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에서는 엄석대라는 캐릭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병태가 관심병자에 비겁하고 계산적인 인물인데 반해, 엄석대는 한 마디로 '초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침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과 포용력이 있는 인물인데, 이것이 병태의 관찰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석대가 먼저 그렇게 물어 주어서'라는 한병태의 표현입니다. 석대는 한 눈에 병태의 욕망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그가 아이들 앞에서 마음껏 자기 자랑을 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해 줍니다. 이렇게 석대는 자기 왕국의 새로운 시민이 된 병태를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에게 적합한 자리를 배정해 줍니다.
하지만 이런 석대의 행동에 병태는 모멸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초라한 시골 학교의 급장인 석대가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에서 온 우등생인 자신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눈 여겨 봐야 할 표현은 '그때껏 내가 길들어 온 원리 - 합리와 자유'라는 부분입니다. 이 표현처럼 병태는 민주주의를 체화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길들여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석대가 '독재'에 맞춰 다시 병태를 길들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길들여진 병태는 뒤에 가서 석대의 지배에 행복해집니다.
병태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아버지는 석대의 엄청난 잠재력도 꿰뚫어 보고 감탄합니다. 나중에 병태의 어머니 역시 석대를 만나고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지요. 또한 병태의 질문에 아버지는 석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급장이 되어 보라고 답합니다. 이건 병태의 생각처럼 아버지가 그의 질문을 잘못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심과 부러움'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대답입니다.
참고로 이 소설의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권력을 애타게 갈망하는데, 병태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정에 따르면 서울의 공무원이었던 그는 장관의 초도순시에도 달려나가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일을 계속하다가 장관에게 잘 보이려는 직속 상관에게 찍혀서 시골로 전근을 오게 된 인물입니다. 즉, 그는 '합리와 자유'에 맞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골로 쫓겨 온 지금은 서울에서의 권력을 되찾고 싶다는 목마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튼 작가는 이렇게 나름대로 6월항쟁의 시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6월항쟁은 군사독재에 지친 국민들이 민주화를 열망해서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권력을 탐내는 지식인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들을 부추겨서 일어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 씨가 변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문열 씨는 일관되게 '초인에 의한 독재'를 옹호해 왔고, 그저 우리가 이 작품을 오해해 왔던 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 회에서는 전두환이 지배하던 당시 한국 사회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