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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성공회의 수립 - 얽히고 섥힌 톱니바퀴
게시물ID : history_94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insiedler
추천 : 3
조회수 : 6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23 15:41:04

오늘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이 이혼이 승인된 날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영국이 로마가톨릭을 버리고 영국만의 독자적인 성공회 설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보통 세계사를 배울 때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존 왕비였던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는데 당시 가톨릭의 교리 문제로 이혼을 불허했고, 로마교황이 동의하지 않자 "로마 조까!"를 외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가르치는 편입니다. 사실 그놈의 이혼 문제가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 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1. 헨리 8세의 사정 - 나는 왜 햄보칼수 엄써!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의 부인이 될 여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형수가 될 사람이었는데요. 아서가 요절하는 바람에 그 동생인 헨리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서와도 사실 거의 형식적인 부부 관계나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헨리 8세가 물론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금슬도 꽤 좋은 편이었고, 몇 차례 아이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무슨 영문인지 사산되거나,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장성하기 전에 요절합니다. 이 두 부부 사이에서 유일하게 장성한 아이가 훗날 영국의 여왕이 되는 메리입니다. 초창기에야 뭐 급할게 없었겠지만,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6살 연상이었던 점이 문제였습니다. 즉,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가망이 줄어들고 있었던 겁니다. 이는 당시 헨리 8세의 위치를 고려하면 정말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이야기를 쉽게할 수 있지만, 당대 유럽에는 그야말로 모두가 정통성있다고 생각하는 가문에서 왕이 나오지 않고, 다른 인물이 왕위에 오르면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실례로 러시아에서 이반 뇌제를 끝으로 류리크 왕가의 피가 끊어져 그 사위가 차르를 계승하자 온갖 잡음과 함께 반란에 시달릴 정도였습니다.
당대 잉글랜드에는 플랜태저넷 왕가를 정통왕가로 보고 있었습니다. 반면 헨리 8세는 튜터 왕가를 창시한 인물입니다. 사실 튜터 가문도 플랜태저넷 왕가와 이어진 가문이긴 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튜터 가문은 족보에서 저 어디 구석에나 겨우 올라있을 정도로 거리도 먼 듣보잡 수준이었습니다. 실제 이 문제로 인해 헨리 8세는 왕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플랜태저넷 왕가 관련 인물들을 꽤 많이 잡아죽인 편입니다.

어쨌든 튜터 가문이 안정적으로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사내 아이의 존재가 필수였습니다. 그런데 캐서린 왕비는 사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성서의 구절을 어겨 신의 노여움을 사서 저주를 받은게 아니냐는 식으로 고뇌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헨리 8세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앤 불린이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결국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하면 안된다는 성서의 구절을 어겼다는 사실을 고해하고,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청구하게 됩니다.


2. 카를 5세의 사정 - 아니 이 새끼가?

카를 5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이하 HRE)의 황제입니다. 왜 뜬금없이 HRE의 황제가 나오나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카를 5세는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로 HRE의 황제이나, 오스트리아의 군주이자, 스페인의 군주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른 사람이 실질통치를 하긴 했지만요. 어쨌든 캐서린 왕비는 아라곤이란 지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스페인 출신인데 카를 5세가 바로 캐서린의 조카입니다.

헨리 8세는 즉위한 이래로 줄곧 카를 5세의 지지 세력이었던 까닭에 잉글랜드와 HRE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얼마안가 틀어지게 됐는데 당시 유럽에는 "힘의 균형을 이룬다"는 빌미로 리즈 시절을 구가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단체로 대항 전선을 구축하여 밟아 죽이려는 희안한 전통을 가진 동네였습니다.


당시 HRE에 대항하던 세력은 교황권 신장을 노리던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였습니다. 여기에 교황이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보니 이쪽과 연고가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몇몇이 연합하여 소위 "꼬냑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문제는 헨리 8세가 유럽대륙의 문제에 개입하여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계산에 덜컥 꼬냑 동맹에 가담을 하게 됩니다. 물론 교황을 비롯하여 꼬냑 동맹에서는 "섬나라 듣보잡들의 도움따위 필요없어! 껒!"을 외쳐댔지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끝에 겨우 막차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꼬냑 동맹은 카를 5세를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제국군이 출동하여 꼬냑 동맹을 그야말로 가루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게다가 교황의 성도였던 로마까지 쳐들어가서 탈탈 털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교황이 황제에게 용서를 구걸해야 되는 상황이 터지게 됩니다.

일단 잉글랜드는 거의 이름만 올린 수준이었고, 그간의 관계와 캐서린 왕비를 생각해서 카를 5세가 크게 질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헨리 8세는 카를 5세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직계 친척관계(고모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인 캐서린과 혼인 무효를 청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야말로 격분하게 됩니다.

일단 헨리 8세가 청구한 혼인 무효 사유는 문제가 없고, 형식적인 사유를 내걸어서 이혼한 사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허가를 해줘도 크게 캥기는 것은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황제님이 빡치면 교황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을 앞선 사건을 통해 몸소 체험했다는 거고, 당연히 카를 5세의 분노를 전해들은 교황 입장에서는 황제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결국 유형무형의 압력을 받게 된 교황은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청구를 기각해버립니다.


3. 잉글랜드 교회의 사정 - 로마 조까! 여긴 잉글랜드야!

종교개혁 이전까지 가톨릭은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경직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가톨릭이 공인되던 시절의 의식과 절차, 특성을 무조건 준수해야만 제대로 된 가톨릭으로 간주되던 시절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어는 나라에 위치하건, 그 나라가 무슨 말을 쓰건 그리고 무슨 문화를 가지고 있건 모두 관심 밖이었습니다. 모든 미사는 당대에는 집권층 정도만이 겨우 알던 라틴어로 집전해야 했고, 그 나라 만의 고유특성들은 전부 삿된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유의 문화와 접목된 독자적인 형태의 신학은 논할 수 없었고, 오로지 로마에서 다루는 신학만이 전세계 유일의 신학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와 그 주변 성직자들은 심각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유럽 대륙과 분리되어 있던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신학이나 종교행사 문제로 사사건건 간섭하는 로마가 아니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크랜머 대주교를 중심으로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특성을 갖추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때마침 교황청과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크랜머 대주교는 왕의 측근이기도 했는데 이 문제에 개입하면서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태클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헨리 8세는 크랜머 대주교의 제안에 솔깃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무엇보다 헨리 8세는 효과적인 중앙집권과 국가 통제를 위해 왕이 국가의 수장이자 교권의 수장이 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현 로마 중심의 가톨릭 체제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1533년 5월 23일,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러신 왕비의 혼인이 무효임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이를 빌미로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앤 불린을 왕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잉글랜드의 교회개혁이 추진되어 크랜머 대주교가 원했던 잉글랜드만의 독자적인 신학 정립과 함께 성공회가 영국 국교회로 자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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