서 승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장기간 대륙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에 특히 잘 적용되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러시아와 러시아 군사력은 재래식 패러다임에 천착하였고 비재래식 패러다임은 천시하였다. 그 의의는 명확하다: 만약 러시아 군대가 소전쟁에서 성공적이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대전쟁 패러다임에만 천착하는 사고방식과 교리를 개선하고, 배움과 혁신, 적응을 할 수 있는 조직으로 거듭나야하는 것이다.

 

 러시아 군대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배울 수가 있을텐데, 이들은 수많은 소전쟁/ 비대칭 전쟁들을 겪어왔다. 또한 한 군사개혁 및 소전쟁 전문가는 다음과 같은 소전쟁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 분권화, 경량화, 부대 단결, 훈련의 질 등의 가치를 높이 치는 것이야말로 미래에서든 과거에서든 비대칭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험지에서 완강한 산악 전사들과 싸우는 대반란전에는 특수훈련을 받고 정예이며 경량화되고 강한 응집력을 갖고 있으며 전술적으로 유연한 부대가 꼭 필요하다. 따라서 비대칭 전쟁에서는 소련과 러시아 군대가 전장으로 불러들인 군대의 경우와 정확히 반대의 군사 문화와 군사구조, 교리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우수한 정보능력과 정확하게 최소한의 살상만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결론은 특히 미군의 아프간에서의 대게릴라전에 꼭 해당되는 것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경무장 및 특수부대가 십여년 전 소련군들이 무자헤딘과 상대했던 동일한 지형에서 알 카에다 전사들을 뿌리뽑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비대칭 분쟁의 파라독스들에 또 하나의 모순을 더해 볼 수도 있다 - 타성(hubris)의 파라독스와 모욕(humility)의 파라독스다. 강대국들은 소전쟁에서 항상 적들의 의지와 기술, 끈질김을 과소평가했다. 다음의 글은 러시아가 갖고 있던 남부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전략문화적 연속성에 대한 강조글이 될 것이다:

 

 "위대한 러시아"를 보존한다는 목표야말로 [체첸에서] 러시아연방이 쏟아부은 노력의 심장 속에 항상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정책의 기본적 골자는 차르 시대에서부터 전혀 변한 것이 없으며, 다만 수단에 있어서 현대전 방식이 추가되었을 따름이다. 옛 제국에서 파생된 모든 것들이 여기에서 비롯되며, 무력에 의한 헤게모니 추구야말로 실질적인 핵심 요소이다.

 

 

 

 

 


미군 변혁에 대한 시사점 (Implication for U.S. Army Transformation)

 

<생략>

 

 

 

 

 


마치는 글 (Postscript)

 

 미육군의 핵심 문화 엘리트를 이루는 장교단은 미래 전쟁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고 혁신에 참가하여야 한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기"는 그저 자동차 범퍼에 붙은 스티커에 예쁘게 씌여진 장신구로 남을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문화는 이 "상자"라고 할 수 있으며, 잠재적 혹은 현재의 적들 대부분은 우리의 현실태를 알고 있다 - 복합 기동전, 기동 기갑대형, 공중기동 대형, 기술적 우위에 대한 효과 등. 더구나 우리의 군사문화가 오랜 기간동안 클라우제비츠 주의 패러다임에 오랬동안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신기술을 기존의 조직과 생각에 끼워맞추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과 싸우고자 하는 완강하고 교활한 적들은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상쇄시킬 수 있는 복잡 지형, 예를 들어 시가지에서 싸우고자 할 것이다. 변혁의 씨앗은 이미 이곳에 뿌려져 있다 - 에릭 신세키 장군은 미 육군은 반드시 변혁해야 한다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그러나 군사 문화와 크게 중앙집권화된 피라미드형 조직의 변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포트 후드에는 단일 부대로는 최대의 기갑부대가 위치하고 있는데, 디지털 변혁 부문에 있어서는 큰 성과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정통적이고 재래식 방식을 벗어나는 측면에 있어서는 그다지 진전이 없다. 여러 부대들이 매년 "슈퍼 볼"식 훈련을 실시하는 NTC는 스스로를 공부하는 조직이라고 자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NTC가 훌륭하고 도전적인 전술 훈련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간 패러다임을 지키는 문화적 근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NTC는 육군의 정통 문화의 상자 역할을 하고 있다 - 이들의 관찰 통제그룹이 일련의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기존 틀에 일치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리를 변혁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며, 현 교리는 기존의 많은 변화들을 반영시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와 현재의 안보환경 모두 변혁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원동력은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 문화적 인습에 방해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조직에 대한 충성심(tribal loyalty)이나 편견은 버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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