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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스압/진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의 진실
게시물ID : sisa_3955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mond
추천 : 1
조회수 : 4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5/28 20:56:46







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댓글을 통한 지적은 환영합니다만 근거 없는 비방이나 욕설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모든 분들이 헌법 정신의 함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길 기대합니다. 

그 전에,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이를 증명하는 영상이 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1.13 시민군이 버스로 경찰을 압사하는 영상이 있다.
 
2. 북한군 침입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2.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존재를 아는 시민들은 극소수였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 및 대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3.15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초 사망자는 시민(김경철)이 아닌 경찰이다.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출처 : http://study21.org/518/photo/5-19.htm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247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 이후, 그리고 21일 (오후)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상에서는 시민군이 발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학도가 올린 영상에 나와있는 총을 든 시위대의 모습은 21일 도청 발포 이후의 모습입니다. 다큐멘터리를 악의적으로 편집한 결과입니다. 이는 원본영상 (http://purmeice.tistory.com/175)의 3번 필름에 해당하는 영상으로, 원본 다큐멘터리에서도 21일 계엄군의 발포 이후에 "총기를 든 시민들이 나타났다."라며 총을 든 시민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원본 영상을 그대로 짜깁기해서 진실을 왜곡하려는 저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때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5월 21일 새벽 시민군이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했다는 점을 들어 시민군이 먼저 총기를 발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자」에 시민군이 21일 새벽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한 기록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2군 계엄상황일지」에는 "실탄은 31사단에 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시민들은 단지 빈 총을 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경찰이 최초 사망자라 생각하는 분들은 이 글의 3.15를 읽어주세요.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북한 개입설을 정당화하지는 못 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듯, 근거가 없으므로 신원미상의 시체가 북한군의 시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출처 : http://blog.daum.net/sillasouls/109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을 제거했습니다(아래에 신관을 제거했다는 내용은 신관을 뇌관과 혼용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군에서 폭약을 관리했던 양홍범 씨 역시 뇌관 작업을 먼저 실시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52):

"5월 25일경 문영동씨의 지원요청을 받은 상무대에서는 문관 한 명을 폭약담당반으로 보내왔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TNT 뇌관이 있었는데 25일 하루 동안 나를 제외한 4명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했다. 
5월 26일 역시 나는 수문장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고, 나의 동료들은 문관과 함께 뇌관분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젊은이 한 사람이 지하실로 왔다. 그 젊은이는 내가 처음 이곳을 들어올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안에서 뇌관분리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사람은 뭔가 하려고 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안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밖에서 일을 돕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하여 모두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는 그 젊은이와 함께 보초를 섰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을텐데 뇌관 제거 작업을 먼저 실시했다는 것은 시민군이 TNT를 실제 폭발용으로 사용했다고 보기 힘든 이유입니다. 실제로 도화선 제거 작업을 먼저 시작했다 하더라도, 첫째, TNT 8톤이 가지는 폭발력을 생각해보면 당시 광주 전체를 폭발 시킬만큼의 위력을 가졌다고 보기도 힘들며, 둘째, 무엇보다도 이들이 TNT를 설치함으로써 "광주를 전복하려" 시도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만식 씨가 언급했듯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에 불과하였습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이를 증명하는 영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버스 기사가 당시 불가항적인 상황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버스 기사가 의도적으로 경찰을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조차 없고, 정황 상 그것이 고의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역사학자라는 극우 인사가 20일 당시에 촬영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이지만,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사진은 실제로는 19일 자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원본 자료의 촬영일자까지 악의적이게 왜곡하여 극단적인 주장을 유포하는 이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버스 영상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영상이 아닌 5월 15일, 서울에서 촬영된 영상입니다. 아래의 1.13을 확인해주세요.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81766
http://systemclub.net/bbs/zb4pl5/view.php?id=n_1&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46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와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도표입니다.

구  분

경찰

민간인

비고

사  망

189

23

4

162

민간인 사망자 162명 중 117명이 M1/CAR에 의한 탄흔

642

117

148

377

중상

391

82

27

262

경상

251

35

121

95

 

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지만원 씨는 이와 비슷하게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 "총상 사망자 116명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M16 이외의 총으로 사살됐다는 통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1 채널A에 등장한 서석구 씨는 이를 또 확대해석해서 "69%의 사망자가 카빈 소총에 의해 사망했다"라고 주장했습니다.2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지만원 씨가 해당 게시물에 첨부한 보고서 원본을 살펴 봅시다.3 아래는 보고서의 97쪽입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보고서의 "사망원인" 열에는 총상, M16 총상, 칼빈총상, 타박상, 자상사, 차량사고, 그리고 사인 미상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총상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항목은 "총상," "M16 총상," 그리고 "칼빈총상" 뿐입니다. 69%라는 통계는 이 중 "칼빈총상"에 의한 사망자 뿐만 아니라 "총상"에 의한 사망자까지 모두 포함해서 나온 수치입니다. 여기서 "총상"은 당시 총기를 밝히지 못 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로 후에 밝혀진 사망자와 대조해보면 "총상"에 해당하는 이들 중 계엄군에 의해 죽은 이들이 많습니다. 지만원 씨가 사실로 가정하고 올린 검찰이 1995년 7월에 발표한 수사 결과 보고서 「5·18 關聯 事件搜査結果」를 살펴봅시다.4 수사 보고서 118쪽에서 사인이 "총기 불상"으로 언급된 조규영 씨의 사인은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수사 보고서 120쪽에 언급된 계엄군에 의한 미니버스 사격 사건의 사망자 김윤수 씨의 사인 역시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수사 보고서 126쪽에서 언급된 11공수에 의한 사망자 김윤수 씨와 임병철 씨의 사인도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즉, 사망자의 69%가 M16 이외의 소총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은 어불성설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기부 보고서에서 사인이 "칼빈총상"으로 표기된 학생과 민간인 사망자 수는 88명이 아닌 10명입니다. 서석구 씨는 사망자의 69%가 카빈 소총으로 사망했다고 이를 더 부풀렸으니, 그의 주장 역시 거짓입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mask-troop.htm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까.

1.02에서 언급했듯, 5월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일제히 총을 발사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파출소와 방위산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중화기와 무전기가 북한군에게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당시 일부 시민군이 중무장했던 중화기와 무전기는 바로 그 파출소와 방위산업체에서 탈취된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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