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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늙어버린 나의 토끼, 너에게 쓰는 편지.
게시물ID : humorbest_5308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츠
추천 : 47
조회수 : 2085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9/20 13:17:29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9/20 10:14:45



 나이 든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제는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가 어느 날 사라졌을 때 감당해야 할 슬픔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있을 때 늘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 반려동물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끔씩 활발하던 네가 지쳐서 잠이 든 모습을 보며 네 배가 움직이는지 걱정스레 봐야한다는 사실이. 가기 전까지 많이 예뻐해줘야지. 사랑해줘야지. 많이 눈에 담아야지. 사랑한다, 녀석아. 아프지않고 갔으면 좋겠다. 근데 안 갔으면 좋겠다. 

 어느 천둥번개 치던 날, 너와 내가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던 날. 나는 너를 내 옷 속에 품고 네 귀를 틀어막으면서 괜찮을거라고 주문처럼 외며 네가 아닌 나를 달랬었다. 너는 옷 속에서 재빠르게 뛰는 네 그 심장을 내 팔에 대고, 거친 콧김을 색색 뿜으면서도 내 손끝을 찾아 핥아주었고 나는 그것이 참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눈물 범벅이 되어서 너의 케이지 앞에 쪼그려 앉아 이제는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네게 있잖아, 하고 운을 떼면 너는 저 구석에서 이쪽으로 성큼 다가와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고는 내가 케이지 안으로 들이 민 내 손끝을 핥아주곤 했지. 이제는 그 위안을 네게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게, 나는 참 아리다.
 케이지 밖으로 내놓으면 침대 밑으로 총총 들어가서 한숨 자고 슬쩍 나오는 너. 호기심보단 겁이 많아서 큰 소리만 들리면 투다다다 도망쳐서 숨을 고르는 너. 내가 무심하게 TV만 보고 있으면 슬쩍 코 끝으로 내 손을 툭 치고는 내가 안녕 재복아? 하면 다시 쫑쫑 사라지는 너. 과일을 먹을 땐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서 결국 네게 절반 정도를 떼어주곤 했지. 빵을 먹는데 네가 답싹 달려들어서 너와 빵도 나눠 먹었지. 

 아가, 아니―사람의 나이로 치면 몇 살 이려나. 어머니와 내가 농으로 어르신 어르신 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래도 넌 내 아가. 아주 아기였을 때, 아직 네 귀가 작고 가녀릴 때 부터 너를 알아서 긴 시간을 함께했지. 근데 요즘 부쩍 너는 잠이 많아지고, 나는 그런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름을 부르기도 쿡쿡 찌르기도 해. 예전엔 귀를 쫑긋 하고 이름 부르는 것에 답하던 네가, 쿡 찔러도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단다. 괜히 더 흔들어서 네 단잠을 깨우고 말아. 그것이 미안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난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주 멀리, 오랫동안 집을 비울 때, 그 때 갔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야. 내가 널 묻어줄 수 있을 때. 아니, 그냥 가지마.

 사랑이라는 건, 이런 것 같아. 순리를 알면서도 그 순리에 어긋나는 바람을 가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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