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냉면이 이렇게 까지 대박칠줄 난 몰랐거든. 허허"
재떨이에 담배를 털며 그가 말한다. 안경위로 올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매는 마치 내 모든것을 꿰뚫고 있다고 말하는듯 하다.
"냉면으로 시카 너의 그 차가운 이미지도 분명히 많이 순화됐을꺼야. 분명히!"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건데요?"
제시카는 그의 기에 눌리기 싫어서 일부러 강하게 맞부딪쳤다.
"그러니까 말이야.. 시카야 너 솔로활동 하고 싶은 마음없어? 태연이도 솔로 활동했고, 윤아도 연기활동 꾸준히 하고 있고..."
"네?"
"아니, 뭐 말이 솔로활동이지. 박명수랑 같이하면 듀엣이지."
"...."
"한번 잘생각해봐. 명수한테는 이미 며칠전에 얘기해뒀어."
"뭐라고 하던가요..."
제시카가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응?"
"명수오빠 말이에요.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명수야 당연히 좋다고 하지."
제시카는 자신이 그의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던것일지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어떤 대답이라도 자신의 마음은 편할 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정말로 다행이라고... 가슴 깊숙히 피어오르는 생각을 묻고 또 묻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제시카의 등뒤에서 이수만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그 소문 신경쓰지마. 내가 언플 좀 하지. 뭐 둘의 나이차라면 따로 손쓸일도 없을것 같지만 말야. 큭큭"
이수만 사장의 그 말은 제시카와 박명수 사이의 현실의 벽을 적나라하게 꼬집어놓아서 제시카의 마음을 더욱 후벼팠다.
다음날 소녀시대 숙소.
"시카야~ 뭐해? 헤헤헤"
침대에 풀이 죽어 누워있는 제시카에게 티파니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시카야~ 그런 헛소문 신경쓰지마~ 누가 너같이 예쁜애랑 박명수같은 아저씨랑 무슨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겠냐~"
"..."
"시카야~아~아~"
우우웅~
"어, 전화왔네? 박명수 아저씨다! 내가 받아서 혼내줄까?!"
제시카는 말없이 휴대폰을 빼앗았다.
"후우..."
그리곤 차분히 한번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그래.. 시카야, 오빠야. 잘지냈지?"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더 자상하게 들린다.
"다른게 아니라, 사장님한테 얘기는 들었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며..? 야, 잘 부탁한다. 내가 저번에 레스토랑 가서 맛있는거 사줬잖아, 허허... 우리 한번 해보자!"
제시카는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때문에..."
"응..?"
"그것 때문에 저를 레스토랑으로 부르신건가요?"
[번외] 그의 이야기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호야, 오늘 뭐한다고?"
"아니, 이 형은 왜 계속 물어봐? 오늘 듀엣 가요제한다고!"
듀엣가요제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때부터 내 생각은 하나였다.
요즘 인기있는 아이돌과 엮어서 한번 대박 내보자는 생각.
제시카를 처음 찾아가 부탁했을때 혼쾌히 승낙해줄것이라 생각했는데, 뜸을 들이는것을 보고 약간 기분이 상했다.
요즘 젊은애들 싸가지 없는거야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물론 그런것보다 내게는 개그로 써먹을수 있는 소스를 만드는게 더 중요했다.
결국 제시카와 팀을 짤수 있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명수씨, 여기는 냉면을 먹듯이 손을 이렇게 올리고, 쓰읍~하아 쓰읍~하아"
나이 40에 이렇게 빠른곡에 춤까지 춰야한다니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아이고, 좀 쉬었다 합시다..아이고"
내가 힘들어 퍼질러 있을때면 항상 느닷없이 제시카가 찾아왔다.
"왜 연습안하시고 누워계시는거에요! 이렇게해서 1등할 수 있겠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그렇게 옆에 와서 쫑알쫑알 거리면 다시 일어나서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소녀는 나에게 자양강장제 같은 역할을 해줬는지도 모른다.
"시카야, 걱정하지마라. 내가 꼭 일등시켜줄게. 오빠만 믿어"
어쩌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면 소녀는 차갑게 대답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어요"
애늙은이 같은 말에 약간 어리둥절 했지만, 사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회 당일.
"아이고, 이것도 대회라고 떨리긴 떨린다 야..."
따뜻한 위로를 기대하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너무 긴장하지마요... 수상이 중요한가요? 이렇게 좋은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게 중요한거요!"
"자, 힘내요.. 화이팅!"
그녀는 나를 위로해줬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는 나와 같다.
상처받는것이 두려워 먼저 가시를 세운다.
하지만 가시속의 그녀는 너무나도 여리고 너무나도 착한 소녀였던 것이다.
나는 그 소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랑?
아니다.
사랑이라기 보단 굳이 따지자면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에 가까웠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고, 시카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바쁜사람들 모셔놓고.. 애휴"
"괜찮아요 ^^"
"다들 끝났는데, 회식하러 가자! 갈비 어때?!"
"갈비?! 아 맞다. 나 내일 패떳 촬영있어서 먼저 갈게"
"재..재석아!"
"저도 내일 스케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그 뒤로 한동안 제시카와는 연락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이수만 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시카와 듀엣을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안합니다. 대회때도 저 때문에 시카양을 비롯한 여러분들 고생시켰고, 또 불우이웃을 돕는 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일을 상업적인일로 매듭짓고 싶진 않네요"
단칼에 거절했지만 제시카와 이대로 연락이 끊어지기는 아쉬웠다.
만날 구실이 필요했다.
제시카에게 친한 개그맨 후배를 소개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제시카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 약속을 잡고 후배에게도 연락을 했다.
괜한 오해 생기는게 싫어서 여기저기 소문도 내고 다녔다.
"이번에 후배 G군하고 제시카하고 만나보게 해주려고.. "
"G군?"
"어, G가 그렇게 제시카를 만나고 싶다고 난리야. 아주 곤란해 미칠지경이다"
"G군 걔 소문이 안좋던데.. 남의 차 막 훔쳐타고 다닌다던데?"
결국 G군은 약속 당일날 아침 벤츠를 훔쳐타다가 걸려 조사를 받으러 갔다.
나는 안절부절해 있었다.
G군이 잡힌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 혼자 만나러 가야 되나? 그러다 괜한 오해사면 어떻게 하지? 나야 그렇다치고 제시카는? 설마 내 나이에 스캔들이 날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결국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레스토랑에서 만난 제시카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슨 안좋은일 있나? 아니면 나를 만난게 싫은거야?'
잠시뒤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왔고,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보였다.
제시카는 요리를 얼마 먹지도 않못하고, 스케쥴 때문에 금방 나가 버렸다.
'지켜주고 싶다'
'만나고 싶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의 이런 복합적인 감정의 폭풍은 제시카 얼굴의 눈물자국을 봤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내 감정을 내가 주체할수 없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 하겠습니다. 듀엣 하겠습니다."
[5부]
"그것때문에 저를 레스토랑으로 부르신건가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오빠한테 저는 그런 존재인가요?"
"만나자.."
"네?"
"지금 만나자. 저번에 그 장소로 나와"
"뚜..뚜...뚜..."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끊으니 옆에서 티파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카야, 너 설마.."
제시카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빠른 발걸음.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이 무엇인가 다짐을 했음을 보여주는듯 했다.
약속한 장소.
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착한 제시카도 벤치에 앉았다.
둘은 벤치의 양쪽 끝에 앉아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
"너를 돈때문에 이용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네가 내 딸같고 친구 같아서...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ㄱ..."
순간 그는 그의 왼팔에 스치는 부드러운 살결과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그의 옆에 와 있었다.
"저, 오빠 좋아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향기로운 샴푸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그의 몸을 휘감아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게
'단지 지금 이대로...'
'지금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
"냉면이 말이야..."
"네?"
"냉면의 인기가 언제까지 갈거라고 생각해?"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한 말에 제시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딱 한달. 아니 한달도 못갈거야.."
그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 유행이라는게 그런거거든. 잠깐 열광했었다가 얼마 못가 금세 질려서 바로 잊어버리지."
"그렇다고 그것이 의미없는 일은 절대 아니야.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른아른한 추억으로 남게되지."
"내가 저런것을 좋아했었구나.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되는것들도 참 많아.."
제시카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너한테 지독하게 촌스러웠던 아주 잠깐 동안의 유행이었던거야.."
그는 벤치를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그냥 그걸로 만족할게.."
"...."
"밤이 되니까 날씨가 많이 춥다! 빨리 들어가라.."
그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울려퍼진다.
소녀는 벤치에 혼자 남아, 조용히 아주 조용히 울고 있었다.
[디씨 코겔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