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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게시물ID : sisa_3919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디플고래
추천 : 1
조회수 : 3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19 15:28:03

광주 다녀왔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 이 후 최규하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부를 잡고 있던 전두환은 12월 12일 군사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합니다.


독재자 박정희 아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가득찬 민중들은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는 내용으로 민주화 투쟁을 시작합니다.


1980년 5월을 즈음해서 민주화 운동은 최고조로 끓어올랐고


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에 가까운 민중들이 모였습니다. 그 때 군대가 동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모인 지도부는 


통한의 회군을 선택합니다. 


5월 16일 전두환은 미국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른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한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 을 요청했고


한미 연합 사량관은  이 요청을 승인합니다.(your request is approved)


그리고 다음 날 17일 24시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킵니다.




그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서울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전국적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민주화투쟁이 


끊어오르고 있었습니다. 


5월 18일 계엄군이 전남대학교를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어 서고 저항하는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위협과 폭행을 가했습니다. 


아직까지 소극적이고 조직화되지 않았던 시민군은 계엄군의 잔인한 폭력에 시민들의 대오는 거세지고 집단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5월 19일 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전 지역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19일 4시 30분 경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전 날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김경철씨고 19일 사망합니다.


김경철(29. 장애인노동자)

어릴 때 사고와 약물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김경철은 5.18 최초 희생자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공수부대에 붙들린 그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할 수 도 없어 그저 두 손으로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들겨 패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갔으나 19일 숨졌다.

그는 4살 때 바위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쳐 사지가 마비되면서 3개월이나 병원생활을 하였다. 농아학교에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과정을 독학으로 끝낸 그는 서울에 있는 계명양화점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80년에는 광주에 내려와 국제양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농아처녀와 결혼해 801월에 혜정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518일 그날도 온 가족이 모였다. 첫딸 혜정이 백일을 지낸지 스무날이 된 날이다.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이 영암에 간다 해서 버스터미널에 배웅을 나간 후 친구 들과 점심을 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날 오후 금남로 제일극장 들어가는 골목에서 공수부대에게 뒤통수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농아신분증을 보여주고 악쓰며 몸부림치는 경철이를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친구들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숨어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말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알이 터지고,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가 부서졌으며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온 몸이 두부처럼 으깨진 것이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었으면 편히라도 갈 것인데, 온 몸이 터질 때 꺼정 맞아 죽다니, 불쌍한 내 새끼 듣도 못하고 말도 못헌 것도 불쌍한디 맞아 죽다니…….”

어머니 임금단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우리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김경철씨가 죽은 후 어린 혜정이를 버려둔 채 부인은 친정으로 가버리고 혜정이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컸다


5월 20일 오전 8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등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오후 6시 40분 200여대의 차량시위대가 등장합니다.


               신군부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나닌 광주소유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가 연합사에 문의했고

             미국정부와 합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했습니다.


5월 21일 오전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습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


습니다. 오후 1시경 정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이를 향해 총을 난사하고 시민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


였습니다. 총탄을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습니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외곽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계엄군의 총격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민중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오후 5시 30분 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여 광주의 모든 길목을 막고 광주를 철저하게 봉쇄하게 됩니다.




해방광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떠나고 다시 들어오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 되었습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 나와 주먹밥과 빵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한 헌혈 줄이 길게 세워졌고 헌혈을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오히려 피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누구나 자유롭게 나와 발언하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광주의 기록은 세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고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의 모범이 됩니다.



5월 26일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고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대표들이 맨몸으로 하루를 버텨냈습니다.


5월 27일 새벽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고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도청을 사수하던 150여명의 시민군은 시신으로 


남겨졌습니다.



열사님들 

손옥례 (19)

손옥례양은 희생자중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은 사람이며 가정파괴도 가장 비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1일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손옥례씨는 대검에 왼쪽 젖가슴이 찔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70센티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온 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아랫배에는 수십 발의 총탄세례를 받고 숨졌다.

 

동생도 공수부대에게 얻어맞은 휴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동생 손병석씨는 이상현 외과병원에 일반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18일은 일요일이라 평소부터 다니던 은광교회를 가다가 서석병원 앞에서 공수부대원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 자리에서 실신한 후 깨어보니 통합병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받기는커녕 계엄분소로 끌려가 왼쪽 허벅지를 대검에 찔려 10센티미터 이상 상처가 났으며 오른쪽 무릎관절을 비롯한 온몸이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통 멍들어 있었다.

손병석씨는 풀려나고서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하였다. 현재 간질 비슷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뿐 아니라 군인들만 보면 덤벼들어 싸우려 한다.

 

아들이 병원에 누어 있는데다 딸마저 끔찍하게 죽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술로 아픔을 달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자주 호소하더니 19819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도 딸 때문에 충격으로 사지마비를 일으켰다. 남편이 죽자 가슴앓이가 심해져 198612월에 54세에 딸과 남편 곁으로 갔다


방광범 (14-1)

24일 오전 11시 지원동에 주둔했던 공수부대는 27일 작전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일부는 차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었다. 주민들은 공수부대에게 물을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월동을 지나면서 주택가에 총격을 했다.

1240분쯤에 광범이는 10여명 친구들과 원제부락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던 그는 친구들이 광범아 엎드려하고 소리치는 순간 총에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버지 방두형씨는 머리가 날아가고 없다는 말에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후에 동네 청년들이 야산에다 아버지도 모르게 묻어줬다.

이틀 후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저수지를 지나서 정신 없이 야산으로 갔다.

야산에서 방광범씨의 묘를 찾으러 돌아다니는데 공수부대가 총을 겨누었다.

아내가 아들이 죽어 묘 찾으러 왔다, 총 쏘지 마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밥도 못 먹고 술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결국 정신분열증까지 생겨 부인과 이혼하고 말았다. 공수부대는 광범이의 머리와 행복했던 가정을 이렇게 깨뜨리고 말았다.



박금희 (18-전남여상3)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44녀중 막내딸인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실업계인 춘태여상(현 전남여상)에 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교통비가 없어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했고 도시락을 가져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박금희는 몸과 마음이 대단히 건강하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하였고 선도부장을 맡을 정도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음악을 좋아하여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낭만적인 성격이기도 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인 그는 시민들의 애틋한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박금희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87년까지 매년 521일이 되면 친구들은 금희가 누워있는 묘지 가까운 산 속에서 경찰들 눈을 피해 숨어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 후 신군부는 당시 잡았던 학생 시민 3,000여명을 군사재판을 통해 4급에서 1급으로 나누었고 1급에 선정된 600여명에게 내란 및 폭동죄로 감옥으로 보냅니다. 여기서 웃긴 것은 내란수괴로 지정된 사람이 5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잡혀갔던 사람으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항쟁 기간동안 감금 당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광주학살의 책임을 무마하기 위해서 616명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웠던 것입니다.



 5.18항쟁이 끝난 후 5.18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분신, 투신 등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 투쟁은 끊임없이 강해졌고 결국 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을 끌어내리고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장세동 등 5.18 주범을 처벌하고 그 전까지 광주사태, 광주폭동으로 알려지던 광주민중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정식으로 인정받고 국가기념일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의 밀실 여야합의로 학살의 주범이 사면으로 풀려나게 되고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온갖 개소리를 다하고 세금도 안 내고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ㅅㅂ 또한 종편 벌레방송과 몇몇 벌레들이 5.18 민중항쟁을 폭동, 사태, 북한개입설 등 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ㅅㅂ


 역사를 기억하지 못 하면 되풀이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그리고 5.18 민중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전두환 등의 독재잔재와 친일매국 세력들 그리고 이들을 추종하는 종편찌라시와 벌레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지만 5.18은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당시 열사님들이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출처 - 내가 광주 역사기행가서 들은 이야기와 5.18 기념재단에서 자료찾아보고 적음

       - 518기념재단 주소 - www.5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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