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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핵무장 의지 및 가능성 - 현실과 한계
게시물ID : history_95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wHat
추천 : 10
조회수 : 97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5/28 09:41:55
제 전공은 원자력공학입니다.
현재 해외로 유학와서 계속 공부중이고, 오기 전에는 관련기관에서 몇년간 종사도 했습니다.
대학, 대학원 시절 배운건 우리나라의 원자력기술 뿐만 아니라 관련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렸을때는 저도 우리나라가 핵무장을 하면 우리나라도 강국이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10수년간 역사의 산증인이셨던 교수님들과 박사님들, 연구원분들께 배우고 듣고 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북한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악한 에너지 환경 때문에 처음부터 대규모 에너지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미국 체류시절부터 원자력에너지에 대해 눈독을 들였으며,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제일 먼저 만든 국가연구소가 원자력연구소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대의 경우 기계과 보다 핵공학과가 먼저 생겼으며 우수학생을 우선적으로 선발했습니다. 현재 대부분 은퇴하셨지만, 서울대 핵공학과 1~5기 정도 되시는 분들은 우리나라 원자력산업의 기틀을 맨땅에 헤딩해 가면서 쌓으신 분들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원자력계는 서울대 핵공학과 출신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상업용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한 때는 박정희 시절입니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수많은 연구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에 원자력발전소를 현실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에너지 수급차원에서만 이를 준비하던게 아닌게, 당시 원자력발전소 건설 상황및 관련기술을 준비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의 비등경수로(BWR)나 가압경수로(PWR), 또는 캐나다의 CANDU원자로(가압중수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부의 선택은 에너지 수급차원을 넘어 원자력기술의 대부분을 우리 손에 쥐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래서 발전소 뿐만 아니라 재처리시설 관련기술 역시 확보하려 했습니다. (당시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신 이병휘 박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연히 미국은 이를 예상했었으나, 감히 우리나라가 그런 기술들을 배우더라도 이용할 수 있을까, 라고 방심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핵연료 재처리기술을 미국에서 얻지는 못해도 프랑스를 통해 얻을 예정이었습니다. 원자로는 미국으로 부터 가압경수로형 발전소를 도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캐나다로부터 가압중수로인 CANDU형 원자로를 도입하기로 했구요. 1975년 건설부지가 확정되는 등 준비가 되고 있었지요. CANDU의 장점은 핵연료를 자연상태 그대로의 핵연료 사용이 가능하고, 사용후연료를 재처리하면 우라늄235나 플루토늄등을 얻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가압경수로의 경우 2, 3% 수준으로 핵연료를 농축해야 사용할 수 있어 핵연료 농축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농축과정에서 핵무기 개발의혹을 살 수 있어 재처리기술이 없을 경우 농축연료를 전량 수입해야 하고, 이는 원자력기술이 어느정도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당시 기술적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원자력 기술 중 핵무기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는 기술은 아무리 유학생을 많이 받는 MIT라도 절대 외국인에게 약간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입니다.

사건이 터진 건 우리나라에 재처리기술이 도입되기 전이었습니다. 외부인에게는 절대 핵무기 관련기술은 공개하지 않던 미국이지만, MIT 출신의 천재 한명이 유학시절 배운 이론을 토대로 1974년 미국의 예상을 깨고 인도에서 핵실험을 성공해 버립니다. 우리나라는 프랑스와 재처리시설 도입을 두고 한참 협상중이었고, 1975년 4월 프랑스와 용역계약체결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1975년 박정희는 미국의 한국에서 핵우산을 철수하겠다는 말에 '그럼 우리는 직접 핵무기 개발하겠다'라고 배짱을 튕겨버렸죠. 1975년 용역계약 협상 당시 재처리 수준을 핵무기개발이 가능한 순도까지 약속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항공과학기술은 곧 한국형 발사체 개발도 현실화 되었던가 가능한 수준이던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미국은 이런 한국의 상황에 당황하게 되고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프랑스와 체결까지 한 재처리기술 도입계약은 백지화되고, 가압중수로형 발전소는 4기 도입을 끝으로 마무리 됩니다. 항공우주공학 쪽에서도 발사체 개발이 저지당하게 되고, 탄도체 개발에 있어 사거리를 180km로 제한되어 버립니다. (당시 발사체 사거리를 180km로 제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전두환은 나중에 전차용 열화우라늄탄을 지시, 개발이 완료된 시점에서 미국에 또 된통 당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미국은 우리나라가 미국 몰래 핵무기 개발을 할까봐 엄청난 견제와 감시를 가하게 됩니다. 한전의 이사들은 매주 모든 서류자료들을 조사받아야 했으며 핵물질은 g단위로 감시를 받게 됩니다. 이 상황을 가장 반긴 이웃나라가 일본입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과도한 감시를 받는 사이, 일본은 전략적으로 해외로부터 플루토늄을 수입하고 관련기술을 집중투자하여 개발했으며, 그 결과 준비된 핵무기보유 예비국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로 부터 일본이 수백톤의 플루토늄을 수입한 직후 우리 정부에서도 전문가를 보내 진상을 확인하려 했으나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플루토늄 보관장소로 의심되는 발전소 까지 방문하셨다 확인을 실패하신 교수님 증언)

우리나라가 재처리시설을 타의적으로 포기해야 한 이후 그 타격은 관련 연구원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재처리기술을 전공한 연구자들은 취업길이 막혀 해외로 대부분 이직하게 됩니다.

이후, 핵연료의 핵무기 전용이 불가능한 재처리기술 개발에 힘을 기울였던 역사가 있지만 모두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됩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최근에는 핵연료의 핵무기전용이 어려운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을 개발하여 실질적 적용을 위해 미국을 설득하고 있으나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70년대 중반이후, 우리나라의 원자력기술은 전적으로 미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 발전했으며, 결과적으로 핵무기 개발은 요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근원에는 미국의 기본 원칙인, 자국까지 도달 가능한 탄도미사일 + 핵무기 개발은 적국, 우방을 불문하고 금지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인 즉슨, 우리나라가 핵을 가지려 하면 이는 우리가 미국의 우방임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보다 미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신경쓰는 핵은 북한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때문에 가려져 안보일 수는 있습니다만.

따라서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역사적으로나 현재의 상황으로나 0이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오히려 핵무기가 생기더라도 유지하지 않고 처분하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우리가 핵무기 보유를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은 단순히 핵무기 재료값이 아니거든요.






 
 


(원자력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우리나라 원자력의 현실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글 인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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