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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과 중국 관련.. 다른시선에서 바라보자..
게시물ID : sisa_481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Y.S
추천 : 1
조회수 : 35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8/05/05 23:54:02
광우병생각에 바쁘시겠지만 그래도 한번..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며 붉은 옷의 라마교 승려들이 시위를 하고 무장한 중국 경찰이 라사시를 떼 지어 돌아다니며 시위를 진압하는 장면이 연일 주류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다. 1989년 천안문사태처럼 그 희생자의 성격과 숫자가 중국 측 그리고 다른 외신측이 많은 차이를 보이며 보도되고 있다. 급기야는 한국내의 여러 단체도 티베트독립지지 선언을 하며 집회를 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도 그러하며 내가 근무하는 단체의 성격상에도 그러하듯이 아무리 적고 특수한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들과 대화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고 무장한 경찰이나 군대를 이용하여 무력진압을 하는 모습은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그 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억압받는 민중의 유일한 합법적 표현수단인 집회의 자유마저 뿌리뽑으려하는 정권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중국의 무력 진압은 잘못되었고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는 의견은 충분히 동의한다. 사진더보기 티벳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모습 ⓒ 로이터 사이트 캡쳐 하지만 여러 단체의 티베트독립 지지 성명서를 바라보며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티베트 여행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 민족이 알아서 하겠다.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한 주장에 감히 내 생각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 역시 타민족에 의하여 민족탄압을 받았던 식민지 조선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이 와서 볼 리도 없는 개인 홈페이지에 예전부터 티베트에 관한 나의 생각을 소심하게 적어 놓았고 사태를 더 멀리서 관찰해 보려했다. 하지만 연일 나오는 티베트 독립 지지 성명서의 내용을 보며 성명서의 수준이 ‘무례하다’라는 생각에 이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정보를 얻어 그런 성명서를 낸 것일까? 물론 요즘 티베트 내에 외신기자의 출입조차 통제가 된다하니 그 짧은 기간에 티베트에 현장조사를 다녀왔을 리는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그들이 얻은 정보는 주류언론의 보도와 한국에 와있는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인 정도가 아닐까한다. 내가 지지하는 어떤 단체는 “티베트인은 중국이 점령하기전의 자신만의 티베트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성명서를 내었고, 국제 연대를 중요시 한다는 어느 단체는 A4용지에 옮겨 써도 4분의 1에 못 되는 짧은 성명서를 내놓았는데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C라는 나라는 나쁘다. 근데 T라는 민족이 C에 저항하니 T는 무조건 옳다.” 추리를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편파적이며 설득력이 없다. 단체의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쓰고 있는 바에야 내 개인의 추리를 발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티베트를 방문 했었지만 나는 최소한 약간의 경험을 이용한 추리이니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여행을 통해 바라본 티베트 나는 1995년에서 2002년까지 중국의 동북지방 장춘이라는 도시에서 유학했고 방학에는 혼자서 배낭여행을 즐겼다. 사실 큰 도시는 여느 대도시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생략하고 주로 국경지대를 여행하며 소수민족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 26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운남성 등등 소위 가기 어렵다는 곳을 배낭 메고 다 다녀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다. 티베트는 2000년 여름에 다녀왔는데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이다. 사진더보기 티베트의 아낙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필자 ⓒ 김도균 2006년 티베트까지 철도가 생겼다한다. 중국은 그 큰 나라에 철도가 전국 곳곳으로 비교적잘 뻗어있는 나라인데 사실상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티베트까지 불가능해 보였던 철도를 건설한 것이다. 어쨌든 내가 여행할 당시는 청해성 꺼얼무시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 긴 시간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유독 티베트 출입 시에만 필요한 ‘외국인 허가제’상의 허가요금(당시 한화로 약 20만원)이 워낙 부담이 되어 버스기사에게 약간의 뒷돈을 주고 버스에 올라야했다. 중간 중간의 경찰 심문에 계속 긴장해야했으며 거의 다 도착해서는 워낙 고지라 심하진 않았지만 나도 남들처럼 공기가 모자라 머리가 띵해지고 두 발로 일어서기가 힘든 약간의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새벽에 라사시에 도착해 근처의 유스호스텔에 방을 잡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다음날 아침에 웅장한 티베트의 상징 포탈라궁을 비롯한 각종 티베트식 사원과 온 거리를 붉게 물들인 붉은 옷의 라마교 승려들을 보며 정말 티베트에 왔다는 생각에 뿌듯했었다. 여행에서 만난 어느 한국인이 “정말 답답하군. 중국이 점령을 해서 짱개간판이 늘어가면서 라사시가 엉망이 되어가. 저 보기 싫은 한문 간판들 다 띄어 내면 정말 보기 좋을 텐데.” 라고 말 했었는데 그 말에 동의하기가 좀 어려워지면서 내 생각이 발전된 듯하다. 사실 내가 보기엔 티베트의 수도 라사는 내가 다녀 본 어느 도시보다 문화제 보존이 훌륭하며 그 민족 방식대로 살아가는 곳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다음해에 중국국경상의 북서쪽, 티베트의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위구르의 수도 우르무치에 가보았는데, 외모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위구르족과 카자크족이 사는 곳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고층빌딩이 높이 올라가고 있는 중국의 여느 대도시와의 차이점을 찾아 볼 수가 없어 크게 실망했었다. 나의 고향인 경주와 티베트를 비교하자면 경주는 티베트에 비해 약 1%정도의 명승고적을 보존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라는 티베트의 모습대로라면 카메라의 필름이 떨어져도 못 사고, 덥다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을 가게도 없는 곳일까? 그냥 옛날 티베트의 모습? 1950년대까지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봉건사회였는데? 그 사회로 돌아가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면 경주도 골품제도가 존재하는 신라시대로 돌아가란 말일까? 우리 아버지는 “너는 경주 김 씨며 따라서 진골에 속하니 너는 자부심을 가져라”(이게 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말하곤 하는데 좋아해야하나? 가끔 주변에 조선시대로 돌아가 처첩을 거느리고 종들 부리며 살고 싶다고 농담하는 친구가 있는데 양반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누이를 양반집 첩으로 보내며 눈물을 훔쳐야 하는 종으로 태어난다고 하여도 그 말이 나올까? 티베트인답게 TV도 보지 말고, 인터넷도 하지 말고, 팝송도 듣지 말고... 승려는 승려답게 아침저녁 도나 닦고, 종은 종답게 주인님 비위 안 거스르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 한국인은 변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가능한 피해 다니기로 했다. 중국식 사회주의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냐고? 중국 사람도 비웃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에 자본가가 가입하고 있으며 그나마 TV로 중계되는 전당대회 때마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던 인터네셜가도 시대가 바뀌어 가사가 요즘 정서에 안 맞는다는 핑계로 안 튼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며 순수했던 중국공산당으로 돌아가자는 ‘신좌파 운동’이 중국 주류 지식인 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순수했던 중국공산당이란? 우리는 역사의 장면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의 완성의 순간에 레닌의 귀국 같은 정말 감명 깊은 혁명의 장면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모택동 사단이 장개석의 친미적이고 부패한 수구정당 국민당 정부에 저항하며 전 중국을 횡단하며 혁명을 완수한 ‘대장정’의 장면만큼 감명 깊은 장면도 없다고 본다. 인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 병사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하였고, 하도 부하들에게 자신의 물건을 나눠주다 보니 항상 부대 내에서 가장 지저분한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령관 주덕의 모습도 아름답다. 이들이 오지로 들어가 만난 적들은 오지까지 올 용기도 없었던 국민당의 군대가 아니라 그들을 침입자로 오인한 소수민족이었다. 외교의 달인 주은래 장군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대표를 만나 중국내부의 사정을 얘기하고 인민 해방을 위하여 자신들과 함께하길 권했고 혁명이 완수되면 자치권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보호하고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1949년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완전히 쫒아 버리고 중국은 인민해방을 실현하고 소수민족들에게 약속을 지켜나갔다. 사진더보기 전통놀이를 하고 있는 티베트의 승려들 ⓒ 김도균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93%절대다수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사실 민족의 수는 더욱 많다. 인구 2만이 못 미치는 극소수민족은 55개에서 제외시켰다. 아직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모계사회’로 살아가는 모서족이 대표적인 경우다. 1995년 중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중국이 이미 부패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은 알고 들어갔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처우를 보고 무척 감동받았다. 인구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인구조절 정책을 강하게 펼치고 있는 중국에서 한족은 남녀 구분 없이 한 아이만 출산하기를 권하는데 더 낳을 경우 그 아이에 대한 모든 복지 정책이 제한된다. 반면에 소수민족은 둘을 권한다. 티베트 민족도 중국의 소수민족에 포함 되며, 특별 취급으로 셋을 권한다고 들었는데 어디까지나 소문이라 근거는 없고 아무튼 둘 이상은 가능하다. 성, 주, 시, 군, 현 등의 행정 단위에 일정의 소수민족이 기거하면 소수민족 학교의 설립이 가능하여 자신들의 언어로 초등교육을 시키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유지하도록 한다. 실제로 한국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중국인의 신분증조차도 조선족은 한글로 티베트인은 티베트어로 표기되어있다. 혹자는 중국정부의 이러한 행동들은 단지 전시효과이며 실재로 소수민족의 위치는 아주 낮다고 하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유학하던 지역에는 조선족이 많았는데 한국인들의 진출이 많아지면서 두 언어를 동시에 잘 하는 그들의 몸값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한국에서 온 졸부 자본가들이지 중국정부가 아니다. 어느 한족 대학생 친구는 만일 자신이 소수민족 비하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 공산당에서 비판을 받고 찍히게 된다고 말했는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도시에선 이웃이 소수민족인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구소련의 소수민족 정책과 비교하면 중국의 소수민족은 더욱 빛난다. 마침 나와 함께 언어연수를 하던 친구 중에서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는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인의 혼혈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몰랐다. 이유를 묻자 그 친구는 “나 같은 고려인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사람도 러시아어 밖에 몰라서 정부가 골치를 썩고 있어. 다 그 놈의 스탈린 때문이야.” 그렇다. 소련은 자국에 편입된 소수민족에게 소련어만 써야한다는 소수민족 탄압 정책을 썼던 것이다. 티베트인은 다른 중국 소수민족과 다른 특성이 있다? 모든 소수민족들은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심지어는 인구가 소수민족 중 두 번째로 많은 회족(回族)은(첫 번째는 티베트인이다)사실 한족이다. 따라서 자신들 고유어가 없고 한어(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국어)를 사용하는데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종교적 신념으로 자신들과 한족과의 차이점을 두고 있기에 회족이 되었다. 조선족 같은 경우도 특이하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의 후손이 많은데 해방이 되었으나 남측 이승만 정권에선 그들을 송환할 생각도 안했고, 북측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못했다. 남측의 진보적인 민족단체도 북측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지 중국에서 온 조선족은 같은 동포라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말하기를 외면하고 있다. 그런 애물단지를 거둬준 것은 중국이었다. 개인적으로 제발 그들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애족심,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을 하지마라. 내가 조선족이라도 난 중국을 더 사랑하겠다. 위에서 말한 회족처럼 종교와 민족을 따로 생각 할 수 없는 민족도 많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더 이상 회족이 아니며 위구르족이나 카자크족도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이며 티베트인은 대부분 라마교인 이다. 운남성에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26개 소수민족들은 중국에 감사하고 있는 민족들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각종 차이로 서로 싸우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민족 자체의 존립이 위기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중국은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주며 관광사업을 발전시켜 ‘안정적으로 먹고 살게’만들어 주었다. 그들에게 민족 자치권은 중요하니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사진더보기 티베트의 어린이 ⓒ 김도균 침략이냐, 인민해방이냐? 티베트는 어떤 나라였는가? 1950년대까지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제정일치’의 봉건제 국가였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죽어야하는 사회였다. 흔히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하며 20세기 초까지 놀랍게도 농노제가 있었던 사회라 혁명의 당위성을 얘기하는데 티베트는 어떠한가? 1950년대 까지 노예제가 존재했다. 이미 거의 모든 인류가 청동기 시대들어 분리된 종교와 정치가 분립이 안 된 제정일치 사회로 말이다. 미국의 진보적 평론가 마이클 파렌티의<낯익은 봉건주의>를 보면 그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티베트의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이다. 기득권층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처단하는 것은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목격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러했고, 미국에서 메카시 의원이 그러했고, 한국의 박정희가 그러했다. 티베트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달라이라마의 취임식에 경호부대까지 파견했던 중국정부, 그리고 인민해방을 막 완수한 인민해방군들은 그 사회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장 개혁이 필요한 사회라 생각했을 것이 확실했고 혁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혁명이 시작되었고 그 혁명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은 노예를 비롯한 기층민중이요, 반대를 한 것은 귀족과 승려들이었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혁명은 티베트의 민중 스스로가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만일 선배 혁명가인 중국이 도와준 것이라면 혁명이 성공했으니 티베트에서 철수를 해야지 왜 아직도 남아서 티베트인의 권리를 침해 하냐고 반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티베트의 중국 편입 역사는 14세기 원나라에서부터 시작된다. 티베트를 원나라의 영토로 편입시킨 쿠빌라이칸은 라마교의 매력에 흠뻑 빠져 심취하기에 이른다. 북경 주변의 승덕시(承德市)에 현재에도 존재하는 소형 포달라궁은 당시에 지어진 것인데 거기에 라마승을 모시고 예불을 드렸고 라마교를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원 왕조는 나중에 라마교의 도를 깨친 젊은 신도를 ‘달라이라마’라는 별정직으로 임명하여 티베트 본토인 성지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한다. 즉 달라이 라마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이며 원나라가 만든 별정직 직책이다. 재미있게도 몽고족이 세운 나라인 원이 한족 청년을 초대 달라이라마로 임명했다. 티베트는 마치 삼한시대의 소도처럼 신성한 “종교특별지구”로 취급받으며 종교행사에 전념하면 되었다. 달라이라마와 티베트는 원의 황제에게는 영적인 만족감을 제공하였고, 원은 티베트에게 무력을 지원하여 티베트를 지켜주었다. 원이 망하고 다른 왕조가 들어섰을 때에도 그 전통은 유지되었으며 따라서 중국도 그 전통에 따라 새 달라이 라마 취임식에 호위군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나치의 협력자 하인리이 힐러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브래드 피트가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티베트에서의 7년>의 상황과는 다르다. 최소한 당시 중국인의 의식에 있어서 티베트를 중국이 침략했다는 것은 절대 성립이 안 된다. 중국은 구소련이 동유럽을 침략 할 때 가장 강력한 항의를 했던 나라인데 아무리 중국이 마구 잡이로 우기기 좋아하는 나라라 해도 뭐 뭍은 개가 뭐 뭍은 개 나무라듯 그렇게까지 막 나가겠는가? 티베트는 봉건 왕조의 지원을 받으며 안에서 봉건제도를 유지 할 수 있었지만 사회주의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현재까지도 개최 되고 있는 중국의 종교 지도자 회의에 참가했다가 자신이 라마교의 지도자라는 것은 인정받았지만 서장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티베트의 중국 명칭.)의 정치지도자가 아님을 알고 돌아오자마자 인도로 망명한다. 당시 15세였던 달라이 라마의 개인의지였는지 주변 귀족과 승려의 판단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달라이 라마의 요구는 현재까지도 제정일치의 티베트 전통의 유지를 바라며 유연한 자치제도를 도입하라고 말하고 있지 완전독립 요구가 아니다. 왜 하필 티베트인가? 배낭여행을 하면서 즐거운 점의 하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배낭여행족을 만나면서 각자의 다른 점을 느끼고 맞춰 나가는 것이다. 크게 나누어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점을 많이 느끼는데 대표적인 차이점으로는 일반적인 동양인 들은 주변에서 많이 접해서 그런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불교에 관한 환상을 서양인들이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신봉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항상 전쟁을 하지만 정말 평화적인 종교는 불교밖에 없는 듯하다.”라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조계종 스님들끼리 싸우는 것 구경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튼 자신들이 많이 접하지 못한 불교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신비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주변에도 “유리의 성”운운하며 프랑스 왕조나 러시아 왕조의 왕실 모습을 동경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 두 왕조가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다가 혁명으로 끝장난 왕조라는 것을 잠시 망각한 채. 프리 티베트를 외치는 사람이 마치 서양 사람만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사실 달라이 라마는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또한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고 프리티베트를 외치는 많은 서양인 들이 이런 막연한 환상에 기댄 자의적인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를 해본다. 사진더보기 티벳인들의 가장 일반적인 장례방식인 조장. 조장은 육신을 토막내고 뼈는 짓빻아 짬파(볶은 보리가루)에 버무려 지정된 높은 장소에서 새가 먹을 수 있도록 던져주는 것이다. ⓒ 김도균 하나의 예로 티베트 습관 중 “조장”이라는 장례 습관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친척들이 시체를 매고 산에 올라가 시체를 독수리가 먹기 좋도록 빻아놓으면 옆에서 기다리던 독수리가 와서 시체를 먹어치우도록 하는 장례습관이다. 이 습관은 실제로 섬보다 더 고립된 티베트의 지형 상 필연적으로 생긴 습관이다. 고도가 높아 만년설에 쌓인 티베트의 땅에서 매장이 어렵고, 나무가 없으니 화장도 어려우며, 바다가 머니 수장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모든 습관은 처절한 이유로 시작되는 것인데, 소위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티베트는 다 좋은데 장례습관이(자신의 눈으로 보기에)잔인하니 없애달라고 달라이 라마에게 항의 서한을 많이 쓴다고 한다니 이 얼마나 자의적인 해석인가! 이들이 프리티벳을 외치며 내세우는 것이 ‘인권문제’라면, 티베트만큼이나 독립을 외쳤고, 티베트 이상으로 싸웠으며, 사막지대인 탓에 철도가 빨리 놓여 탄압자체가 더 쉬웠기 때문에 더 많은 탄압을 당했을 티베트의 바로 북쪽의 위구르에 대해서는 왜 ‘프리 위구르’를 외쳐주지 않는가? 나는 티베트와 위구르를 다 여행한 이후 두 지역을 비교하기를 좋아하는데 사실 사람들은 위구르 사람들이 더 좋았다.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에 서글서글한 인상과 말투. 어느 마부가 나에게 마차 값을 바가지 씌우려하길래 마차 값을 알고 있다고 하니까 “헤헤헤, 알면서 묻긴 왜 물어? 어서 타!”라고 너스레를 떤다. 서양 사람들이 이렇게 유쾌한 사람들에겐 왜 관심이 없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서양 사람들이 불교에는 무조건적인 신비감이 있으면서도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무시한다. 이스라엘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점령하고 그곳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며 중동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의 우방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유대인은 훌륭한 민족이며 이슬람교도들은 지저분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배우면서 자랐다. 나중에 자라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통들을 자신들을 한 번도 괴롭힌 적 없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분풀이 했으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을 무조건 열등하다고 밀어붙인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이 있고, 티베트의 배후에도 미국이 있다. 달라이라마가 CIA에서 자금을 지원 받는다는 것은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도 인정한 사실이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경쟁상대가 없어진 미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는 중국이라고 본다면 중국에 대한 견제는 어찌 보면 당연한 행위 아닌가. 따라서 달라이라마는 자의건 타의건 미국의 대 중국 견제수단의 하나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더군다나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침략적인 행위를 많이 하는 미국이 툭하면 중국의 인권 운운 하는 것도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중국에 비해 인권사항이 그리 낳을 것도 없는 말 잘 듣는 한국에는 아무런 말도 안 하지 않으면서. 글을 마치며 티베트에 관한 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두서없이 길게 써 버렸다는 사실이 창피하며, 워낙 글 솜씨가 없는 탓에 마치 다른 단체의 입장과 반대로 “티베트는 다 나쁘고, 중국은 다 좋다.”는 입장처럼 쓴 것이 아닌지가 가장 걱정스럽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내 입장을 정리 하며 글을 마치려한다. “2008년 티베트인의 시위는 일정정도 기존 특권층의 ‘자리 되찾기’운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일제시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땅과 부를 축적한 자들이 해방이 되고 북의 토지개혁에 토지가 압수된 뒤 남으로 건너와 열렬한 반공투사가 되었듯이. 하지만 나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정부의 무력 진압은 잘못된 것이므로 중국은 무조건 나쁘고 티베트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역시 맞지 않다. 실제로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지나친 폭력진압으로 인명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중국에 요구해야 할 정도이다. 그러면서 더욱 냉철한 시선으로 시간을 두고 연구 관찰 할 단계이다. 만일 내 입장과 다르게 티베트의 모든 민중이 ‘민주 티베트 공화국’건립을 위해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한다면 나 한사람만이 망신을 당하면 끝이지만, 이 시위가 봉건제 복귀를 요구하는 특수계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시위라면 성명서를 발표한 단체들은 그래도 티베트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 이 기사는 본지 편집진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편집자주 기사입력 : 2008-04-07 11:43:14 최종편집 : 2008-04-07 18:41:17 ⓒ민중의소리 -------------------------------------------------------------------------------- 用 Windows Live Spaces 展示个性自我,与好友分享生活! 了解更多信息! ※ 편지내용이 잘 안보이시면 '원문보기'를 눌러서 보시기 바랍니다. 브라우저에서 해당 언어의 인코딩을 지원해야 합니다. 원문보기 언어종류: utf-8 Content-Type: text/html <style> .hmmessage P { margin:0px; padding:0px } body.hmmessage { FONT-SIZE: 9pt; FONT-FAMILY:Tahoma } </style>

티베트 독립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나

[기고] 티베트 사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김도균(전국빈민연합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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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며 붉은 옷의 라마교 승려들이 시위를 하고 무장한 중국 경찰이 라사시를 떼 지어 돌아다니며 시위를 진압하는 장면이 연일 주류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다. 1989년 천안문사태처럼 그 희생자의 성격과 숫자가 중국 측 그리고 다른 외신측이 많은 차이를 보이며 보도되고 있다. 급기야는 한국내의 여러 단체도 티베트독립지지 선언을 하며 집회를 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도 그러하며 내가 근무하는 단체의 성격상에도 그러하듯이 아무리 적고 특수한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들과 대화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고 무장한 경찰이나 군대를 이용하여 무력진압을 하는 모습은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현재 한국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그 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억압받는 민중의 유일한 합법적 표현수단인 집회의 자유마저 뿌리뽑으려하는 정권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중국의 무력 진압은 잘못되었고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는 의견은 충분히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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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모습

ⓒ 로이터 사이트 캡쳐

 

하지만 여러 단체의 티베트독립 지지 성명서를 바라보며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티베트 여행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문제는 우리 민족이 알아서 하겠다.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한 주장에 감히 내 생각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 역시 타민족에 의하여 민족탄압을 받았던 식민지 조선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이 와서 볼 리도 없는 개인 홈페이지에 예전부터 티베트에 관한 나의 생각을 소심하게 적어 놓았고 사태를 더 멀리서 관찰해 보려했다. 하지만 연일 나오는 티베트 독립 지지 성명서의 내용을 보며 성명서의 수준이 ‘무례하다’라는 생각에 이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정보를 얻어 그런 성명서를 낸 것일까? 물론 요즘 티베트 내에 외신기자의 출입조차 통제가 된다하니 그 짧은 기간에 티베트에 현장조사를 다녀왔을 리는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그들이 얻은 정보는 주류언론의 보도와 한국에 와있는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인 정도가 아닐까한다.

내가 지지하는 어떤 단체는 “티베트인은 중국이 점령하기전의 자신만의 티베트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성명서를 내었고, 국제 연대를 중요시 한다는 어느 단체는 A4용지에 옮겨 써도 4분의 1에 못 되는 짧은 성명서를 내놓았는데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C라는 나라는 나쁘다. 근데 T라는 민족이 C에 저항하니 T는 무조건 옳다.” 추리를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편파적이며 설득력이 없다. 단체의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쓰고 있는 바에야 내 개인의 추리를 발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티베트를 방문 했었지만 나는 최소한 약간의 경험을 이용한 추리이니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여행을 통해 바라본 티베트

나는 1995년에서 2002년까지 중국의 동북지방 장춘이라는 도시에서 유학했고 방학에는 혼자서 배낭여행을 즐겼다. 사실 큰 도시는 여느 대도시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 생략하고 주로 국경지대를 여행하며 소수민족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 26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운남성 등등 소위 가기 어렵다는 곳을 배낭 메고 다 다녀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다. 티베트는 2000년 여름에 다녀왔는데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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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아낙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필자

ⓒ 김도균

 


2006
년 티베트까지 철도가 생겼다한다. 중국은 그 큰 나라에 철도가 전국 곳곳으로 비교적잘 뻗어있는 나라인데 사실상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티베트까지 불가능해 보였던 철도를 건설한 것이다. 어쨌든 내가 여행할 당시는 청해성 꺼얼무시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 긴 시간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유독 티베트 출입 시에만 필요한 ‘외국인 허가제’상의 허가요금(당시 한화로 약 20만원)이 워낙 부담이 되어 버스기사에게 약간의 뒷돈을 주고 버스에 올라야했다. 중간 중간의 경찰 심문에 계속 긴장해야했으며 거의 다 도착해서는 워낙 고지라 심하진 않았지만 나도 남들처럼 공기가 모자라 머리가 띵해지고 두 발로 일어서기가 힘든 약간의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새벽에 라사시에 도착해 근처의 유스호스텔에 방을 잡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다음날 아침에 웅장한 티베트의 상징 포탈라궁을 비롯한 각종 티베트식 사원과 온 거리를 붉게 물들인 붉은 옷의 라마교 승려들을 보며 정말 티베트에 왔다는 생각에 뿌듯했었다.

여행에서 만난 어느 한국인이 “정말 답답하군. 중국이 점령을 해서 짱개간판이 늘어가면서 라사시가 엉망이 되어가. 저 보기 싫은 한문 간판들 다 띄어 내면 정말 보기 좋을 텐데.” 라고 말 했었는데 그 말에 동의하기가 좀 어려워지면서 내 생각이 발전된 듯하다.

사실 내가 보기엔 티베트의 수도 라사는 내가 다녀 본 어느 도시보다 문화제 보존이 훌륭하며 그 민족 방식대로 살아가는 곳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다음해에 중국국경상의 북서쪽, 티베트의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위구르의 수도 우르무치에 가보았는데, 외모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위구르족과 카자크족이 사는 곳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고층빌딩이 높이 올라가고 있는 중국의 여느 대도시와의 차이점을 찾아 볼 수가 없어 크게 실망했었다. 나의 고향인 경주와 티베트를 비교하자면 경주는 티베트에 비해 약 1%정도의 명승고적을 보존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바라는 티베트의 모습대로라면 카메라의 필름이 떨어져도 못 사고, 덥다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을 가게도 없는 곳일까? 그냥 옛날 티베트의 모습? 1950년대까지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봉건사회였는데? 그 사회로 돌아가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다면 경주도 골품제도가 존재하는 신라시대로 돌아가란 말일까? 우리 아버지는 “너는 경주 김 씨며 따라서 진골에 속하니 너는 자부심을 가져라”(이게 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말하곤 하는데 좋아해야하나? 가끔 주변에 조선시대로 돌아가 처첩을 거느리고 종들 부리며 살고 싶다고 농담하는 친구가 있는데 양반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누이를 양반집 첩으로 보내며 눈물을 훔쳐야 하는 종으로 태어난다고 하여도 그 말이 나올까?

티베트인답게 TV도 보지 말고, 인터넷도 하지 말고, 팝송도 듣지 말고... 승려는 승려답게 아침저녁 도나 닦고, 종은 종답게 주인님 비위 안 거스르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 한국인은 변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가능한 피해 다니기로 했다.

중국식 사회주의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냐고? 중국 사람도 비웃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에 자본가가 가입하고 있으며 그나마 TV로 중계되는 전당대회 때마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던 인터네셜가도 시대가 바뀌어 가사가 요즘 정서에 안 맞는다는 핑계로 안 튼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며 순수했던 중국공산당으로 돌아가자는 ‘신좌파 운동’이 중국 주류 지식인 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순수했던 중국공산당이란? 우리는 역사의 장면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의 완성의 순간에 레닌의 귀국 같은 정말 감명 깊은 혁명의 장면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모택동 사단이 장개석의 친미적이고 부패한 수구정당 국민당 정부에 저항하며 전 중국을 횡단하며 혁명을 완수한 ‘대장정’의 장면만큼 감명 깊은 장면도 없다고 본다. 인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 병사에 대한 처벌 규정이 강하였고, 하도 부하들에게 자신의 물건을 나눠주다 보니 항상 부대 내에서 가장 지저분한 모습으로 있었다는 사령관 주덕의 모습도 아름답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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