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하드론)님 -
그 날 야간 근무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어둠의 병사들은 그들이 약속한대로 김선호와 정한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못찾아도 문제, 찾아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갈수록 김창식 병장의 표정이 수상해져 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취사일만을 하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병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
"김..김병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식재료를 칼질하고 있는 김병장이 알 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김병장은 계속해서 혼자 읊조렸다.
"김병장님...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김병장의 독백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천천히 칼질을 하고 있는 김병장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김..김병장님.."
그러자 김병장님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호통을 쳤다.
"배식 준비 안하고 뭐해 임마!!"
"네..네...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김병장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전상병이 사고를 친 이후로 김병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 어둠의 병사들과 약속한 시간이 돌아왔다.
5초소 주변에는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고, 내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아....신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초부터 그 무당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건 마찬가지인 상황이 돼버렸다.
싸늘한 한줌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산 중에 처박힌 공포의 5초소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게 되자 주변의 사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소 옆 창에 비친 손모양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하이톤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게 공포로 돌변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를 향애 손을 흔드는 나뭇잎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물줄기 소리....
어느 것 하나 공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앞에 비친 무언가는 조금 전의 그것들이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십수미터 앞 아카시 나무.....그 어둠속에서 판초우의를 쓰고 나를 지켜보던 병사가 있던 자리....
그 아카시 나무에 누군가 팔다리를 늘인 채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그를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
"헉..."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평소 찾지도 않던 그들을 불렀다.
"예수님..부처님..신령님...제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자, 힘주어 닫혀있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는 발을 동동구르며 제발 내 눈앞의 그것이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귀신을 본 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던가...어젯밤의 꿈같은 경험이 모두 현실이었음을 나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 세상에 몸 성히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더욱 요절한 귀신들은 온전히 죽지는 않았을 터.....
나는 빨갛게 충혈됐을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내 눈앞에 누군가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죽은 정한수임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 나무에 매달린 형상이 그러한 힌트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무언가에 이끌리 듯 말없이 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근무 중 초소를 이탈하지 말아야 함에도 지금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데로 천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어느 정도 발걸음이 계속되자 나는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취사장임을 알게 되었다.
"쿵....쿵....쿵"
어둠에 묻힌 취사장 안에서 누군가가 쪼그려앉아 바닥에 있는 뭔가를 계속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 실루엣은 김병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서서히 내 눈앞에 비쳐진 것은 산산조각난 고양이 사체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느리지만 반복해서 커다란 식칼로 그 사체를 조각내고 있었다.
"김..김 병장님...."
나의 부름에 김병장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도..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니가 뭔데 여길 들어와!!!!!!!!"
갑자기 김병장의 미친 듯한 일갈과 함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빡!!!!"
식칼이었다.
번개처럼 식칼이 날아와 내 목의 오른편을 지나 식기보관함에 꽂혀버렸다.
나는 순간 얼음처럼 온 몸이 굳어버렸다.
김병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다른 식칼을 찾는게 분명했다.
정신이 든 나는 그제서야 내 오른쪽 목 부위의 작은 통증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으로 그 곳을 만지자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옴을 느꼈다.
내 왼손을 확인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시발...피..."
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즘, 식기함에서 시퍼런 날이 선 식칼을 꺼내 든 김병장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부반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
모두 죽일 생각이다. 그의 광기를 멈춰야 했다.
"철커덕!!"
나는 실탄을 장전했다.
아니...선임하사와 약속대로 나는 실탄을 빼고 근무를 서기로 했기 때문에 실탄을 장전하는 시늉만 냈다.
하필 이 순간에 빈 총이라니...
"김..김병장님...멈추지 않으면 쏠겁니다."
나의 말에 김병장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소름끼치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죽을 것을 각오라도 한건지, 아니면 내 소총에는 실탄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아니면 내가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김병장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김병장의 부릅 뜬 눈보다 그가 들고 있는 시퍼런 식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진짜로 쏠 겁니다..."
그러나 나의 위협은 김병장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의 걸음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총을 힘껏 휘둘러 그의 손으로부터 식칼을 떨어뜨렸다.
칼을 들고 있던 손에 굉장한 고통이 있었을게 분명함에도 김병장은 개의치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병장은 한 손으로 내 소총의 총구를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로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켁켁...기..김병장님.."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듯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김병장의 철근같은 근육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장과 머리를 잇는 혈액의 이동 통로가 모두 차단된 것 같았다.
김병장의 체중과 힘이 벽에 눌려있는 내 목에 모두 전해지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 올가미에 걸린 그 병사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한번도 나를 좌절시킨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김병장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의 충격에 김병장은 잠시 뒤로 물러서며 상체를 숙였다.
나는 수십년간 묵혀왔던 기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 했다.
연신 천식 환자처럼 폐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른 김병장은 갑자기 나를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쿵!!"
내 몸이 벽에 충격을 가하자 나는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이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썩 꺼져버려!!!"
누군가가 호통을 치고 있다.
시야가 흐려져 김병장의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크게 놀랐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쓰러져 있는데 내가 아직 거기에 서 있다.
김병장은 여전히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내가 김병장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여기는 우리 부대야!! 당장 꺼지지 못해!!!"
시야가 흐려진다. 힘겨운 탄식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힘들다....이젠 쉬고 싶다.
"이봐 친구, 괜찮은가"
누군가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떴다.
잔밥통에서 밥을 먹던 그 어둠의 병사였다.
그는 큰 대자로 누워있는 나의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반합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숟가락을 튕기며 나를 불렀다.
어둠은 가시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걸까?
"이봐, 친구...우리가 한 참을 찾아봤는데, 정한수라는 그 친구만 찾았어.
자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자네한테 가보라고 했는데....봤나?"
맞았다. 내가 본 것은 정한수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 목 부위의 통증이 느껴졌다.
"흐흐흐...다행이군. 약속을 다 지키진 못했지만, 자네도 이젠 우리에게 뭔가를 보답해 줘야지?"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이제 우리에게 길을 알려달라고.."
나는 아무말 없이 그 병사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는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연신 입 주위의 분비물을 흘리며 게속해서 히죽거리며 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지난 밤 나를 위협했던 얼굴의 반쪽면이 으깨진 병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굵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말 해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끝에 달린 시퍼런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감보다 절망감이 앞서왔다. 이젠 도망칠 힘도 없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가위 눌린 사람처럼 신체 어느 부위하나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나는 오로지 눈동자만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거라고 했을텐데...이제 말해..."
"죄송합니다. 큭큭...."
절망감과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나는 급기야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전히 몸은 마비가 일어난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으깨진 병사는 내 말을 듣자 내 몸을 가운데 두고 서서 소총의 대검을 내 목에 겨누었다.
"무슨 말이야?"
이 공포의 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솔직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큭큭...거..거짓말을 했어요..."
그의 얼굴 한 쪽면에 드러나 있는 이빨들이 분에 겨운 듯 맞물려 갈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