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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힌두교나 믿어볼까나...
게시물ID : sisa_53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라하노
추천 : 5
조회수 : 231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04/05/09 04:07:16
 
  ‘종교 없는 종교’ 힌두교 
 
  2004-03-08 오전 11:26:30    
 
   
  우리가 흔히 종교의 나라라고 하는 인도에 살면서 놀라는 것은, 종교라는 말 혹은 종교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격렬하게 침 튀기는 논쟁의 주제가 되는 종교 문제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 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믿는 종교를 믿어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외치는 사람도 없고, 원색적인 비난이 오가는 정통ㆍ이단 시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사람들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일과가 신과 관련을 지니며, 연중 수많은 명절이 있지만 종교와 무관한 명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3백여 가지의 성례가 행해지며, 신이 개입되지 않는 성례는 없다. 하늘과 땅, 비, 구름, 천둥, 번개, 바람, 강, 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자연이 신으로 숭배되지 않는 게 없다. 소나 멧돼지와 같은 짐승들이 신격화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가 끼니는 걸러도 아침이면 꽃을 사서 사원에 간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참으로 종교적이라 할 만하다.
    오릿사(Orissa)주의 주도 부바네스와르(Bhubanesvar)에 있는 묵떼스와르(Muktesvar)사원 전경. 북인도의 나가라(nagara)양식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사원으로 힌두교사원이지만 불교적인 색채가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이거룡 

  오늘날 인도사람들이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카스트제도와도 관련이 있다. 카스트제도는 힌두교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카스트에 속박된 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요지부동이며, 현실적으로 신분 상승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은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지만, 인도 사회에서는 벼락부자도 없고 한꺼번에 폭삭 망하는 경우도 드물다. 아버지가 부자면 할아버지도 부자였고, 그 이후도 계속하여 부자다. 살아서는 도무지 나의 삶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절망과 체념이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삶 속에서 기댈 것은 당연히 죽음뿐이다. 사후의 세계에 삶을 건다. 왜곡된 형태이긴 하지만,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힌두교 신들 가운데 쉬바 신이 가장 인기 있는 것도 이런 심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힌두교의 주요 3신 가운데 브라흐마(Brahma)는 창조, 비슈누(Visnu)는 유지, 쉬바(Siva)는 파괴를 담당하는 신이다. 개인의 인생을 놓고 본다면 브라흐마는 출생, 쉬바는 죽음, 그리고 비슈누는 그 중간의 삶을 주관한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서 브라흐마 사원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사람의 출생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며 그렇다고 나의 부모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출생에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며, 사람의 출생과 관련되는 브라흐마 신이 인기 없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는 비슈누도 그다지 매력적일 수 없다. 꼼짝할 수 없는 인도 사회의 구조상 기대할 수 없기는 현재의 삶도 마찬가지다. 십중팔구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리라는 기대는 불가능하다. 평생 지금 이대로 살 수밖에 없는, 어떤 의미에서 금생은 이미 물 건너간 삶이다. 죽음밖에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바에게 매달린다.
   마하깔라(Mahakala)사원 지성소 내부. 온갖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쉬바 링가(linga, 男根像)이 안치되어 있다. 
ⓒ이거룡 

  인도 유학 초기에 내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린 질문 중의 하나는, “당신 종교가 뭐냐?”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물음은 어떤 사람의 내력과 성분을 파악하는 하나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력서나 입사원서 같은 곳에서도 종교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인도 종교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인도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연히 그렇게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질문은 인도사람들에게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길 가다가도 사원이 보이면, 혹은 담벼락이나 길바닥에 그려진 신상을 보면 이내 멈추어 서서 합장하는 것이 이들이지만, 자기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생각이 없다. 자기의 종교에 대하여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골치 아프게 따져 묻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아갈 뿐,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여긴다.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 싶어서 “당신이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하고 물으면, 모든 신을 다 섬긴다고 한다. 당신은 비슈누(Visnu)교도인데도 쉬바(Siva)신을 섬기느냐고 물으면 그게 뭐 어떠냐고 되묻는다(힌두교의 주요 3신 중 비슈누와 쉬바는 각각 세계의 유지와 파괴를 담당한다).
  
  힌두교인들이 스스로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과 관련을 지닌다. 힌두교인은 힌두교인으로 태어난다. 종교는 우리처럼 이것저것 재보고 골라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태어나면서 이미 어느 한 종파에 속해 있으며, 일생 동안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삶이다. 애초부터 종교라는 이름으로 의식되는 테두리가 없으니 벗어날 테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종교는 일상생활이다. 특별한 게 아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처럼, 인도 사람들은 종교로 산다. 삶이 곧 종교며, 종교가 곧 삶이다.
  
  사실 힌두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일반적인 종교 개념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어떤 특정 창시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모든 힌두교인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교리 체계도 종파마다 제각각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이러 저러한 종교라고 딱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렵다. 힌두교인들은 종교의 핵심이 신의 유무나 유일신론 혹은 다신론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은 힌두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다르마’(sanatana dharma, 法)이다. 어떤 힌두교도의 개인적인 견해가 일신론, 다신론, 심지어는 무신론 중 어느 쪽에 기울어있든 만일 그가 ‘영원한 다르마’를 추구하고 있다면 훌륭한 힌두교도일 수 있다.
  
  어원적으로 ‘다르마’라는 말은 ‘떠받치는 것’, 혹은 ‘유지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르마는 우주를 떠받쳐 지탱하는 천칙(天則)이며, 사회가 유기적으로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게 하는 윤리 혹은 의무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나를 다른 무엇이 아닌 나 자신으로 유지시켜주는 힘’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차원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다르마를 삶 속에서 찾아 실현하자는 것이 힌두교도들의 궁극적인 이상이다.
   나르마다 강가의 링가와 난디, 링가는 쉬바의 상징이며 난디는 쉬바의 탈것이다. 나르마다(Narmada)강은 갠지스, 야무나 등과 함께 인도의 일곱 곳 성스러운 강 중의 하나다. ⓒ이거룡 

  자기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정통 이단 시비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싸우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성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진리는 하나지만 여기에 이르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도사람들의 뿌리 깊은 믿음이다. 물론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파를 유파(有派) 그렇지 않는 종파를 무파(無派)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흔히 보는 정통과 이단을 가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파가 중요한 만큼 무파의 중요성도 인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인도 사상사는 이 두 가지 계통 간의 변증법적인 발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힌두교 가문의 태생이지만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았던 까비르(Kabir, 근대 인도의 대표적인 신비주의 명상가), 그리고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종합하여 시크교를 열었던 나나끄(Nanak)는 이단으로 배척되지 않는다. 힌두교의 한 부류로 받아들여진다. 힌두교에 대한 개혁으로 일어난 불교에 대해서도 전혀 이질적인 종교로 여기지 않으며, 힌두교인들 가운데는 비록 불교가 정통 힌두교와 다른 외도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사상의 정수는 불교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비슈누교 전통에서는 붓다를 비슈누의 아홉번째 화신으로 믿는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일은 없다.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는 말과 혼동하는 우리와는 확실히 다르다.
  
  물론 인도에는 자기의 종교를 의식하는 소수 종파들도 있다. 시크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강한 응집력이다. 군대 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역동성이 보인다. 자기의 정체를 의식한다는 것은 삶을 적극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실제로 이들은 각각 인도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소수종교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느끼는 `체감 퍼센티지'는 이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뉴델리 시내를 다녀보면 곳곳에서 시크교도들의 터번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끈끈한 유대와 결속을 느낄 수 있다. 뉴델리 택시 운전사들의 대부분은 시크교도들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일단 터번을 쓴 사람이라면 저희들끼리는 무조건 우호적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종교를 의식한다는 것은 삶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배타성이 숨어 있다. 언제든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실제로 인도에서 종교간 갈등의 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힌두와 시크간의 갈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가 신문 지상을 통하여 가끔 접하게 되는 인도의 종교 분쟁은 엄밀히 말하여 순수한 의미의 종교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갈등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정치적인 이슈가 개입되지 않는 한 그런 갈등과 분쟁은 없다.
   시크교 수행자들, 시크교도들이 지니는 5대 성물(聖物) 중 하나인 단검을 차고 있다. ⓒ이거룡 

  힌두교도들은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다. 자기의 종교를 참된 종교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다른 많은 이웃 종교들을 거짓 종교로 단죄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려 들지도 않는다. 각자 자기의 종교 전통에 서서 `힌두교인은 보다 나은 힌두교인이 되고, 이슬람교인은 보다 나은 이슬람교인이 되며, 크리스천은 보다 나은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마하뜨마 간디의 입장이었다.
  
  사실 나는 도대체 포교의 이유를 모른다.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차피 불확실한 사실에 대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가 가진 믿음의 간접적인 증거로 삼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가진 진리를 남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의무 때문인가? 포교란 단지 교세의 확장이라는 잣대로 종교를 재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알다시피 종교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며 체험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이든, 신에 대한 지식이든, 그것은 엄격히 말하여 종교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종교 혹은 신에 대한 설명일 뿐이며, 설명은 이미 한 다리 건너 있는 이차적인 것이다. 종교에 대한 지식은 그 껍데기일 뿐 알맹이는 아니다.
  
  따라서 만일 힌두교를 알려 한다면 이에 관한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갠지스 강가로 가는 편이 낫다. 이른 새벽 갠지스 강가에 서면 실로 종교는 사람의 지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든다.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들것에 얇은 홑이불 한 장을 덮은 주검이 얼굴을 드러낸 채 지나간다. 삶의 한가운데를 헤집고 주검이 지나간다. 흐르는 강물에 주검을 불사른 재가 뿌려지고, 더러는 타다 남은 주검이 그냥 버려지기도 한다. 바로 옆에서 사람들은 목욕도 하고 강물로 양치질도 한다. 이 중에는 평생에 한 번을 소원하여 수천 리 밖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론도 설명도 무의미하다. 다만 갠지스가 있을 뿐, 업을 씻어 내리는 갠지스가 있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무엇에 대하여 묻고 대답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소외를 의미한다. 묻는 자와 묻는 대상의 이별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다는 것은 이미 불신을 의미한다. 사는 게 뭐냐고 묻는 사람은 이미 삶을 겉돌고 있다는 증거다.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의 끄트머리에는 다만 생명 없는 말장난 나부랭이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삶은 없다. 참으로 사는 사람은 삶을 묻지 않는다. 종교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하나의 물음이 추가되고 하나의 대답이 보태질 때마다, 관념이 분화되고 새끼칠 때마다, 우리는 본질에 다가가는 듯한 일시적인 허상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사실상 점점 더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겹겹이 쌓이는 개념의 장막에 갇힐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종교에 대한 논의가 너무 많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 사회에 종교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논쟁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는 종교의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도한 의식성은 언제나 사실을 왜곡시키는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거룡/동국대 연구교수,인도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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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정의가 마음에 쏙 들어오네요...
그리고 이 구절도...

 힌두교도들은 포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다. 자기의 종교를 참된 종교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다른 많은 이웃 종교들을 거짓 종교로 단죄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하나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려 들지도 않는다. 각자 자기의 종교 전통에 서서 `힌두교인은 보다 나은 힌두교인이 되고, 이슬람교인은 보다 나은 이슬람교인이 되며, 크리스천은 보다 나은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마하뜨마 간디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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