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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랑해요
게시물ID : humorbest_5395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외동딸Ω
추천 : 65
조회수 : 2818회
댓글수 : 1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0/05 03:16:30
원본글 작성시간 : 2012/10/03 00:11:31


나는 스물 여덟살이에요.
우리 아빠는 일흔 세 살이지요.
나는 우리 아빠랑 마흔 다섯살 차이가 나요.
아빠가 어렵게 어렵게 본 외동딸이에요.
우리 엄마는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어요.
나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랑, 고모가 키워주셨어요.

우리엄마는 나를 낳고부터 몸이 안 좋았다고 하는데
엄마는 엄마가 빨리 죽을 걸 알고 있었나봐요.
난 어릴 때 엄마랑 찍은 사진이 아주아주 많아요. 엄마랑 찍은 사진만 앨범으로 두권이에요.
그래서 우리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어요.

내 유치원 입학식 때 쉰이 넘은 우리 아빠는 내 손을 꼭 잡고 입학식에 데려가 줬어요.
그리고 내가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당할까봐서 그 뒤부터 학부모 면담은 늘 고모부가 왔어요.
우리 고모부도 정말 좋은 분이에요. 굳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안 해도 됐는데

그래도 초등학교 운동회부터는 아빠 손 잡고 달리기도 하고
고모가 싸 준 도시락으로 소풍도 가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아빠가 할머니한테 어머니 우리 딸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요.
나는 그래서 할머니 무덤에 엉엉 울어서 울었었고요. 이번 추석에 성묘하러 가서 할머니 무덤에다가
내가 만든 송편도 놓고, 내가 깎은 사과도 놓고, 내가 만든 전도 놓고 그러고 왔어요
할머니 무덤에 절 하면서 할머니 할머니 우리 아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나는 시골에서 살았는데, 시골에서는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서 지금은 서울에 있어요.
주말마다 아빠한테 내려가서 아빠랑 놀고, 아빠네 집 텃밭에다가 오이 심고 가지 심고 토마토심고 파도 심고 고추도 심고
감자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호박도 심고 무도 심고 배추도 심고.... 이것저것 조금조금씩 잔뜩 심어다가
그걸로 아빠한테 반찬도 만들어 주고 김치도 담가주고 그래요. 엄마역할을 해 주던 고모도 나이가 많으시니까요.

우리 아빠는 내가 스물 여덟살이라고 남자친구는 없니 결혼은 어쩔거냐 물어봐요.
남자친구가 있긴 했는데 헤어졌는데. 그냥 때 되면 하겠지 라고 하고 말았어요.
주말마다 아빠 만나러 가는 여자친구랑 데이트도 못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바람나더니 헤어진 놈인데
그런놈을 남자친구라고 데리고 있었다고는 말 못하겠더라고요. 우리 아빠 속상할까봐.

우리아빠는 왼 손 손가락 두개가 없어요
어릴 때 마당 감나무에다가 내가 타고 놀 그네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다가 나무를 자르다가 손가락도 잘랐어요.
아빠는 병원에 다녀 와 놓고서도 결국 그네를 만들어 줬어요. 
어린 나는 그네 타고 놀 줄만 알았지 아빠 손가락이 나 때문에 없는 것도 몇 년 전에나 알았어요.

아빠 손을 잡고, 깍지 끼고 걸으면 아빠는 손을 자꾸 빼려고 해요. 그럼 나는 미안해서 더 꼭 잡아요.


우리 아빠는 주말마다 내가 온다고, 불편한 몸으로 방도 치우고, 닭잡아 준다고 닭도 잡고

늘 큼지막한 다리 두개 나 먹으라고 떼어주고 그래요. 그럼 나는 나 하나 아빠하나 이렇게 나눠 먹어요.


고모가 아빠 재혼하라고 했는데, 아빠가 이제 나도 다 컸는데 뭐하러 그러냐면서 괜찮다고 그랬어요.

그 때는 새 엄마 생기는 게 싫어서 아빠가 그렇게 말 해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도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매일 매일 옆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 때 누구라도 만나 재혼했으면 좋았을걸.. 이런 생각이 드네요.

아빠가 저렇게 혼자 외롭게 보내시는 걸 보니 다 내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 아빠는 연금 받아서 사셔야 하고 나도 박봉의 월급인지라 보태줄 돈도 없고

기름값도 무시 못하는 형편이고.... 그래도 시골엔 버스가 많이 없어서 여기 저기 다니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아빠 이제 눈도 잘 안 보이시고 그러신다고 하셔서, 오늘 운전면허학원 등록하고 왔어요. 

면허증 따서 운전 연습 해서, 이제 내가 아빠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려고요. 가을에 단풍놀이는 못 가도, 봄에 꽃구경은 가겠죠.


추석에 아빠가 요즘 몸이 자꾸 아프다고 해서... 연휴가 끝나면 납골당에 가 보려고 한다고 했어요.

아빠 죽으면 납골 할 납골당이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펑펑 울었더니 아빠가 씩 웃으면서

내가 나이가 일흔이 넘었는데 이제 준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요. 나는 우리 아빠가 오래 오래 내 옆에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내 집에 와 있으라고 해도 너도 불편할텐데 어떻게 그러느냐고 하고, 평생 시골에서 살아서 도시는 불편하다고 하고

나는 아빠가 전화라도 조금만 늦게 받으면 무슨 일 생긴건 아닌가 걱정돼 죽겠는데


아빠가 내 옆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정말 좋은 남자친구 사귀고 결혼하고 애기 낳고 그러면 내 아기 앉고서 어떻게 돌보는지 보여주면 좋겠어요.

그럼 그거 보면서, 아빠가 어릴 때 나 그렇게 키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거 아니에요?


아빠가 자꾸 몸이 아프다고 해서 속상해요

면허학원 수강증 앞에 놓고 속상해서 소주 한 병 마시고 넋두리 썼어요ㅠㅠ


엄마가 아빠를 늦게 데려가면 좋겠어요.

아빠가 전화해서 내 이름 불러주면서 뭐하니? 하고 물어주는 게 아직도 너무 좋단 말이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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