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식으로 나올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않습니다.
왜 변절자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시도를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마이 뉴스의 기사 내용에 따르면
"두 시간에 걸친 열람을 마치면서 나는 윤치호 작사설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작사 시기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까지 윤치호 애국가 친필은 1945년 10월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확인한 바로는 10월이 아니라 9월임이 밝혀졌다. 또 윤치호의 사위가 직접 기록한 윤치호의 사망 시점과 사인(死因)이 '1945년 11월 치과 치료를 받고 집으로 가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2월에 사망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80세였던 윤치호가 치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것은 건강했음을 반증한다. 죽음을 앞둔 처지도 아니었던 1945년 9월에 애국가 친필본을 작성한 배경은 해방 정국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친일가족이 처한 위기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즉, 해방 정국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심판과 처단이 팽배하자 위기감을 느낀 윤치호 가족들이 애국가 작사로 면죄부를 받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독 작사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것이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의 핵심 증거로 활용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둘째, '역술'(譯述)이 '작'(作)으로 바뀐 점에 대한 의문이다.
현재의 애국가는 1908년에 윤치호가 역술(譯述)했다는 '찬미가'라는 미국 성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역술'은 창작이 아니라 '번역해서 썼다'는 말이다. 즉, 창작품이 아니라 번역 소개했다는 얘기다. '역술(譯述)'과 '작(作)'은 엄연히 다르다. 세월이 흘렀다고 '역술'이 '작'이 될 수는 없으므로 1908년에 '역술'이었던 것이 1945년에 '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윤치호가 친필본에서 '작(作)이라는 표현을 쓴 것 또한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글 간소화 운동을 주도하는 등 누구보다 우리말 어법과 어의(語義)에 해박했을 윤치호가 '역술'과 '작'의 차이조차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셋째, 애틀랜타 이민자들의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이번 방미에서는 애틀랜타 한인회가 발간한 이민사 관련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인회의 이민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을 다닌 윤치호란 인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윤치호에 대해 많은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애틀랜타 이민사 기록에서 윤치호를 단독 작사자로 단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애국가는 공동 창작물이라는 중앙대 노동은 교수의 주장에 무게를 더해 주는 기록이다.
넷째, 윤치호의 일기장에 애국가와 관련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윤치호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마침 이번 에모리 대학 방문에서 일기장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치호 연구자들에 의하면 윤치호의 일기장에는 애국가 관련 언급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한다. 일기는 마음의 거울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경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윤치호도 국왕(國王)에 대한 비난이나, 자신의 금전기록까지 꼼꼼하게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세세하게 일기를 썼다.
그런 그가 만약 애국가를 작사하였다면 일기장에 애국가를 지은 경위를 포함해 소회 등을 남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윤치호 애국가 작사자를 주장하는 분들은 윤치호 일기장의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저는 이 기사를 믿고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