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사진 속 어머니는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송영도 씨(당시 46세)다.
1980년 5월 21일, 송 씨는 석가탄신일을 맞아 가족들의 건강을 빌기 위해 광주 동구 서남동(당시 구시청 사거리) 집에서 절로 가던 중 이웃주민을 만났다.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밥도 못 먹으며 군인들과 밤새 싸우고 있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송 씨는 "내가 데모는 못하지만 그런 일은 해야지"라며 성금 1000원을 낸 뒤 함께 모금을 했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 10만 원으로 동네슈퍼에서 빵과 우유, 찐계란 등을 샀다. 그러고는 전남도청으로 가 '독재타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있던 시민들에게 빵 등을 나눠줬다.
송 씨는 한 시민이 대치하던 계엄군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도 밥을 못 먹고 있을 텐데 먹을 것을 갖다 주자"는 말을 듣고 찐계란 여러 판을 건넸다. 남동생 같았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고맙다"며 허겁지겁 계란을 먹었다.
송 씨는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귀가했다. 그런데 집에 오니 아들(김완봉 군·당시 15세·광주 무등중 3년)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자 엄마를 찾으러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던 송 씨는 이웃주민들로부터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숨진 사람 가운데 머리가 짧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밤새 시내 병원들을 찾아 헤맨 송 씨는 22일 오전 광주 적십자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고 바로 실신했다. 아들은 엄마와 길이 엇갈려 도청 앞까지 갔다가 계엄군의 집단발포 때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에서 홀로 내려와 결혼을 한 송 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사남매를 키웠다. 우등생이었던 외동아들은 그에게 삶의 등불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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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5030314324
착불이요~하는 뇌 없는 쓰레기 새끼들이랑 같은하늘아래 있다는거 만으로도소름끼침.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