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들이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단어들 중에 특히 더 자주 들리는 것이 '감성팔이', '선동'이다.
이 두 단어는 또한 대부분의 경우 같이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번 세월호 사건, 교황의 세월호 가족 친견 같은 기사에는 어김없이 두 단어가 연이어 등장하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런 댓글들을 계속 접하던 와중 교황께서 말씀하셨다는 한 구절의 말이 보였다.
이 구절을 보자마자 나는 '동정심'이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물론 저 단어가 저 말씀의 중심단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위에서 언급했던 벌레들의 언행에 저 단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벌레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벌레들은 속는 것, 기만당하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극도의 예민함을 보인다.
그 원인은 그들이 주장하듯이 지금까지 많이 속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들이 낚시 혹은 산업화라는 포장을 하여 타 사이트에서 수없이 행해왔던 기만활동 때문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성향이 낳은 결과물은 명확하다.
그 것은 바로 벌레들이 자신들의 장점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FACT 중시 성향',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동정심의 상실'이다.
벌레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함으로써 속을 가능성을 감수하느니 인간다움을 버리고서라도 속을 가능성을 줄이는 것을 무의식 중에 선택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선택으로 인해 그들은 점점 맹자가 인간이 선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제시했던 근거인 '사단(四端)' 중에서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스스로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람이 아닌 벌레라고 부르게 만들게 된 배경인
그들의 인간이 아닌듯한 언행은 이 측은지심 즉, 동정심의 상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른데서 찾을 필요도 없이 그들의 언행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은 인증이 없는 글은 그 글의 진위가 어떻든 조사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단 비난하기 바쁘며
타인의 고통, 특히 자신들과 대립하는 집단에 소속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고통은 희희낙락하며 환호한다.
(이 부분에서 팔레스타인에 가해지는 폭격을 '관람'하며 웃고있던 이스라엘인들이 생각나지만 넘어가겠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는 이런 행태가 속는다는 행위에 대한 결벽증적일 정도의 공포감에서 비롯된다고 고찰했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닿았을때 그들이 왜 보수(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보이는 집단)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 '공포'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는 그의 저서인 '닥치고 정치'에서 보수집단의 사고 근원에는 본인의 것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벌레들 역시 위에서 말했듯 본인이 기만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사고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 본인이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가치'가 그들을 하나로 엮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어찌 해야 하는가?
내 글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대책은 언제나 교육의 강화로 마무리 짓게 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배경지식이 넓지 않아 창의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언제나 잘 가르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사회화 교육만이 답으로 떠올랐다.
벌레들에게 따로 사회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동정심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정이 중요하다고, 그 감정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고, 그 감정이 없는 장애가 바로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라고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시 국영수 교육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이런 교육을 해야 한다.
남과 어울리는 방법, 모든 생각을 손익계산으로 종결짓지 않는 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
이 교육을 시급히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수많은 벌레들을 양산하기 위한 교육을 계속하게 될 것이고
이는 학교에서는 폭력, 대학에서는 똥군기, 군대와 사회에서는 부조리를 일삼는 인간이 아닌 '결과물'을 끊임없이 찍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