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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와 함께 걸작 멜로영화의 계보를 잇는 21세기의 클래식
사실 저는 퀴어영화, 장르를 따로 분류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자비에 돌란 감독이 말했던가요? 자신의 영화가 퀴어영화라고 불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사랑에 있어서 젠더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세태에도 불구하고 영화계 내에서는 소수성애를 소재로 한 멜로/로맨스 영화를 주류영화와 다른 잣대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합니다. 이번 아카데미의 노미네이트 결과에서 흔히 '리버럴'하다고 하는 문화예술계의 역설적인 보수성을 볼 수 있는 한편, '캐롤'은 그러한 소수성애 영화에 대한 낡은 편견을 처참하게 뭉개버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본디 멜로장르의 가장 기본적인 틀은 남자-여자 간의 관계입니다. 영화의 역사를 포함한 엄청난 나이를 자랑하는 예술사에서 절대적인 진리로 통했던 틀이었고, 소수성애를 다루는 문학, 영화는 전통적인 구성에 대한 변주, 또는 아웃사이더로 통해왔었고, 지금 또한 그러한 시각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작품도 멜로영화보다는 퀴어영화로 기억되곤 한다는 점을 기억해낸다면, 결코 소수성애를 다룬 멜로영화가 이성애를 다루는 멜로영화와 동일한 잣대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캐롤'은 매우 입지 전적인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여성과 여성간의 사랑을 다룸에도 그 어떤 이성간 관계를 다루는 멜로영화보다 마음을 후벼파고 뒤흔들어놓는 이 작품은, 섹스/젠더를 뛰어넘는 사랑의 초월성을 묘사하면서, 한 인간 대 인간의 감성적인 교류와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해냅니다.
그윽한 필름그레인과 풍부한 색감을 품은 영상과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서로를 간절하게 원하는 트레즈와 캐롤의 끓는 감정을, 여타 퀴어를 소재로 다룬 영화에서 남용된 비극적인 플롯 클리셰 없이 진솔하게 전달해 관객의 몰입과 감정이입을 성공적으로 끌어냅니다.
순차적인 이야기 전개에서는 결말부에 위치할만한 부분을 극초반부에 먼저 배치하는 연출도 인상적입니다. 유사한 연출이 사용되었던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동일한 극상황을 초반부에서 한번 결말부에서 한번 보게되는데, 이러한 연출은 초반부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던 감상을 결말부에서는 묘한 감상과 함께 두 동일한 상황 사이에서 쌓아놓은 감정을 한번에 쏟아냄으로써 극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두 배우의 연기는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대사 하나하나와 제스쳐, 목소리, 그리고 눈빛,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가 배우로써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캐롤과 트레즈의 삶을 은막에 투영한 것과 같은 감상을 주는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의 둘의 눈빛을 머리에서 지워낼 수 없네요.
'벨벳 골드마인', '아임 낫 데어'등 토드 헤인즈 감독의 이전 작품들 중 감상한 작품이 하나도 없는데,
이번 기회에 찾아보고 싶네요. 칸영화제에서도 그렇고, 아카데미도 그렇고, 토드 헤인즈 감독이 평단의 반응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거 같아 참 안타깝네요. 첫 타이틀 롤 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완벽에 가까운 연출을 보여주었는데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성적 관계에 대한 재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이 작품만큼 이러한 변혁을 대중들에게 가장 설득력있게 납득시킬 수 있는 영화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소수성애의 존재에 대한 단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을 초월해서 소수성애와 이성애 모두 결국 같은 사랑이라는, 사랑의 일반성에 대한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