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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도전한 자, 시신마저도 처단되다"
게시물ID : sisa_5290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작은창문
추천 : 11
조회수 : 1103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4/06/09 19:25:21
[시신 탈취 논란으로 본 삼성과 국가·②] 경찰국가의 통치술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찰은 법의 권리를 가로채고, 법을 침탈한다." 그래서 경찰의 존재에서 "우리는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참을 수 없는 애매성"을 경험하게 된다. 자크 데리다가 책 <법의 힘>(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나마 남은 경찰조차 사라지고 오로지 돈의 폭력만이 유령처럼 세상을 배회한다. 

지난달 18일 경찰은 서울 삼성의료원 강남분원에 난입하여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소속된 고(故) 염호석 양산분회장의 시신을 물리력으로 탈취하였다. 심지어 그 시신은 조합원들은 물론 고인의 지인들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화장되고 그 유골까지 자의적으로 처리돼 버렸다. 삼성의 폭압적인 노동 정책에 항거하여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조합원들과 함께하고자 하였던 고인의 유지는 경찰이 뿌려댄 캡사이신 최루액 아래 하냥 짓밟혀 버려고 말았다. 

그리고 이 순간 대한민국은 사라져버렸다. 세월호 참사에서 이미 존재감을 상실한 대한민국은 이제 더는 국가이기를 포기한 채 문자 그대로 '깡패국가'가 되어버렸다. 사적 이익을 위해 적나라한 폭력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굴복시키는 미개한 주먹의 국가가 이제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조직폭력배는 어떻게 다른가? 법학개론을 강의하는 교수는 짓궂게도 이런 질문으로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이제 그 교수는 피 튀기는 현실이 자신에게 던지는 똑같은 질문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탐욕스런 기업의 용역을 받은 경비회사가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향해 휘두르는 쇠파이프나, 시장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노점상의 푼돈을 뜯어가던 저 이정재, 임화수 등의 주먹과 무엇이 다를까? 

국민을 보호한다던 고래의 명문은 이미 국가의 무능력을 그대로 증명해 버린 세월호 사건에서 허상임이 입증되었고, 공공성 운운하며 모두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근대 이래의 법적 명분은 쌍용자동차 사태나 용산 참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오로지 입에 발린 허사에 불과하다. 철썩같이 다짐하던 복지는 '돈 없다'는 말 한마디로 포기되고, 노동3권을 정하고 있는 헌법마저도 자본의 입김 앞에서 휴지처럼 내팽개쳐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도대체 국가라는 게 있는 건가?'라는 억장 무너지는 의문문 하나만 남아 있는 셈이다. 

"뒤집힌 역할…경찰이 장례를 주도했다"

여기서 고인 아버지의 신고가 있었다는 변명은 도저히 들을 이유가 없다. 2년 전 경기도 수원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의 악몽은 아직 남아 있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은 사생활 운운하며 주춤거리는 바람에 구할 수 있는 피해자를 범죄 현장에 방치하였다. 그래서 여성단체로부터 "경찰은 피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신호를 무시하고 시민의 안전과 보호의 의무를 져버렸다"라는 비난의 십자포화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던 경찰이 이 사건에 와서는 돌변했다. 장례의 주관자는 누가 되어야 하느냐는 아주 사적이고도 사소한 문제를 두고 300명이 넘는 엄청난 경찰력을 동원하여 마치 엄청난 위험에 빠진 국가 기밀을 되찾아 내듯 시신을 탈취하여 분쟁의 한 당사자인 고인의 아버지에게 넘겨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정의의 화신으로 규정한 스파이더맨처럼 대한민국 경찰은 개인들 간의 사적인 분쟁 한가운데 뛰어들어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명분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방 당사자의 손을 자의적으로 들어주고 엄청난 무력과 위협을 동원하여 그 개인의 사적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경찰의 속 보이는 행태는 온전히 '법'의 바깥에서 구성된다. 이에 대해 법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 대법원은 이미 2008년 제사 주재자를 남자 중심으로 정하던 관례들은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이라는 헌법 이념에 반하는 것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법원은 사실상 만장일치의 판결로써 제사의 주재자는 공동상속인(즉, 유족)들이 협의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대법원 2008.11.20, 선고, 2007다27670, 전원합의체 판결) 

나아가 제사에 관하여 고인의 유지가 있는 경우 그것을 우선 존중하여야 한다는 판단도 같이 하였다. 즉, 이 사건처럼 고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에는 먼저 협의를 거치도록 하고 이 협의의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고인의 유지를 먼저 고려하여 그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법이 요구하는 올바른 절차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장례식장에서는 이러한 협의를 위한 설득과 타협의 노력도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경찰은 어떤 경우에도 이에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경찰권을 발동하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떠한 위험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고인의 아버지가 장례를 주관하기로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그래서 조합원들이 장례를 치르는 데 방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경찰력이 발동되려면 최소한 그것이 장례방해죄(형법 제158조)를 구성할 정도의 심각성이 있어야 하며 이 또한 방해 행위를 한 자를 체포하거나 그 방해 행위를 억지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하지만, 이 시신 탈취 사건에서는 경찰의 역할이 완전히 뒤집힌다. 장례식을 방해한 조합원을 찾아내고 그를 처벌하는 일반적인 경찰의 방식이 아니라, 고인의 아버지를 내세워 시신을 빼돌리고 장례의 장소와 시간까지도 주도하는 이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마디로 이 사건에서 경찰은 스스로 주먹을 앞세운 장의사가 되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질서나 공공의 이익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었거나 그럴 우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생 동료였던 조합원들과 함께하겠다는 고인의 유지가 있고, 이를 받들어 조합원들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자신들의 신성한 노동기본권의 범주 내에서 나름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는 기본권의 보장이라는 우리 헌법의 기본적 이념과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는, 올바르고도 정상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경찰은 도리어 이들 조합원과 그들이 진행하는 장례식을 원조하고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순리이자 우리 헌법의 명령이다. 혹은, 좀 케케묵은 용어지만 경찰은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는 경찰공공의 원칙과, 개입하더라도 되도록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면서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치라는 경찰비례의 원칙이 이 사건을 지도하는 법 원칙이어야 했다. 

요컨대, 이 시신 탈취라는 경찰의 폭압은 법치의 요청을 정면에서 거부한다. 오히려 그것은 경찰이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기존의 법을 숨겨버린 채 새로운 법을 만들어낸 예외 상태에 가깝다. 실제 이 사건에 경찰이 개입한 목적은 아예 노골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간단하다. 

그것은 장례식의 방해라는 '범죄'의 현장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범인’을 체포하려는 경찰 본연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고인의 시신을 향해있었다. 고인 아버지의 신고 운운하는 것은 그냥 한번 들먹여 본 핑계에 불과하다. 경찰의 관점에서, 고인의 시신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아니 되었고, 그 시신의 주위에 고인의 동료들이 모여 특정한 기업을 향해 불만의 목소리를 집단적으로 내도록 방치해서도 아니 되었고, 그러한 집단 행위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도 아니 되었다. 

그뿐이다. 그냥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이정재의 동대문파가 야당의 반(反)정부 집회를 백주 대낮에 린치하듯, 경찰이 그냥 그렇게 가서 유족과 조합원들을 폭행한 것이 이 사건의 전부다. 그저 권위주의 체제에서 대중적 관심이나 참여를 촉발한 가능성이 있는 의례-특히 열사들의 장례식-에 개입하여 시신을 탈취하였던 그 악행을 지금 이 순간에 단순 재생산해 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단 한 가지의 차이는 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만행들은 그래도 "국가 안보"를 핑계 삼은 정권의 안위가 그 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시신 탈취 행위는 이 같은 최소한의 헛된 변명 정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반(反)노조정책과 수탈적 하청 체계를 자랑하는 삼성전자의 속된 이해타산만이 그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폴 버카일은 최소한 "법적으로 강제성을 띠거나 폭력이 수반되는 일체의 활동"만큼은 결코 사유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것은 '본질적인 정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러한 강제력과 폭력을 담당하는 경찰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정부' 그 자체가 민간으로 이양되어 버렸다. 국가 기관 자체가 스스로 사병(私兵)이 되어 국민을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 도전한 자, 시신마저도 처단되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 사건의 경찰 대응 방식에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이 그대로 녹아들어 가 있다는 점이다. 시신 탈취를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공안이라고 하는 허구의 법질서뿐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진정으로 봉사하고 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의 절대성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도전받을 수 없는 자본의 신성불가침을 선언하고 이에 항거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비록 시신이라도 과감히 처단하고 이 세상의 바깥으로 내쫓아 버리겠다는 의지가 그에 깔려 있는 것이다.
 
현대 국가의 통치술은 시민들을 분리하여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탈리아의 법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박진우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국가는 시민이 아닌 자-비시민 혹은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내고 이들을 물리적으로 정치 체제 외부로 추방하는 방법을 통해 다른 시민들을 통치한다고 했다. 노동자, 이주민, 이주 노동자, 혹은 반(反)테러 작전이라는 명분 아래 위험 분자로 낙인찍긴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강제 송환을 위한 수용소나 관타나모 수용소와 같은 곳에 격리되어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니기를 강요 당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치술의 진짜 타깃은 이러한 비시민이 아니라 자신은 저렇게 처참해 내팽겨치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스스로를 체제에 순응하도록 훈육하는 나머지 시민들의 무기력 성이다. 

좀비 영화는 정확히 이 점을 대변한다.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채 죽어서도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좀비들을 향해 살아있는 자들은 끝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재확인하기를 강요당한다. 주인공들이 인간인 것은 저 좀비가 아닐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 좀비와 접촉하여 감염되는 순간 자신을 인간임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즉시 자결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죽어야만 인간이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인용 : [칼럼] 좀비와 호모 사케르, 그리고 좀비오와 역전된 호모 사케르(Colors of Life))
   
경찰의 시신 탈취는 이런 통치술을 추구한다. 고인은 스스로와 우리 모두의 자유를 향해 육신의 구속을 떠났다. 하지만 동료인 조합원들이 벌이는 장례식은 경찰의 물리력에 의해 중도에 무산되고 말았다. 스스로 제의의 희생자 또는 주재자가 되어 신탁을 갈구하였지만, 제의 자체가 좌절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물론 그 제의에 참여한 모든 조합원은 세속의 세계에도, 신의 세계에도 머물지 못하는 일종의 호모 사케르로 내몰린다. 국가 혹은 경찰은 그들에게 신의 법도, 세속의 법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신의 의지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나 노동기본권이라는 이름의 거룩한 헌법상의 권리도 그들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을 그저 일반인의 시선 밖으로 내쫓아 '보이지 않는 자'로 만들거나, 혹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다른 생존자의 생존에 대한 위험을 발생시킨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이 치열한 경쟁 사회 내에서 겨우 삶을 영위할 뿐인 생존자들에게 생존한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하며 체제의 명령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체제의 바깥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동시에 체제 속의 사람들을 체제 안으로 배제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절대화되는 것은 경제이며 자본이다. 1 대 99의 양극화로 인해 최악의 상황으로 몰려 있음에도 아직 죽거나 쫓겨나지 아니하고 살아남았다는 점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휴대폰과 반도체와 자동차 등으로 그렇게 살아남게 해 준 자본이라는 절대반지의 거룩함 - 이것이 경찰의 시신탈취가 고인과 조합원과 우리 모두에게 던진 메시지다. 

아울러 이 메시지를 위반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로 내팽개처진 좀비들처럼 혹은 체제 밖으로 내몰린 저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조합원들처럼 법도 권리도 심지어 인간의 존엄도 보장되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이 그 뒤를 따른다. 혹은 이렇게 추방된 자들은 자본이 자유로운 작동을 방해하고 따라서 자본의 축적을 가로막아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까지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또 다른 타부로 이어진다. 

이들은 "생존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인용 : [칼럼] 좀비와 호모 사케르, 그리고 좀비오와 역전된 호모 사케르(Colors of Life))이기 때문에 자칫 접촉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즉시 감염되어 그들처럼 내쫓겨야 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금기가 강제되는 것이다. 이들의 집회나 이들의 목소리는 보고 들어도 못 본 채 못 들은 채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투명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협박과 세뇌의 과정을 통해 거대 자본은 절대불가침의 성역으로 혹은 절대복종의 신성 권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좀비는 원래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본의 전략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무수한 틈새를 가진다. 1987년 체제를 가능케 했던 민주화의 국면을 신자유주의가 대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시장 절대주의의 기획은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시장에 대립하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고, 아직도 규제 완화에 저항하는 관료들의 집단 이기주의도 통용된다. 국가 부문을 어떻게 정치화하는가에 따라 여전히 민주화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투명 인간에게 말 걸기가 된다. 그들의 전략이 삼성서비스지회의 파업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면 우리의 돌파 전략 역시 거기서부터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과 국가가 이들을 못 본 체할 것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굳이 이들을 찾아보고 이들에 귀 기울이고 이들과 함께하는 연대의 기반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 우선의 저항이다. 

좀비는 원래 인간이었다. 우리가 이를 제대로 인식해 내는 순간 그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붕괴하거나 아니면 그 영화 자체가 코미디로 전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우리가 경청하고 각성하는 순간 국가와 자본의 빈틈이 우리 앞에 삐져나올 것이며, 그 빈틈을 통해 강력한 혁신의 길을 구성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 보이는 그 빈틈을 찾아 결을 거슬러 가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연대의 축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호모 사케르가 되어 저 좀비의 수용소로 내팽개쳐지지 않는 최선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단속사회>(창비 펴냄)에서의 엄기호가 한 말마따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말을 거는 행위인 경청은 배제의 정치, 수의 정치에 맞서는 삶의 정치가 된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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