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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도 수학여행금지가 있었군요
게시물ID : sisa_5345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태산발호미
추천 : 1
조회수 : 125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04 02:15:02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 19분에 
충남 아산시 배방읍 장항선 모산역(현 배방역) 근처 건널목을 건너려던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들을 태운 수학여행 버스가 특급열차(통일호)와 충돌한 사고. 
인명피해는 사망 46명, 중상 29명. 

 당시 서울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으로 현충사를 방문하고 귀경길에 오른 상태였다. 수학여행 중이던 경서중학교 3학년은 9개반 475명에 교사가 11명 이었고, 총 7대의 관광버스에 나눠타고 이동했다. 이 중 3반과 4반을 합해 76명을 태운 (당시)서울 연흥관광 소속(서울05 7358호) 관광버스가 이내건널목을 건너고 있을 때, 달려오던 특급열차가 버스의 측면을 들이받아 80m 가량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연료통에 화재가 발생했고, 버스는 그대로 전소했다.  

이 사고로 운전자 및 학생 45명(3반 30명, 4반 15명)이 사망했고, 차장과 학생 29명(3반 14명, 4반 15명)이 중상을 입었다. 즉, 다치지 않은 이는 단 2명 뿐이었던 것. 생존한 학생들은 충돌시 차 밖으로 튕겨나갔거나, 화재가 늦게 번진 뒷좌석에 탑승했던 탓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경우이며, 그나마도 인근주민들이 돕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더욱 증가했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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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산 수학여행 참사의 회생학생 45명의 장례가 쓸쓸히 치러지던 1970년 10월 17일 또다시 대한민국에게 충격을 안겨다준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서울 청량리발 부산 부전행 제77호 여객열차가 원주역 2km 지점에 있는 삼광터널에서 충북 제천발 청량리행 1508호 화물열차와 충돌하여 타고 있던 인창고등학교 소속 교감1명 교사1명 전속 사진사 1명 및 학생10명 그리고 검표원 1명 사망하고 49명 부상(전부 인창고교 학생)당했다. 

당시의 사고 기사  이 사건 역시 수학여행 가던 도중에 일어난 사고라서, 한동안 전국적으로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었다.  

단선에서 열차가 서로 충돌했다고 하는 것은 폐색구간에 열차가 2대가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신호체계문제가 지목되었다. 당시 중앙선은 CTC를 69년에 도입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시 원주역 신호기가 고장이 나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수동조작으로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원주역에 대기중인 77호 열차를 출발시키고 반대편에서 오던 1508호 화물열차를 유교역(무인 교행역)대기선에서 출발하지 못하도록 신호를 붉은색으로 선로전환기는 본선으로 부터 폐쇄(분리)했어야 했지만 선로전환기는 본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77호 여객열차를 수동으로 신호를 무시하고 출발시켰는데 출발 직후 지휘소에서는 유교역에서 화물열차가 이미 출발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당시 열차와 통신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원주터널의 커브에서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 대형참사를 일으켰다.  따라서 사고원인은 원주역 CTC의 고장과 유교역 선로교환기 조작, 신호를 무시한 화물열차에 집중되었다. 결국 검찰은 CTC 보수책임자와 조종책임자 그리고 화물열차 기관사를 각각 과실치상혐의로 기소하게 된다. 즉 비록 CTC의 고장이 원인이나 근무자들의 실수로 인해 사고가 발생한 인재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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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 13일 1970년에 수많은 학생들이 산화했던 모산 수학여행 참사와 원주터널 열차 충돌사고의 1주년이 불과 며칠을 남겨둔 이날에 또 한번 대한민국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전라북도 남원역 구내에서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232명과 통학생과 시민들을 태운 순천발 용산행 192호 보통열차가 남원역 출발후 1.5km 지점에서 기관차 출력부족으로 언덕에서 멈춘뒤 후진하여 후발열차로 대기중인 유조화물열차를 (역)추돌하여 9번 8번 7번 객차가 탈선되고 특히 7호 객차가 8호객차를 반쯤 짓이겨 8호객차에 탑승한 어린이들이 참변을 당했다. 

이 사고로 인해 국민학생(초등생)15명, 고교생 3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이후 후송된 중상자가 사망해 22명 사망으로 늘어난다.)

192호 보통열차가 남원역에서 6시 40분에 출발후 7시 16분 후발 유조화물열차가 진입해 정거중이었다. 이때 선행 192호 보통열차에서 무전으로 기관차의 기관고장으로 구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게된다. 이후 직원들은 유조화물열차의 기관차를 유조탱크와 분리하려는 찰나 보통열차의 기관차의 제동장치가 풀려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해 남원역으로 돌진 유조화물열차와 뒤로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때 열차 충돌시 발생하는 타오르기 현상으로 7호차가 8호차를 타고올라 객실의 1/3이상을 뭉개버려 인명피해가 커져버렸다.

 당연하게도 기관차가 기관고장으로(혹은 추력부족으로) 오르막길을 오르지 못하고 제동을 건상태로 버티다가 제동이 풀려(압축된 공기가 모두 풀려서 제동장치가 풀림) 그대로 중력에 의해 뒤로 밀려 나아갔고 후속 열차에 그대로 추돌한것이다. 지금의 기관차들의 성능이 좋아 이같은 현상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열차라면, 선로가 언덕을 올라갈시 언제든지 발생할수 있는 기초적인 사고유형중 하나였다. 이런 사고의 경우, 다른 기관차를 동원해 구원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번 사고는 구원하기도 전에 이미 열차가 떠난 셈이다.  따라서 이런 사고를 대비하여 열차바퀴에 침목을 대어 제동의 힘을 보강하고(자동차와 같다) 역에서는 열차가 뒤로 미끄러져 내려올 것을 대비해 선로를 비워두어(혹은 선로전환기를 작동시켜서) 추돌을 방지하고 열차를 세울 방법을 꾀하여야 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고유형에 대한 기초적인 대비책이었지만 이 사고에서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언론사는 다음과 같은 기사제목을 썼다. 남원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돌 하나만 괴었어도... 

 당시 사고 기관차는 6000호대 디젤기관차로, 1963년도에 도입한 나름 신형이였고 9량쯤은 너끈히 끌 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고당시에는 오일펌프 고장으로 멈춘거라 한다. 
그러나 제동하여 대기중 에어브레이크에 압축공기 조작을 했어야 하는 기관사의 능력부족으로 제동을 유지못하고 열차가 밀린것으로 조사된다. 이 때문에 경력이 모자란 신참 기관사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따랐다.


   출처 : 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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