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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소녀
게시물ID : readers_52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헤롤드
추천 : 1
조회수 : 2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3 08:36:57

눈꽃 소녀

 

-1-

 

[야, 너 진짜 이러기냐?]

 

핸드폰 너머로 애걸복걸한다.

 

[진짜 괜찮다니까, 한번 만나봐.]

“여자 안 만나.”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데 말이다.

 

[도대체 왜?]

 

왜? 막상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글쎄, 몰라. 그냥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뭐?]

“어, 잠깐 끊어봐.”

 

나는 핸드폰을 끊고 길에 멈춰 섰다. 좁은 골목, 현대문물의 이기로 버려질 때로 버려진 내 눈의 기이한 광경이, 아니 어쩌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광경이 눈에 포착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한 명의 소녀가 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눈을 맞고 서 있었다.

내리는 한 망울 한 망울 전부 성스러운 성수로 세례 받는 수녀처럼 눈을 피하지 않고 두 팔 벌려 내리는 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눈을 사로 잡아버렸다. 두 눈 감고 기도하듯 서서 양 팔을 벌려 서 있는 소녀는, 완전히 내 눈을 사로 잡아버렸다.

새하얀 피부, 새하얀 짧은 민소매. 검은 긴 검은 생머리.

나는 멍하니 멈춰 서서 그녀를 쳐다봤다. 눈이 내렸다. 사그락, 사그락. 나도 모르게 성큼 성큼. 나도 모르게 성큼 성큼 그녀에게 다가갈 때 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한 눈의 반하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 했다. 지금 여기 그녀를 처음 보기 전까지는.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안 추워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내 물음의 그저 미소 지었다.

 

“내가 그렇게 추워 보여요?”

 

그녀는 내 질문의 그렇게 되물었다.

 

“만날 때 마다 항상 그것만 물어보네요. 좀 패턴을 바꿔봐요.”

 

그녀는 대뜸 그렇게 말하며 나를 쳐다봤다. 묘한 말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녀를 만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특이한 소녀라면 누구나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네? 우리 전에-”

“됐고, 코코아 사줘요.”

 

그녀는 대뜸 그러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끌어 잡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여자 손을 오랜 만에 잡아봐서 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렇지만 너무 차가웠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소녀의 손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흠칫하고 빼려는데 소녀는 꽉 하고 내 손을 붙잡았다.

 

“코코아.”

 

그녀가 인상을 쓰며 내게 말했다. 코코아? 뭐, 이런 당돌한 여자가 있담?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입술까지 삐죽 내민 소녀의 얼굴을 보자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디 잘 아는 곳 있어요?”

“아니요.”

 

내가 되묻자 즉답으로 고개를 젓는다. 잠시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미친 여자? 자세히 살펴보니 새하얀 옷에 민소매, 맨발이다. 혹시 어디 병원에서 도망쳐 나오거나-

 

“미친 여자는 아니에요.”

“네?”

 

속내를 완전히 들켜버려 나도 모르게 하이톤으로 반문했다. 그녀는 딱 잡아낸 명탐정처럼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지금 딱 그 타이밍이잖아요. 항상 이쯤에, ‘저기 오해하지 마시고, 혹시 도에 대해 공부하세요?’ 하고 물어 본 다음에 미친년 취급하잖아요.”

“아, 예.”

 

그녀가 위기양양하게 나를 보며 웃는다. 이상하다. 이 여자 완벽하게 마치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는 듯, 그것도 아주 자주 그런 듯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 낯설지가 않다.

 

“그럼, 우리는 보통 어디로 가나요?”

 

내가 물었다.

그녀가 웃는다.

 

-2-

 

코코아에 얼음을 탔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난다. 뜨거운 코코아에 들어간 얼음이 빠르게 줄어들고 얼음을 몇 개 더 넣었다. 차가운 코코아. 이런 취향도 있다.

익숙하게 찻잔에서 작은 접시, 익숙하게 선반에서 과자도 꺼냈다. 초콜릿 과제가 마침 집에 있다. 코코아를 좋아하니 이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언제가 부터인가 습관적으로 사는 과자다. 신기하게 이 과자는 겨울철이면 땡긴단 말이지, 나도 모르게 중얼 거리며 과자와 코코아를 들고 자연스럽게 내 집 거실에 창문을 열어 창문에 가까운 소파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건넸다.

 

“고마워요.”

고맙다면서 정말 의례적인 투로 말하고 그녀는 자연스레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과자도 말없이 집어 든다.

“아 이 과자는 정말 대단한 조합물인 것 같아요.”

대단한 조합? 맞아, 생각해보면 과자란 게 이것저것 조합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 참 독특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어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이 개그는 항상 먹혀드네요.”

그녀는 해냈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차가운 바람의 그녀의 머리가 휘날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소 짓는 그녀, 휘날리는 검은 머리, 때에 타지 않는 백색의 옷.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추워요?”

“난 뜨거운 게 싫은걸요.”

 

내 질문에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한다. 묘하다, 이 기분. 데자뷰? 어쩐지 이런 적이 있는 기분이다.

 

“어?”

 

뭔가 흐릿하게 무엇인가 떠올랐다.

어릴 때도, 조금 더 자랐을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직장을 다닐 때도-. 언제나 겨울이면 검은 머리의 긴 검은 머리, 백색의 옷을 입고 눈을 끌어 안는 소녀가 나의 추억에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랬다. 언제나 나는 그녀를 만났다. 이 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는 날이면.

 

“뜨거운 게 왜 싫냐면,”

“-정령이니까.”

 

그녀가 막 설명하려 할 때 내가 말했다.

 

“기억났네요.”

“응.”

 

그녀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자연스레 보일러를 끄고 두터운 파카를 꺼내 들어 입었다.

 

“일 년 만이네.”

“오랜만이네요.”

 

추억이 물밑들이 밀려온다.

 

#1

 

“그게 뭐죠? 나도 마셔보고 싶어요.”

“이거? 코코아?”

“네. 코코아요.”

 

언제가 였지, 꽤나 오래 전에 그녀는 내가 호호 불며 마시는 코코아를 보며 말했다.

 

“근데 눈꽃 정령은 뜨거운 것에 약하다며? 괜찮은 거야?”

 

“어- 그게-”

 

그녀가 시무룩해진다. 그게 너무 싫었다.

다행히도 어릴 때 이었는데도 나는 창의력이 좋았다. 얼음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녀가 웃으며 코코아를 마신다.

 

#2

 

“잊어버리겠지, 또.”

“인간은 정령을 만나서 헤어질 때 모든 걸 잊어버리는 게 순리니까요. 꿈처럼.”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

“제가 또 기억나게 할게요.”

 

 그녀가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나는 너무 무서웠다. 혹시라도 기억 못해 그녀를 놓쳐버리면 어떡하지 하고. 문득 눈에 과자가 들어왔다. 초콜릿 과자다. 코코아, 초콜릿- 그것은 그녀의 상징. 당장 다이어리에 과자 이름과 ‘꼭 사기!’ 라고 적어놨다. 겨울 마다 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그녀를 떠올리겠지.

 

#3

 

“올 때마다 혼자네요.”

 

그녀가 문득 말한다.

 

“왜?”

“여자도 안 만나고. 평생 혼자 살꺼에요?”

 

걱정스러운 그녀의 말에 미소가 번졌다.

 

“겨울엔 혼자가 아니니까.”

 

차가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사랑해.”

 

그녀만 있으면 된다.

 

-3-

 

“사랑해.”

“그 말 할 줄 알았어요.”

 

찬 바람이 불었다.

밖은 눈이 내린다. 눈이 멈추면 그녀는 다시 돌아가겠지.

눈아, 이번 겨울에는 멈추지 말아라. 올해도 다시 그렇게 기도하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E.P.-

 

다시 겨울이 왔다.

 

“삼촌, 뭐봐?”

 

 응애 응애 거리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새 이 녀석 말도 하고 걷고 뛴다. 인간이란 생물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자라난다.

조카 놈을 끌어안아 올렸다.

 

“눈이 언제 오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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