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엔씨가 밸브를 인수하려고 논의했다는 기사가 뜨네요...
이 소식을 들으니 (물론 저렇게 설레발들 쳐봐야 가능성은 한없이 낮겠지만) 오후의 식곤증이 싹 달아날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절대로 저런 일은 일어나선 안된다고 봅니다...
먼저 이게 단순히 어떤 기업(그것도 우리나라 기업)이 다른 기업(그것도 외국기업)을 인수하려 시도하는 일이다...라고 쉽게 볼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기 위해, 밸브와 스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네요.
밸브는 세계 최정상급 게임 제작사입니다.
하프라이프로 시작해 하프라이프2(하프 2 에피소드1,2)는 이 회사의 대표작이자 게임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히트작이며,
카스, 팀포 시리즈, 포탈 시리즈, 레포데 시리즈 등등 내놓는 게임 마다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은 명 제작사이죠.
동시에 밸브는 세계 최대의 PC게임 온라인 마켓인 스팀을 서비스 중인 게임 유통사이기도 합니다.
스팀은 온라인 마켓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우리나라에선 환율차이 때문에 패키지 값보다 더 비싼 상황이 나오고 있지만...)과, 내가 보유한 게임들을 쉽게 관리할 수 있고 원활한 멀티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크게 성공했죠.
스팀에 대해 설명하자면, 패키지 게임의 고전적 판매 방식에는 이걸 CD나 DVD에 담고, 그걸 패키지로 예쁘게 포장한 후, 전세계 각지의 판매처로 운송을 하고, 재고를 쌓아두고 관리해야 하며, 홍보를 위해 쏟는 비용도 막대하게 들어가죠. 허나 스팀이나 오리진 같은 온라인 마켓에서의 판매는 이런 비용들을 모두 아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어차피 게임은 디지털 컨텐츠 상품이기에 굳이 CD나 DVD, 롬팩 같은 디스크에 담아서 팔 필요 없이 온라인에서 바로 결제하고 내려받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게임을 온라인에서 판매할 경우 이러한 부수적인 비용을 아낀 것을 바탕으로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예외.. 환율 때문에 더 비쌈ㅠㅠ) 이 방식의 또다른 장점은, 위에 말한 전통적인 오프라인 판매 방식은 거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들 때문에 이미 어느정도 자본을 갖춘 이들만이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었습니다. 군소 게임 제작사가 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좋은 게임을 만들었다 해도 판매를 위한 기본 자본 마련을 위해 자기 돈을 투자하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투자를 받아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죠. 스팀 같은 온라인 마켓은 이런 군소 게임 제작사, 제작자들이 만든 인디게임을 좀 더 손쉽게 유저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습니다. 스팀에 올려두고, 팔린만큼만 수수료를 떼고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이기에 팔릴지 안 팔릴지도 모르는 게임을 위해 불안한 투자를 해야할 위험이 없죠. 밸브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팀을 통해 수많은 인디 게임들을 발굴해 내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재능있는 개발자와 개발사가 손쉽게 게임을 만들어 고객과 만나고, 게임업계는 그만큼 새로운 인재와 창의력을 공급받는 윈-윈 게임이죠.
온라인 마켓은 게임 홍보에도 유리한 점을 가집니다. 오프라인 홍보에 비해 훨씬 저렴하게, 그냥 마켓에 게임을 올려둔 것 만으로도 그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노출이 되니까요. 밸브는 이에 더해 주기적으로 할인행사를 연다거나, 이미 고정 유저층을 확보한 다른 히트 게임과 연계한 프로모션을 연다거나 하는 식으로 유효한 홍보수단을 만들어줬습니다. 발매된지 꽤 오래 지났지만 여전히 막강한 팬층과 동접수를 자랑하는 팀포트리스2의 경우에는 이미 게임을 무료화(부분 유료화..이지만 실제 게임 플레이는 유료 유저/무료 유저간 밸런스 차이가 없음) 해 두었는데요, (사족을 달자면, 물론 캐시를 받고 판매하는 아이템들은 100% 모두 다 게임 밸런스와 무관한 아이템들이죠) 그 중에서 장신구로 사용되는 모자류 아이템들은 종종 새로 발매되는 중소규모 게임들과(가끔씩은 대형 게임들도) 연계된 프로모션을 짜기도 합니다. 그 게임을 사면 팀포에서 그 게임과 관련된 디자인의 장신구 아이템을 지급해주는 방식으로요.(팀포 팬들이 '모자를 샀더니 인디게임 하나 껴주더라'는 농담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발매한지 5년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업데이트를 꼬박꼬박 진행해주고(초기 발매시와 100여차례가 넘는 크고 작은 패치를 거친 지금의 게임파일 용량 차이가 기가단위가 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인기가 많은 자사 대표 게임을 무료화하는 대인배스러운 행보를 보여주면서 그 게임을 스팀 마켓의 여러 홍보 프로모션용 플랫폼으로 이용하는 거죠...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할인 행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 EA에서 자기네 온라인 마켓인 오리진이 스팀에 밀려 고전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는 스팀의 할인 행사가 게임 제작사들의 이익을 낮춘다며 비방을 했었는데요, 이에 대해 밸브가 반박하며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오히려 이런 할인 덕에 제작사들의 수익은 훨씬 늘어났습니다. '할인 안 해도 어차피 그 게임을 샀을' 충성도 높은 고객들에게서 얻는 수익이야 물론 할인폭만큼 줄어들었겠지만, 할인 덕분에 '그 게임에 별 관심 없던' 유저들마저 덩달아 구입을 해버리게 되니까요. 게다가 발매한지 오래된 게임일 수록 할인폭을 크게 해 주기적으로 한번씩 다시 행사를 진행하니 이미 오래전에 수명이 끝났던 게임들도 추가 수익을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홍보 기능 역시 대형 제작사들 보다 군소 인디 게임 제작사들에게 더 유용하게 작용되죠.
유저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산 게임들의 덩치큰 패키지를 따로 관리할 필요 없이 스팀에 접속만 하면 쭉 리스트가 뜨니까요.(물론 패키지를 소장하고픈 유저들에게는 아쉬움이 될 수도 있으나, 스팀 서비스와 패키지 발매를 둘 다 하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대다수 패키지 구매 후 해당 게임을 스팀에 등록시키는 절차를 지원합니다. 이후엔 패키지는 모셔두고 스팀 접속만 하면 거기 리스트에 들어와 있죠) 어딜 가던 내 스팀 계정에 접속해 구매 목록에서 게임을 내려받기만 하면 됩니다. 키 조작 등등 커스터마이즈한 설정들도 모두 저장되어 따라다니는건 기본이구요. 알아서 패치를 진행해 버전관리도 잘 해줍니다. 멀티플레이, 친구관리도 손쉽구요.
결국 온라인 마켓을 통해 유저들도 편해지고 제작사들도 유리해지며 특히 인디게임 제작자들에게 많은 이점이 돌아가게 된 겁니다. 밸브는 스팀을 통해 이런 철학을 고수해 왔기에 지금의 입지를 다진 것이구요.(PC게임 온라인 마켓 점유율이 7할이 넘었던가 그럴겁니다..) 지금도 스팀의 차기 발전 방향은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와 '게임 제작자-유저들 사이의 간극을 더 좁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스팀이 윈도우즈 운영체제 뿐 아니라 애플 맥OSX를 지원한 것도, 그리고 앞으로 리눅스용 스팀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고, 스팀TV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죠. 많은 게이머들과 게임 제작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얼마전 시작된 '스팀 그린라이트'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그린라이트란, 제작자들이 스팀 커뮤니티에 자기가 만든 게임을 출품하면 스팀 유저들이 그 게임을 평가하고 투표를 합니다. 동시에 제작자에게 아쉬운 점이나 버그리포트, 유저들이 원하는 추가 요소 등을 피드백 해주는 시스템이죠. 이렇게 해서 투표를 많이 받은 상위 몇 게임들을 추려내 스팀에서 정식 서비스를 하게 됩니다. 이는 재능있는 게임 개발자들이 유저의 피드백을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가며 '유저와 함께' 게임을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거죠)
게이머들 사이에 밸브가 칭송 받고, 스팀이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철학'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도 무슨 사회환원을 위한 기부단체인 것은 아니고,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임은 틀림없으나 그 방식이 당장 눈앞의 돈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판을 짜고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런 칭송을 받는 것이죠. 그렇지 않다면 인디게임 지원, 발굴이나 돈도 안될 리눅스용 게임 개발 지원 같은 것에 시간을 들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올 초 EA가 1조가 넘는 돈을 배팅해 스팀 인수를 시도했지만 밸브는 거절했습니다. 남에게 넘길 바에야 회사 폭파 시키고 만다 라는둥, 그렇게 넘어가면 다 짐싸서 나갈거다라는둥 밸브의 반응은 화끈했었죠. 그런데 오늘 넥슨과 엔씨가 돈을 모아 밸브를, 스팀을 노린다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지네요. 제작사로서의 밸브가 가진 막강한 파괴력의 프랜차이즈들, (당장 하프3 혹은 하프2 에피3 발매만 해도 PC게임 업계는 난리가 날겁니다...몇년째 안하고 있어서 문제지..) 유통사로서 밸브가 가진 스팀마켓은 한창 황금알을 낳고 있는 거위인데 이걸 당장의 돈에 눈 멀어 남에게 팔 리가 없죠. 밸브가 그리 힘없고 돈없는 회사도 아니고.. 그래서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게이머 입장에서 결코 환영할 일도 아니구요.
넥슨/엔씨가 어떤 회사들입니까?? 잘 만든 게임이라 할지라도 당장 눈앞의 푼돈에 눈이 어두워 캐시템 도배를 하며 게임 밸런스를 스스로 무너뜨려 망하게 만드는 회사들입니다. 철학이고 뭐고도 없어요, 수전노처럼 눈앞의 돈 한탕 털어먹고 끝낼 생각만 할 뿐. 이런 회사들이 스팀을 인수한다면 과연 위에 길게 설명한 저 철학을 이어줄까요? 아니, 이해라도 할까요?? 리눅스용 스팀 개발은 돈 안된다고 중단, 스팀 그린라이트도 취소, '우린 진작에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거지. 그러니까 너네 망할 제작사들은 엿같은 캐시템 게임내 결제 시스템이나 만들어오라고' 딱 이 꼴 나겠죠. 넥슨/엔씨가 밸브를 탐내는 이유는 명백히 스팀 때문입니다. 이들이 뭣 때문에 스팀을 탐내는 건지도 훤히 보입니다. 딱 하나, 돈이 되니까 탐나는 거겠죠. 자기네가 그런 마켓 만들기엔 능력도 안되고 시기도 한참 늦었고, 근데 남이 그걸로 돈 버는걸 보니 배는 아프고, 그래서 돈질로 확 사버리고 말겠다는 생각. 과연 캐시템으로 먹고 사는 회사다운 생각입니다. 인디게임 육성? 유저의 편의? 크로스 플랫폼 지원? 돈은 안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때 꼭 필요한 이런 일들을 진행할 철학 같은게 저들에게 있을거라 생각되지는 않네요. 그러기에 넥슨/엔씨의 스팀 인수 논의라는 기사는 게임을 사랑하는 제게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소식입니다. 단순히 '내가 싫어하는 회사가 내가 좋아하는 회사를 먹으려 든다'는 게 아니라, 게이머 입장에서, 게임업계 입장에서 재앙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되네요.
절대로, 절대로 밸브의 게이브 뉴웰이 스팀을 일부 지분만이라도 이들에게 팔지 않기를 바랍니다. EA에게 그랬듯이 단칼에 거절하고 비웃어주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