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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키드의 생애
게시물ID : sisa_3858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aystall
추천 : 3
조회수 : 46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5/09 00:11:39

 

[1997년 초, 나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흔한 대학 합격증 하나 없이 졸업장 하나 달랑 들고. 우리 아들은 마음만 먹으면 일류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부모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 성적표에는 농구부보다 낮고 아이스하키부보다 높은 미묘한 등수가 기록되어 있었다. 대학에 못 가면 죽는다고 난리를 치던 시절이다 보니 재수 준비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딱히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같은 생각은 아메바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학원비를 번다는 명목으로 종로통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구인지를 주워다 읽는 게 일상. 적당히 취직해서, 적당히 살아갈 수 있겠지. 어느 고깃집에서 '알바'할 때 만난 녀석은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밤에는 직원으로 일하면서 한 달 100만 원을 벌어 알뜰살뜰 모으고 있었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나중에 사업할 거라고 했다. 그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지.

겨울 무렵, 부모님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뜬금없이 동네에 술집을 차렸다. 그즈음에 사람들을 다 TV 앞에 달라붙게 하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정부가 "IMF"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딘가에 "구제 금융"이라는 걸 신청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공포라는 확실한 감정을 느꼈다. 방송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죽어라 분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큰일이 났으니 돈을 아껴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수입 상품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김대중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큰일이 났으니 금을 모아야 한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잠깐만" 고생하자고 다들 이야기했다. 그때에는 그 큰일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 할 틈도 없었다. 세상 물정에 둔했던 나는 더더욱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시대가, "IMF 시대"가 왔다고 했다. 어쨌거나, 또래들 사이에선 입대가 유행이 되었다. 군대가 마치 피난처인 것처럼.

I'M Failure

1998년, 고등학교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에 가기 시작했다. 호프집 주방에서 일하던 녀석도, 고등학교 때 만난 두 살 아래 여자애와 딸 하나를 막 낳은 녀석도.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나는 그제야 신검을 보러 갔다. 신검을 보러 가니 군대 가고 싶은 시기를 쓰라고 했다. 딱히 군대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군대에 가는 게 좋다는 충고들을 들어왔던 터라 가장 빠른 날짜를 썼다.

여전히 IMF 시대라는 것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문지상에 거의 매일 오르내리는 "명퇴"와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얼마나 섬뜩한지는 알게 되었을 즈음, "I'M Fired"라는 유행어도 익숙해졌다. 구인지를 백날 뒤져도 '신입'을 구하는 광고는 없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쓰러진 어머니를 업고 돌아오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IMF 시대가 개막한 지 1년이 되어갈 때쯤, 영장이 나왔다. 서울대보다 경쟁률이 높은 게 군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던 무렵이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지만, 1998년 11월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의 열풍을 뒤로하고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무려 새천년의 1월, 군대를 전역했을 때 "우리 집"은 사라진 상태였다. 집을 팔고 전세로 갔다거나 월세로 갔다거나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집이란 게 없었다. 만 21세의 나이에 처음 한 일은 인감을 파고 주택은행에 가는 것이었다. 내 '사회생활'의 초기 자본금은 마이너스 2000만 원이었다. 그래도 난 나은 편이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고 있었다. 구인지에는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터를 구한다는 광고 일색이었다. "고객님 당첨되셨습니다" 따위의 멘트로 순진한 사람들의 등을 치는 그런 일 말이다.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상처는 주지 말고 살아야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더는 없었다.]

최저임금 만원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청년좌파>의 김성일씨가 지난 22일 프레시안에 게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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