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중국 다징산에서 가장 외지고 가장 가난한 어느 산골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세찬 물살이 가동교를 넘고, 갈지(之)자 모양의 좁은 소로를 따라 90도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다시 원통형 나무와 철사로 얼기설기 짠 사다리를 모두 오른 후에야, 필자는 말로만 듣던 ‘낭떠러지 초등학교’ ? 얼핑춘(二坪村) 초등학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20대 초반 청년인 필자는 대여섯 시간이 넘는 산행길로 이미 발에 피 멍울이 가득 생긴 상태였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저는 고개 하나를 더 넘고서 결국 말을 타고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짐을 맡기고서야 다시 힘겨운 걸음을 떼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기자생활 이래로 가장 힘겨웠던 인터뷰 중 하루로 기억되었습니다.
얼핑춘 초등학교로 향하는 길 중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사다리타기였습니다. 5미터 가량 길이의 사다리는 절벽에 완전히 붙어있어 지면과의 경사각이 90도에 달했습니다. 주위엔 붙잡거나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시설도 없는데, 발 아래는 아찔한 낭떠러지입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와중에도 돌멩이와 모래가 쉬임없이 부서져 내립니다. 위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다리 전체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세 번째 사다리를 정복하고 숨을 좀 돌리려는 찰나에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지나온 사다리보다 훨씬 가파른 사다리가 두 개나 더 기다리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낭떠러지 학교’를 처음 봤을 때는 필자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초등학교가 있다니! 철부지 아이들이 환호성으로 깊은 산 속의 적막을 깨뜨렸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장엄한 국기 게양 의식까지 거행하며 필자를 환영해주었습니다. 이 학교의 리구이린 선생님이 풍금으로 중국 국가를 연주하자 아이들이 대열을 갖추어 선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신성하게 느껴졌습니다. 학생들이 게양한 국기는 2000년에 읍내에서 사온 것이라니 벌써 9년 째 쓰고 있는 셈입니다.
이 학교는 중국 쓰촨성 량산저우의 다징산 해발 2800미터 위에 홀로 서있는 초등학교입니다. 학교 주변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고, 아래에는 세찬 물살이 일렁이는 강이 흐릅니다. 학교 근처 산등성이와 굽이굽이에는 중국 소수민족인 이족의 부락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이곳의 소수민족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학교입니다. 학생들은 등굣길마다 다섯 개의 위험천만한 사다리를 오르는데 성공해야만 교실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학교의 교사인 리구이린, 루젠펀 부부는 이곳에서 19년째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출근해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유명한 ‘문맹촌’이었던 마을을 ‘문화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2009년 2월 5일, 19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중국 cctv ‘2008 중국을 감동시킨 올해의 인물’ 시상식에 섰습니다. 리구이린씨는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저희는 평범한 산촌 교사에 불과합니다. 이 상은 마땅히 우리 ‘낭떠러지 학교’의 아이들, 그리고 다징산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빈곤지역의 낙후를 개혁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바로 교육입니다. 만약 저를 대신해 낭떠러지를 올라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면, 저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낭떠러지 학교의 전교생은 80명. 그 중 집이 낭떠러지 아래인 17명이 매일 위험천만한 사다리를 타고 등교하고 있습니다. 리구이린 부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이 안전하게 사다리를 오르내리도록 등하굣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총 40미터에 달하는 이 사다리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오릅니다.
올해 11살인 이족 소녀 아가카라는 오늘도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등지고 한 손은 등나무 줄기, 또 한 손은 리 선생님의 손에 의지해 어른도 오르기 힘겨운 사다리에 발을 디딥니다. 그의 뒤로 열 여섯 명의 꼬마친구들이 뒤따릅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두 교사는 잠시도 한 눈을 팔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지만 신기하게 안전사고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학교는 벌써 7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총 졸업생 수는 189명이나 됩니다. 낭떠러지 학교에서 배움의 빛을 얻었던 학생들은 산골 마을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표준어와 이족 방언을 모두 구사했던 리구이린 선생님은 1990년 처음으로 얼핑춘 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원래 근무했던 읍내와는 천양지차의 근무환경이었습니다. 처음 산골마을로 부임하던 날은 이미 해가 져 어둑어둑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횃불로 길을 비추고, 한 주민은 집안에 단 한 마리뿐이었던 늙은 암탉을 잡아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교사 인력이 부족해 벌써 10년 째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주민들의 문맹률은 지폐의 숫자도 식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배움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눈망울 사이에서 고민하던 리구이린씨는 결국 이 곳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부모님은 당연히 극력으로 반대했죠. 1년만 있어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이 산골짜기로 들어온 후로 열 아홉 번의 봄과 가을이 지나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무너져가는 학교 건물을 보수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 오지마을에도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 것입니다. 남편과 뜻을 함께 했던 아내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낭떠러지 학교’의 교사를 자청해 더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에 어떠한 의료, 편의 시설도 없기 때문에, 린구이린씨는 사비로 약품을 가져와 학교에 구비하기도 하고, 이발을 배워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기도 합니다.
그가 19년이나 오르내린 사다리는 과거 공포의 대상에서 지금은 일상이자 생활 습관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아찔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등나무 줄기가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아래로 굴러 떨어져 겨우 목숨을 건졌던 일도 있었고, 폭우 속에서 학생을 집에 데려다 주다가 급류에 휩쓸릴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졌던 순간을 회상하며 그는 하늘이 감동해 도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리구이린 선생님은 오지마을 교사 위치에서 벗어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약을 살 단돈 8위안을 벌기 위해 병든 아내가 위험천만한 산길을 내려가 옥수수를 팔아야만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때도 있었지만, 리씨는 교사 월급의 열 두 배를 벌 수 있는 회계사 자리, 월 6000위안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 파트너 기회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결코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낭떠러지 학교’는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리구이린씨와 몇몇 주민들이 사비를 털어 수력발전기를 구입했지만 불안정한 전압 때문에 정전되기 일쑤입니다. 두 교사 부부는 오늘날에도 남포등을 켜고 아이들의 숙제를 첨삭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42세인 리구이린씨의 월급은 겨우 800여 위안입니다. 루젠펀씨는 아직도 기간제 교사 신분으로 230위안의 월급을 받습니다. 슬하의 두 아이들은 각각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계부채는 10000위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늘어가는 빚이 아니라, 그들을 뒤이어 아이들을 계속 가르칠 선생님을 찾는 일입니다. 두 선생님은 제자들 중에서 한 명이 그들의 뒤를 이을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전 우리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될래요.” 하산하는 길, 이족 소녀 아가카라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학교에 엘리베이터를 만들 거예요. 지금처럼 힘들게 학교에 갈 필요가 없도록요.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하지만요.” “…….”
출처 http://user.qzone.qq.com/303169848/blog/1240487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