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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한 남자.
게시물ID : humorbest_5351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신은없다.
추천 : 35
조회수 : 4869회
댓글수 : 1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9/27 12:13:12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9/26 17:52:02

어렸을 적 기억에 우리집은 매우 부유했다.


다만 내가 쓰러졌고, 입원해있는동안 내 옆 침대의 누나, 그리고 동생이 다음날 놀자는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고


곧 그들의 부모님의 손에 들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내 병원 생활이 길어 질수록 방 5칸짜리 집에서 3칸으로 2칸으로 1칸으로 점점 더 작아 지는 것을 느꼇을 때쯤


내 나이는 8살이 되었다.


8살까지의 인생중 6년을 병원에 있던 난 지금 27살이 되어서도 아직 내 병명이 뭐였는지 모른다.


9살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은 작은 식당을 하시게되었고


첫날 회사중견직이셨던 아버지는 그날 술을 많이 드셨다.


그리고 매일 밤 찾아오는 공포와 고통...


평소엔 말이 별로 없던분이 술을 드신 후 말이 많아 진다. 그게 새벽4시건 5시건 하시는 말을 무릎 꿇고


들어야했다. 물론 졸면 주먹이 날라오곤 했다.


10살... 처음으로 술먹은 아버지께 대들었다.


너무, 너무 졸렸다.


자고싶다 말했다. 주먹이 날라온다. 의자가 날라온다. 기절했다.


다음 날 몸 전체 붕대를 감고 있는 날 보았다.


인대가 끊어지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


그러고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왔다.


11살이 되었을때 아버지께선 결핵에 걸리셨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많이 울었다.


결국 완치 되셨지만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


혼자 하시다가 망했다.


다만 그렇게 아프셨던 이유때문인가 아버지께선 술과 담배를 끊으셨다.


13살 가장 행복했다. 몸도 마음도 모든것이 편했다. 다시금 가정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열심히 공부했고 처음으로 학원도 다녔다.


14살 중학생이 되었다.


학교에선 나름 상위권의 성적을 얻었고 기뻐하는 부모님을 보며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5살 절망의 시작.. 아버지께서 술을 드셨다.


그리곤 찾아오는 훈계시간... 중학교는 당시 경사가 매우 심했었다. 그런곳을 다리를 절며 결국 갔다.


이후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큰고모 댁으로 보내졌다.


아마 본인의 의사는 없었다.


이때 고등학생이 된 누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준비물비가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두번째 요구엔 인색하셨다.


학원을 다녀오면 항상 누나가 참고서비며 명목으로 이미 아버지께 돈을 타간 상태였고,


그다음 내가 달라하면 없다며 알아서 하라했다.


그 다음날 학교를 안갔다. 길거리를 방황했고 담배에 손을 댔다.


이 모든것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날.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할정도로 맞은 것 같다.


16살이 되었을 때


애들이 같은 동급생 애들을 때리며 즐거워 하는걸 보고 눈이 뒤집혔다.


뭣도 모르고 그냥 달려들었다 맞는거라면 이미 도가튼 상태,  무섭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중에는 아무도 내앞에선 애들을 때리진 않았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진학...


매우 망설였다. 성적은 좋았으나 학비가 없었다.


결국 제일 싸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17살... 기숙사는 미리 신청했어야 가능했고 그따위 학교를 들어갔다는 이유로 학비또한 한푼도 주지 않았다.


다행히 교복은 학교에서 줬다.


처음으로 애들에게 삥을 뜯었다. 점점 삐뚤어 지기 시작했고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서울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결국 자퇴했다.


이 일을 아신 아버지는 온갖 욕과 손찌검을 하셨고 참지 못한 나는 아버지를 밀쳐내고 집을 나왔다.


집과 연락을 끊고 친구집과 후배집을 오가며 자는 것도 하루 이틀...결국 추운 겨울 길바닦에서


박스를 주워 그안에서 잤다.


그러다 주민신고로 파출소에 잡혀가게되었고 어머니가 오셔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날 어머니는 울산에 있는 외삼촌께 날 보냈고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무대만드는 회사이고 반은 노가다였지만 그냥 좋았다.


전국을 돌아다녔고 돈도 벌수있고 무엇보다 먹고싶은걸 다 먹을 수 있었다.


18살이 되었을때 검정고시를 쳤다. 다행이 턱걸이로 합격했고 고졸이되었다.


작은 원룸을 얻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게임을 하다 오토를 알게되었다.


그렇게 원룸은 작업장이 되었고 먹는곳에만 쓰기에 벅찰 돈을 벌었다.


좋은 옷을 입고 매일 술과 여자에 찌들여 살았다.


그리고 결국 이혼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3년동안 모은 돈 한푼 없이 쓰던중 영장이 날라왔다.


모든 것을 처분했고 천만원 남짓 남았다.


아버지에게 맞아 40대 초반에 틀니를 하고 계신 어머님이 생각나 통장채 드리고


훈련소로 떠났다.


의외로 군대는 체질에 맞았다.


어렸을 적 해병대를 나왔다며 자부심 넘치는 아버지와의 생활 덕분인듯 했다.


23살 ...전역했을때,


남들 처럼 다시 갈 학교도, 만날 친구도 없었다.


돈으로 사귄 사람은 돈이 없는 군대 생활동안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수중에 있는 5만원. 경기도에 있는 물류센터에 취직이 됐다.


회사에서 제공되는 라면한끼 그걸로 한달을 버텼다.


회식이라도 하는 날엔 누가 말 붙일까 눈치 보며 고기만 먹었다.


그리고 첫 월급,


일주일에 한번 쉬는 날을 배정받을 수 있어서 이주 동안 안쉬고 일해 2일을 배정받아 부산 어머니께 갔다.


백화점에서 옷 한벌을 샀고 내가 한달 생활할 수 있는 돈만 남기고 모두 봉투에 담아 드렸다. 뿌듯했다.


회사에서 진급이야기가 나올 때 쯤 내가 타고있던 지게차를 5톤 트럭이 박았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고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 트럭 운전기사도 오지 않았다.


산재 또한 적용되지 않아 병원비도 내 돈으로 냈고


팀장이란 사람은 입원해있고 치료될때까지 출근한걸로 쳐줄테니 그냥 가만히 치료나 하라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오니 누나도 함께 살고있었다.


누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할 당시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아버지께 붙어있었다.


그리고 졸업후 바로 어머니께와서 함께 살고있었고 우리 3명이서 한집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27살...


내가 원하던 일을 시작했으나 이 회사는


내가 원하고 생각했던 그런 회사랑은 달랐다.


일하며 스트레스로 이마에 대상포진이 왔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온다.


회사 출근할 수 있으면 와서 전산좀 처리해 달라고했다.


전산 업무쯤이야 괜찮을것 같아서 아픈 몸으로 갔다.


출근후 한시간도 안되 현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하는 걸 사진 찍어야 된다며 서있게 했다.


8월 그 땡볕아래 그늘 한점 없는 곳에서 6시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돌아간 사무실에서 나에게 전산좀 해달라며 오게해놓고 나가서 일시킨 그 과장은 여유롭게 하루종일 무슨 차를


살까를 고민했다는 소릴 듣고 그저 그냥 웃었다.


덕분에 터진 수포자리만 아직도 까맣다.


그래도 이 악물고 버텼고 이번 연말에는 어느 정도 모일 돈을 예상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내년이면 월급도 오르고 조금 더 여유있게 돈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참자고 그렇게 버텼는데...


회사가 부도났다.


추석전... 임금 또안 묶여있는 지금.


어느덧 나이는 27살... 고졸 학력으로 일자리를 찾아본다. 없다.


나이가 되면 학력이 막히고 학력이되면 나이가 막힌다.


설자리가 없다...


이렇게 써보니 나도 참 많은 일을 겪었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었고 그저 평범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늘이 운명이 그리고 망할 무언가가 그렇게 하지 말란다.


그냥... 막막하다... 모든걸 내려 놓고 싶다...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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