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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광주다녀왔습니다.
게시물ID : gomin_7009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득행
추천 : 7
조회수 : 23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20 01:11:47

답답한 마음에 광주다녀왔습니다.

왕복 12시간!

멀긴 멀더군요

 

시게에 올릴까 고게에 올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 고민으로 들어주셨으면 해서 고게에 올림니다.

반말은 너그러이 용서를...

 

 

 

 

 

어렸을때 다니던 학교는 대학교 정문앞을 지나야만 등하교를 할수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1987년 6월에 평범하게 하교를 하고 대학교 정문앞 오락실을 들렀다.

"독재타도, 호헌철패" 들려오는 시위대의 소리

또 최류탄 쏘겠구나 생각하고 집에가려는대 이미 늦어버린듯 길거리는 이미 최류탄의 연기로 매캐함이 가득했다.

10살 어린아이인지라 진압대에 공격에서 무사할수 있었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다.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독재타도를 외치는 누님의 모습.

진압대가 휘두르는 방패에 맞아 피를 흘르는 동료를 구하기위해 뛰어드는 모습

최류탄때문에 눈물, 콧물, 침범벅이 되어서도 호헌철패를 울부짖는 모습

그때까지만해도 나에게 부모님 말씀대로 시위대는 바닥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한 빨갱이들이였다.

 

고등학교때 전교조에 가입된 선생님이 한분 계셨다.

사회 과목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가끔 재미있는 얘기도 해주고 이것저것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분이다.

전교조에 가입되어 있어서인지 교편을 놓으시게 되었다.

마지막 수업을 하게 되었을때 선생님은 민주주의에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부마항쟁때 비겁하게 뒤에 숨어 같이 싸우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 여기시며 고개를 들지 못하셨다.

 

대학생이 되서야 자유에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우리힘으로 자유를 얻어내지 못했다.

독립이 그러했고 한국전쟁이 그러했다.

또 어렵게 피흘려 얻은 자유는 언제나 군화발에 짖밟혔다.

4.19이후에 박정희의 군화발에

부마항쟁  80년 5월에 광주. 이후에 전부환의 군화발에

그리고는 6월항쟁으로 어렵게 얻어낸 자유는 민주진형의 분열로 다시 노태우라는 군인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그렇게 국민들의 피와 눈물로 키워놓은 나무에

벌레 같은 놈들이 열매위에 앉아서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있다.

내것을 뺏기고도 아무말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린것 같아 너무도 답답해서 멀리 광주까지 다녀왔다.

광주도 내가 사는 이곳과 똑같았다.

술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고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도 있고

이곳이 내가아는 광주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518국립묘지로 가는 버스안에서 두런두런 오가는 대화속에서 확실히 다른점을 느꼈다

이분들은 행동할줄 안다.

가슴치며 답답해 하는 것만이 아니라.

열매위에 앉아 단물만 빨아먹는 벌레들에게 내것이니 저리 꺼지라고 말할줄 안다는 것이다.

 

그 벌레들이 가장무서워하는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그렇기에 그 벌레들은 권력을 잡으면 언제나 힘이 응집되지 못하게 했다.

김구 선생님, 여운형 선생님 암살.

조병옥박사,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암살미수

그리고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의 자살

겉으로는 안그런척 하지만 그들은 항상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말하고 싶다.

벌레 새끼들에게 숭고한 영혼들의 피땀으로 자란 나무에서 꺼지라고 말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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