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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조선후기 대표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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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조총
추천 : 3
조회수 : 366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8/19 09:17:18

“군대의 무기에 있어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1675년(숙종1년) 조선의 영의정이었던 허적(1610~1680)이 남긴 말이다. 어린아이도 조총을 가지고 있으면, 천하장사 항우라도 이길 수 있다는 이 말은 조선 후기 사람들이 조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조선 지방군들만 10만 4000정 보유

조 총(鳥銃)이란 무기 이름은 새를 쏘아 맞힐 수 있을 만큼 성능이 좋은 무기란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1460~1480년대 사이 유럽에서 처음 개발된 무기로 1543년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아시아 세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 직후인 1550년대를 전후해 중국 명나라에도 전해졌다. 조총은 화승(火繩) 을 이용해 화약에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하는 화승식(Matchlock) 총의 일종이다. 동아시아에 조총을 처음 도입한 시기에 유럽은 아케부스(arquebus, 아르케부스) 방식의 화승총에 뒤이어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크고 화력이 강한 머스킷(Musket) 방식의 화승총을 이미 운용했다. 일본과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조총은 크기나 위력 면에서 기본적으로 아케부스에 더 가까운 화승총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았다. 사진은 일본의 조총 발사 재현 행사의 모습. <출처: (cc) Corpse Reviver at wikipedia>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 대마도주가 조선 국왕 선조에게 선물로 보내면서 처음 전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치명적인 무기로서 조총의 위력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해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연패하게 되자, ‘무서운 무기’로서의 조총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노획한 일본 조총을 모방해 국내 제조에 성공하면서, 대량 보급의 길이 열렸다. 2007년 발견된 조선 시대 충청도 속오군의 병적기록부를 보면 1600년대 후반 충청도 병사 중 76.5%가 조총이 주특기일 정도로 조총 무장 비율이 높았다. 1896년을 전후한 대한제국 무기재고표를 보면 조선의 구식군대가 보유하고 있던 조총의 수량이 서울과 함경도 병력을 제외하고도 10만 4,028자루로 되어 있어 그 어떤 무기보다 수량이 많다. 또한 조총용 탄환인 연환의 보유량은 2,156만 8,291발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수치를 고려하면 중앙군을 포괄한 조선 후기 전체 군대의 조총 보유량은 20만 자루에 육박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총은 조선 후기의 대표무기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큰 피해를 준 조총은 조선 후기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거듭나게 된다. 사진은 조선 시대의 조총. 조총은 화승총의 일종이다.

 

 

명중률, 휴대성 면에서 월등했던 조총


조 총이 탄생하기 이전의 휴대용 화약 무기들은 대부분 크기만 작게 만들었을 뿐 대포와 유사한 형태에 나무자루를 부착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수포(Hand Gun)나 우리나라의 승자총통 같은 이런 초기형 화약 무기들은 별도의 점화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불이 붙은 심지를 화약이 저장된 총신 내부로 밀어 넣어야 사격이 가능했다. 이런 원시적 화약무기들은 점화를 한 다음에는 조준할 새도 없이 발사되었기 때문에 높은 명중률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다.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화승이 화약접시 속으로 들어가 점화용 화약에 불을 붙이고, 이 불이 총열 내부의 발사용 화약에 옮겨 붙어 탄환을 발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승은 매우 천천히 타 들어가므로 일단 불을 붙인 상태로 대기하다가 내가 원할 때 방아쇠를 당겨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우리나라 일부 사극에서는 조총의 화승을 마치 도화선처럼 묘사해서, 화승이 다 타들어가서 화약으로 불이 옮겨 붙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화승이 점화용 화약이 들어있는 화약접시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발사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시작되는 구조이므로 이 같은 드라마의 장면은 실제 조총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 시대 조총의 세부 모습.

 

 

또 한 조총은 수포와 달리 열전도율이 낮은 나무로 금속제 총신의 아랫부분을 감싸고, 뒷부분에는 개머리판과 유사한 형태의 나무 부속까지 부착해 현대 소총과 유사한 수준의 휴대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속제 총신에는 표적을 직접 조준하기 위한 간단한 구조의 가늠쇠와 가늠자도 있었다. 이런 구조 때문에 조총은 가슴·어깨·뺨 등에 보다 안정적으로 고정시킨 다음, 적을 정확하게 조준한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시점에 사격할 수 있었다. 그 차이는 혁신적이어서 적을 소리로 놀라게 하는 ‘신기한 무기’에 가까웠던 휴대용 화약 무기는 조총 출현 이후부터 ‘무서운 무기’이자 ‘잔인한 무기’로 돌변했다.

 

 

구경 13~16mm급이 가장 흔해


현재 전해오는 조선 시대 조총 중 구경이 가장 작은 것은 7mm급 정도, 최대급은 25mm급이고 가장 흔한 유형은 13~16mm급이다. 길이는 90~140cm 정도이며, 무게는 4kg 이하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30~50m 수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관통력, 명중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수치일 뿐 무기 자체의 성능상 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조총일 경우 200m 이상의 거리라면 사람을 살상하는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조준한 목표를 맞춰 신체상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100m 이내이며, 숙련된 사격자일 경우 100m 이내라면 10발 중 8~9발은 사람의 상반신에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실제 구경 9~16mm급에 3~6몬메(11.25~22.5g) 탄환을 사용한 일본의 표준형 조총으로 실험한 결과를 보면 30m정도에서는 확인 사살이 가능한 수준이고, 50m부터는 대략 표적을 맞추긴 해도 탄착점이 조금 분산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일반적인 조총보다 구경이 더 큰 조총도 있고, 혹은 일본의 대통이나 우리나라의 대조총, 천보총처럼 완전히 별개의 무기로 간주되는 화승총 계열의 총들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표준형 조총보다 사거리나 관통력 면에서 더 위력이 강한 사례도 많다는 점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 사격 절차는 총 14단계

1603년에 나온 [신기비결]은 조총의 사격 절차를 총 14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세총(洗銃) : 총을 씻는다. (총열 내부를 청소하는 단계)
   2. 하화약 (下火藥) : 총구를 통해 발사용 화약인 신약(身藥)을 넣는다.
   3. 이삭장 송약실(以朔杖,送藥實) : 꽂을대(삭장)로 신약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4. 하연자(下鉛子) :총구를 통해 납탄환(연자)을 넣는다.
   5. 이삭장 송연자(以朔杖,送鉛子) : 꽂을대로 탄환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6. 하지(下紙) : 총구를 통해 종이를 넣는다. 
   7. 송지:(送紙) : (꽂을대로) 종이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8. 개화문(開火門) : 화문을 연다. (화문은 점화용 화약이 들어가는 약통, 일명 화약접시의 덮개 역할을 한다)
   9. 하선약(下線藥) : 화문으로 점화용 화약인 선약(線藥)을 넣는다.
   10. 요화문 사문약 하합어신약(搖火門,使門藥,下合於身藥) : 총을 흔들어 점화용 화약과 발사용 화약이 섞이게 한다.
   11. 잉폐화문(仍閉火門)  : 화문을 닫는다
   12. 용두안화승(龍頭安火繩) : 용두에 화승을 부착한다.
   13. 청령 개화문(聽令,開火門) : 명령에 따라 화문을 연다.
   14. 준적인 거발(准賊人,擧發) : 적을 겨누고 사격한다.

 

점 화용 화약이 담겨있는 약통은 접시 같은 모양이어서 뚜껑에 해당하는 화문을 닫지 않으면 점화용 화약이 바람에 날릴 염려가 있다. 선약을 넣은 후 11단계에서 화문을 닫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발사 직전에는 다시 화문을 열어야 한다. 14 단계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그 다음 단계는 자동으로 진행된다. 방아쇠를 누르면 용두에 물린 화승이 열린 화문을 통해 약통 안으로 쑥 들어간다. 이때 점화용 화약에 불을 옮기게 된다. 점화용 화약에 붙은 불은 총신 내부의 발사용 화약으로 순식간에 옮겨붙어 총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탄환이 발사가 된다.

 

 

거리 100m에서 뺨에 대고 조준 사격

현 대 소총 사격술에서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견착시키는 방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화승총이 출현한 초기에는 개머리판 내지 이와 유사한 부속을 뺨, 가슴 등에 붙여서 사격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일본식 조총 사격술에서는 조총의 개머리판을 뺨에 붙여 쏘는 법을 흔히 사용했다. 일본학계에서는 뺨에 부착해서 사격하는 방법이 사격 속도는 느리지만 사격 정밀도는 더 높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각 사격방법의 차이와 장단점에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이 같은 일본식 사격술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조총의 개머리판의 길이와 형태를 보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어깨보다는 뺨에 고정시킨 상태로 사격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병서인 [병학지남주해兵學指南註解]의 ‘조총방법’(鳥銃放法)이란 항목을 보면 당시 사격술에 대해 “총은 마땅히 뺨에 붙여야 하고, 조성(가늠자)으로 전조성(가늠쇠)을 마주하고, 전조성으로 표적을 향하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병학지남주해]에는 ‘머리, 팔, 앞무릎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설명도 있는데, ‘앞무릎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은 조선 군대의 표준 사격 자세가 일본의 슬대(膝臺), 현대의 ‘무릎 쏴’ 와 비슷한 자세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기록이다.

 

유럽에서는 화승식 총을 운용할 때 일반적으로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속한 동시 일제 사격’을 대단히 강조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오히려 사격이 다소 지연될지라도 정확한 조준을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의 병법서인 [진법언해] 를 보면 “조총 총구를 적의 가슴을 향해 겨누고, 말을 탄 적이면 말머리를 겨누라’고 지시한다. 또 “적이 많이 몰려와도 그 가운데 하나를 겨누어야지 마구 쏘아서는 안 된다”는 설명도 적혀 있다. 즉 조선군 조총수들은 적이 보병이면 가슴을 조준하고, 적이 기병이면 말머리를 조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적이 많아도 지향 사격을 하기보다는 그중에 한 명만 조준해서 사격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군도 사격 속도보다는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강조하는 방식의 사격법을 썼던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인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 중 포수 그림. 팔에 화승을 감는 모습이나 화약을 담은 약통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 선 시대 조총 사격 사거리는 훈련, 시험 때마다 적용하는 기준이 약간씩 달랐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수군이 실전에 적용한 사거리는 [수조규식](水操規式, 조선시대 수군 규범)을 기준으로 각종 총통은 200보(약 240m), 조총은 100보(약 120m), 활은 90보(약 108m)로 되어 있다. 즉 조총은 활보다는 더 멀고 총통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적을 향해 사격했던 것이다.

 

 

조선 조총수는 5단 연속 사격이 기본

조 총으로 대표되는 초기형 총들은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너무도 느린 발사속도, 둘째는 이에 따른 근접전에서의 취약성이다. 두 번째 약점의 경우 창병 등 다른 병종의 도움을 받거나 총에 총검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이 세계사적인 흐름이었다. 첫 번째 약점인 발사 속도가 느린 문제는 기계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법이지만 이 같은 기술적 혁신은 훨씬 훗날에야 가능했기에 17세기 무렵에는 총병을 3열, 혹은 5열로 나눠 앞열이 사격할 때 뒷열에서 미리 장전 준비를 해서 차례로 연속하는 사격법으로 속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접근법이었다.

 

일본에서는 1575년 오다 노부나가(織 田信長)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3단 철포’ 방식의 사격술을 최초로 도입, 다케다(武田)군 기병대를 무찔렀다는 견해가 한때 널리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은 오다가 이 같은 전술을 창안한 것이 맞는지 여부, 당시 일본 조총부대가 연속사격 같은 체계적인 전술을 구사할 만큼 조직화되고 훈련되어 있었는지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과 별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3단 연속 사격 방식을 채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임진왜란에 당시 명군의 각종 기록과 문서를 모은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보면 1593년을 기준으로 왜군이 ‘조를 나눠 번갈아 쉬고 나가는 법(分番休迭之法)’을 썼다고 되어 있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중국의 화약무기 서적인 [신기보神器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철군한 명나라 군대가 교대로 조를 나눠 화약무기로 타격하는 법(火器更番撃打)을 썼다고 되어 있다.

 







중국 [군기도설]의 조총윤방도. 중국에서는 1600년대 초반에 조총 3단 사격이 보편화됐다.

                                                                                                                    조선 후기 조총 5단 사격 개념을 보여주는 조총윤방도. 좌우 2명씩 5열로 도열해 있다. 제일 앞줄이 사격하고 뒤로 물러나면 그 다음 열이 사격을 하는 식으로 연속사격을 한다.

 

 

이 런 기록만으로는 이것이 조총의 연속 사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애매하지만 1638년 명나라에서 간행된 병서인 [군기도설軍器圖説]에서는 조총 3단 연속 사격 개념을 그림으로 넣어놓고 ‘조를 나눠 번갈아 나아간다 (分番迭進)’라고 설명해 놓아 [경략복국요편]에 나오는 설명이 조총 3단 연속 사격임을 지칭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어도 1600년대 중엽 이후 조선 후기 표준교범으로 사용되어온 [병학지남]에 조총 5단 사격 개념을 보여주는 그림이 포함되어 있어 이미 이때부터는 체계적인 조총 연속 사격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조총 장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조총 1발 사격에 필요한 화약과 탄환 등을 별도의 작은 통에 수납해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재장전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목적으로 나무로 만든 약관 20개를 휴대하기도 했다.


원글 - viva69님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iva69&logNo=2016450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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