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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생산 창시와 문자 고안과의 밀접한 연관
게시물ID : history_93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방공대생
추천 : 2
조회수 : 75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22 21:54:50

19세기의 역사가들은 발전과정의 특징점으로 문자의 발달, 중앙 집권적 정치 체계, 야금술,효율적 농업 기술 등을 꼽았다. 이중 문자의 발달은 세계적으로 몇몇 한정된 곳에서만 일어났다. 문자의 발달은 정보의 보존과 전달 등을 가능케 하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전파하고 구전되어 변형된 정보가아닌 기록정보에 의존해 준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문자 체계는 하나의 기호가 나타내는 화소의 기능에 따라 크게 음소문자, 음절문자, 표음문자로 나뉜다. 음소문자는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기본적인 소리, 즉 음소를 나타내며 대표적인 예시로 알파벳이 있다. 음소문자는 적은 숫자의 문자만으로(대다수 20~30) 대다수의 소리를 조합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어처럼 26개의문자만으로 약 40개의 음소를 표현해야 하는 경우, sh ch처럼 문자의 조합이 또 다른 음소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만 하고, 이는표음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일으킨다. 음절문자의 경우, 한문자가 한 음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fa-mil-ly 처럼 3음절로분해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고대 문자에는 흔했는데, 현대의대표적 음절문자로 일본의 가나가 존재한다. 표음문자의 경우 한 문자가 고유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숫자나 그림문자, 혹은 이것에서 발달한 상형문자 등 문자 하나하나가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표음문자의 경우 필요한 문자는 뜻의 개수와 비슷해 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문자 체계는 &. $, %등의 어표 문자를 포함하여문장의 시작과 끝이나, 특정 단어들의 해석과 발음 방식을 제시하는 보조격 역할인 어표문자 또한 존재한다.

문자 개발을 위해 말의 최소 단위(화소)를 찾아 낼 수 있었어야 했는데 이를 처음부터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독립적으로문자를 고안한 사례는 BC. 3000년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와 BC.600년 전 이전의 멕시코뿐이고, BC. 3000년의 이집트와 BC. 1300년의 중국 또한 독립적으로 문자를 개발했다고 추정된다. 수메르지방의 사람들은 수확한 곡식의 회계를 위해 문자를 발달시켰는데, 점토판에 그들의 회계문화, 달력기술, 산술결과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메르인들은 그림문자에서 좀더 쓰기 편한 갈대 첨필을 쓰기 시작하며 글씨를 추상화 하기 시작했다. 회계기록일 뿐인 이 문자에 문자를 조합해 차츰 추상적 문자들이 더해지기 시작했고, 동음이의의 단어들을 동음단어를 사용하여 표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각 단어의 발음을 붙여 새로운 단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레부스의 원리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동음이의어의난립 때문에 수메르인들은 문법적 어미에 해당하는 문자 등의 문법적 한정기호를 도입하였다. 이리하여 수메르인들은어표, 한정기호, 음성기호의 세 가지 문자를 사용하였다. 또 다른 독자적 문자인 마야 문자는 수메르 문자처럼 어표와 음성기호를 둘 다 사용하였고, 레부스 원리를 도입하였다.

그 밖의 문자들은 모두 청사진 복사 혹은 아이디어 확산으로 만들어졌다. 터키 학자들이나, 뉴기니 및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 로마자를 부분수정하였는데, 이는 청사진 배끼기에 해당된다. 키릴문자 또한AD. 9세기 러시아어를 표기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알파벳을 변형해 만든 것이다. 사실 문자의 형태를 통해 추론해 보면, 대다수의 유럽 문자들은 쐐기문자의수십번의 청사진 복사로 만들어 진 결과물이다. 이 청사진 배끼기 과정에서 자국어의 화소에 맞추어 몇몇글자들이 사라지기도 했으며, 다른 언어에서 빌려오기도 하였다. 현재알파벳은 셈어의 청사진 배끼기 산물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셈족은 근처 이집트가 사용한 수많은 상형문자중 단일 음을 가진 24개 문자를 주의깊게 살펴보았을 것이고, 이에힌트를 받아 음소문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셈족의 알파벳은 세가지 특징을 가졌는데 음소문자였다는점과, 문자의 기원을 가르키는 단어의 시작이 해당 문자였다는 점과, 모음을추가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아이디어 확산은 청사진 배끼기처럼 문자가 전달되지 않고 문자라는 개념만전해졌을 때 일어난다. 체로키 인디언 세쿼이아는 백인들이 사용하는 문자라는 개념을 알고 개발을 시작해, 음절을 분리한 85개의 문자만으로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 내었다. 한글과 오검의 문자 또한 아이디어 확산을 통해 개발되었지만, 다른문화에 영향을 받고, 참고했을 것이다. 이집트 문자는 가까이수메르 문자가 있었다는 점에서, 수메르 문자처럼 문자의 발달 과정이 발견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아이디어확산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엘람문자, 크레타 그림문자, 히타이트 상형 문자 등도 아이디어 확산에 의해 만들어 졌을 것이다.

문자가 광범위하게 퍼지지 않은 이유는 문자의 기능, 쓰임새, 사용자 등의 한계일 것이다. 초기 문자는 전보용 약문 수준의 모호하고 표현도 풍부하지 않은 불완전한 문자였다. 또한 이 문자들을 다루는 필경사 수 또한 매우 제한적이였으며 그들이 문자를 사용한 목적은 주로 회계, 사무, 종교의식, 천문등일 뿐이었다. 이러한 문자의 한계는 문자 고안이 특정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 해 주는데, 필경사의 교육 유지를 위해 상당한 계층화와 식량 생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자의발명은 곡식 생산이 대규모적이고, 빨랐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훗날 효과적인 농업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지만, 이들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문자가 발명되는속도보다는 문자가 전파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문자가 전파되는 속도는 물리적 거리보다 지형적 장애물과정치적 경계와 더 연관이 깊었으며 이는 인간의 발명품 전파속도와 똑같은 요인이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 , >는 서울대학도서관의 최다 대출도서로 꼽힐 만큼 매우 저명한 책이다. 나 또한 3년전쯤 이를 읽어 보았고, 우리 학교의 13권에 달하는 비치도서가모두 대출중인 상황일 정도이다.  <, , >는 근본적으로유럽이 세계를 정복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이를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기준을 생각해 말하기를 좋아하나, 다이아몬드는 사회학적관점으로 이를 객관적으로 잘 설명해 내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 또한 존재하는데, 블로트는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는 책에서 다이아몬드의 해석이 또 다른 유럽 중심주의의 시각일 뿐이고 모든인류가 창조적이고 동등한 지적 수준을 지녔다는 대 전제 하에 논의를 전개하다 가끔 문화의 차이를 비 창조적 민족들로 설명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오리엔트 지방의 문자가 중국 갑골문자보다 더욱 오래되었다고 추정하는 다이아몬드의 태도를 비난하는 블로트의 반론이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문자가 가장 오래 된 이유는 서방의 고고학적 발굴이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중국의 경우 기술 미흡을 이유로 발굴을 미루고 있는 병마용처럼 드러나지 않는 유적들이 매우많으며, 중국이 대대적으로 발굴 및 연구를 시작하면 역사가 어떻게 다시 쓰일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최근 골각문자라는 기원전 4000~4500년 전의 문자가새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수 많은 블로트의 <, , > 비판을읽어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두 저자 모두 문화가 그 지정학적 위치에 큰 영향을받는다는 내용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넓은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동일 위도대(기후대)에서 다양한 동식물을얻을 수 있는 반면, 아메리카는 남북으로 대륙이 넓어 기후 분포에 비해 종의 다양성 측면에서 불리했다고 주장하면 블로트는 유라시아 대륙의 온대 위도는 상당수가 사막과고원으로 농사짓기 부적합한 지역이다라는 식의 반론을 제기한다. , 문화의 자연 발생적 측면에 대해 지리적 영향에 대한 갈등이 있는 것이지 민족의 개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나 역사속 인물의 영향력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인쇄술을 유럽에퍼뜨린 구텐베르크가 실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다이아몬드와 블로트의 환경론적 주장에 의하면 결국 당시 시대적 환경에 따라 2의 구텐베르크가등장하여 인쇄술을 도입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심지어 위대한 세종대왕이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도집현전의 누군가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체로키 문자를 아이디어확산으로 개발한 세쿼이아가 없었어도 누군가는 문자를 개발했을 것이다.하지만 실재로 북미의 수 많은 인디언들은 아이디어 확산을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스스로 고안해 낸 사례는 체로키 뿐이었고, 동아시아의 불편한 한자권 문화중 새로이 문자를 일찍히 스스로 개발한 문명은 조선뿐이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신 항로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15세기에는 콜럼부스가 없었어도 신대륙은 언젠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왕조 중에서도 유별났던세종이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한글은 결코 만들어 지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 2의 구텐베르크는 금방 나타날 수 있었겠지만, ‘ 2의 채륜은 수백~수천 년 후에 나타났을 수도 있다. 인류 문화의 판도가 바뀌었을 지도모른다. 기원전 2000년 전의 수메르 문명, 고대 그리스 문명, 혹은 고대 중국 문명 등은 측량의 발전 단계에서자연스럽게 피타고라스 정리를 찾아 내었다. 하지만 문명은 수천년의역사를 자랑하는 관개수로를 모두 파괴해 결과적으로 이라크 지방을 모두 사막화 시켜버린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모두 태워버린 술탄처럼 인간에 의해 엄청난변화를 겪기도 한다. 이러한 요인은 다이아몬드가 설명했던 농업의발달은 문자 발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 부분에서 다이아몬드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면 타 문명들도 충분히 문자를 개발했을 것이라 예측했지만 최초로 파피루스를 발명한 사람같은 인간의 변수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문화의 발달은 시간에 따라 선형적으로 발달하기도 하나, 특정 몇몇 단계에서는 창조적 발견이 덧붙여져 계단 형태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문화 발달은 결코그렇게 자연 환경에 완벽하게 수동적이지 않다. 예컨데, 대다수의문자 전파는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일어났을’ ‘청사진 배끼기를 통해 전파되었지만, 극소수의 문화권은 자신의 고유어에 알맞게 새롭게문자를 개발하였다. 각 문명이 처한 자연 환경에 따라 그 원인을 설명하는 환경론또한 매우 합리적이나, 서구문명의 세계 정복에 대한 필연성과 당위성을 지나치게 부여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위에서 보인 여러예시처럼, 인류는 한 지역의 자연환경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으며, 종을 전파해 생태계를 흔들고, 몇몇 동식물과 균 종을 멸종시켰듯스스로 범 지구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저지른 수많은 과오나, 비인륜적 행위, 파괴 행위를 자연 환경에서 원인을 찾아 합리화 시키면 안 된다. 스페인 군단이 잉카문명에 전파한 유라시아의 전염병은 언젠가는 다른누군가가옮겼을 테지만, ‘아타왈파 황제를 살해하고 제국민을노예화한 일은 인간프란시스코피사로가 했다. 이 둘의 구별은 항상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서구학자들이 이러한 지나친 환경론적 문화 발달 설명의 내면에는스스로의 과거를 합리화 하려던 엣 유럽의 관념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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