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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년 한국사랑’ 美언더우드家 “이젠 떠납니다”
게시물ID : sisa_54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111
추천 : 10
조회수 : 27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4/05/10 20:33:19
‘119년 한국사랑’ 美언더우드家 “이젠 떠납니다”  
 
 
 
[동아일보]
《‘영원한 한국인’ ‘한국 교육과 교회의 큰 별’ 연세대 설립자이자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로 한국의 교육과 종교,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언더우드(Underwood) 일가가 입국 119년 만에 한국을 떠난다.》

언더우드 1세(한국명 원두우·元杜尤)의 증손자인 원한광(元漢光·61)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한국에서 우리 언더우드 가족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며 “올가을에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부인 낸시 언더우드(한국명 원은혜)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도 이번 봄학기를 끝으로 교수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상태.

원 위원장 부부는 10월 중 30여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자녀들이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에 정착할 예정이다.

원 위원장은 “오래전부터 내가 우리 일가 중 한국에서 봉사하는 마지막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떠날 시기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원 위원장이 떠나면 일가 중 개인컨설팅회사에 근무하는 원 위원장의 동생 원한석씨(49)만 국내에 남게 된다.

언더우드가와 한국의 인연은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런던의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언더우드 1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에서 살다 그해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다. 그 후 2세 원한경(元漢慶) 박사와 3세 원일한(元一漢) 박사, 4세 원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가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과 연세대 재단이사 등을 맡으며 한국 사학의 발전을 주도했다.

이들은 또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가문으로 한국의 교회, 시민운동뿐 아니라 한미관계 발전에도 두드러진 공적을 남겼다.

이들의 한국 사랑은 유별났다. 언더우드 1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민족이 일본에 주권을 침탈당할 만한 나라는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다”며 “문화를 보존하고 나면 언젠간 독립국가로 바로 설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곳곳에서 ‘한국의 어둠, 속박, 우울로부터 한국의 빛, 꿈, 소망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기도가 들어있다. 그의 한국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백두산 천지의 깊이를 잰 것도 이들 1세와 2세 부자로 알려져 있으며 작고한 1세부터 3세까지 모두 ‘마음의 고향’인 한국에 묻혔다. 2세부터 4세까지 태어난 곳도 한국이다.

올 1월 타계한 원일한 전 이사는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로 애틋한 한국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4세대에 걸친 일가의 부인 중 한국인은 없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한국인이 됐다는 의미다.

서정민(徐正敏) 연세대 신학과 교수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한국을 사랑하고 이해한 서양인 가문”이라며 “섭섭하긴 하지만 이들이 떠나는 것도 엄연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연세대는 2001년 ‘언더우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는 등 설립자 가문에 대한 기념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지난해 말 언더우드 2세가 1920년대부터 살던 옛 집을 다듬어 ‘언더우드가 기념관’으로 개관했으며, 원 전 이사 사택의 수천 점에 이르는 자료 등을 정리해 전시할 계획이다. 또 2001년 ‘언더우드 선교상’을 제정해 3회까지 수상자를 배출했다.

유재동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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