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헝거>를 본 이들은 대개 16분의 압도적인 롱테이크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티브 맥퀸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오히려 벽에 쳐바른 똥이나, 복도로 흘려보낸 오줌,
그리고 마이클 패스벤더의 깡마른 몸에 모두 담긴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문득
목숨 걸고 단식하는 사람 옆에서, 조롱하며 폭식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리뷰는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었습니다.
덧- 깁니다. 역겹습니다.
"내 삶을 끝내기를 원한다는 게 아니라 내 삶이 이런 식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
이라고 말한 영국의 존엄사 운동가 데비 퍼디 ⓒ BBC
단식 투쟁은 역설적이다. 투쟁은 잘 살아보기 위해 하는 것이니 죽어서는 안 된다. 반면 단식은 ‘죽겠다’는 결연함이 없이는 냉정한 세상을 설득시키기 어렵다. 단식 투쟁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 역설을 이용한다. 살아남기 위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단식을 하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쇼한다.’ 고 조롱하고, 바스러져가는 몸을 혹사시키며 단식을 이어가면 ‘목적을 위해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불한당’이라고 조롱한다.
이 역설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있다. 영국의 존엄사 운동가 데비 퍼디는 2013년 영국의 마리 퀴리 호스피스 시설에 들어서며 “단식으로 생을 마감 하겠다”고 선언한다. 다발성 경화증의 고통을 감내하기보다 존엄하게 죽기 위해 법적 투쟁을 벌여온 그녀였기에 이 선택을 조롱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인터뷰에서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은) 내 삶을 끝내기를 원한다는 게 아니라 내 삶이 이런 식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데비 퍼디의 목소리를 통해 단식 투쟁은 삶과 죽음의 역설 속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한 순간에 가해지는 억압을 떨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저항 의미마저 박탈당한 삶
영화 <헝거 Hunger>는 1981년 북아일랜드 HM 메이즈 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중단 없는 단식’으로 무모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이면에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집착과 존중이 도사리고 있음을 포착한다.
주인공 바비 샌즈 (마이클 패스밴더 분)는 북아일랜드 공화주의자 준군사조직 PIRA (Provisional IRA) 소속이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통일을 주장하며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아 ‘테러 단체’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선악구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IRA의 테러 활동은 700년에 걸친 영국 식민 통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700년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 신교도들을 다수 이주시켰다. 특히 북부 아일랜드 6개 주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집중 이주시켰다. 1921년 오랜 전쟁 끝에 남부 아일랜드 26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에도 북부 6개주는 신교도 주민이 다수라는 이유로 독립에서 배제된다.
영국은 북아일랜드 내의 신교도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원주민들이 억압과 차별받도록 방치했다. 차별의 양상은 바비 샌즈의 유년기를 들여다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신교도들의 협박으로 마을을 옮겨 다니기도 했고 심지어는 직장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다.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긴 바비 샌즈가 영국을 몰아내고 ‘아일랜드 공화국’에 합류하자는 PIRA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경찰의 자식이 경찰을 꿈꾸고 글방 근처에서 자란 맹자가 유학자가 된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또한 그 어떤 발언권이나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던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이 무장 투쟁을 자행하게 된 것도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바비 샌즈는 ‘발모랄 가구점 폭파’현장에서 체포된다. 당시 IRA는 신교도들의 상업 행위가 구교도 탄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바비 샌즈와 일행들은 이 주장에 따라 민간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바비 샌즈는 현장 근처의 차 안에 있다가 체포되었을 뿐 증거랄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제대로 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차 안에서 발견된 권총 한 정을 근거로 그에게 불법 무기소지죄를 적용했다. 형기는 14년.
바비 샌즈는 HM 메이즈 교도소에 수감된다. 1971년 이래로 제대로 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공화주의자들을 집단수감 하여 H-Block 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에 수감된 재소자들 중에는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암살한 이도 있지만 바비 샌즈처럼 그 혐의가 불분명한 사람도 있으며, 영국의 초법적인 행정집행에 의해 억울하게 끌려온 이도 있었다. HM 메이즈 교도소는 모든 것을 빼앗겨 저항을 시작한 이들이 저항 의지마저 박탈당하는 곳이었다.
어느 쪽이 더 불결하고 역겨운가?
당시 HM 메이즈 교도소는 ‘모포 투쟁’과 ‘불결 투쟁’이 한창이었다. 영국 정부는 1971년 이래로 제대로 된 법적 절차도 없이 공화주의자들을 체포하면서 준 포로 신분인 ‘특수 범주 지위’를 주기로 합의했는데, 1976년 3월부로 이를 철회했다. 이제 공화주의자들은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체포당하고 일반 범죄자와 같이 죄수복을 입고 노역까지 해야 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공화주의자들은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고 맨몸에 모포만 거친 채 생활한다. 교도관들이 죄수복을 입지 않으면 화장실도 요강도 쓰지 못하게 하자 똥을 벽에 바르고 소변을 복도에 흘려보내며 샤워도 거부한다. 이는 역겹고 적나라한 저항이지만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한 절박한 저항이다.
영화는 주인공 바비 샌즈가 감방 벽에 똥을 바르는 역겨운 광경을 마치 벽화를 그리는 도공처럼 엄숙하게 묘사했다. 그는 기어코 벽 한가운데에 원형의 기하학적 무늬를 그려낸다. 바비 샌즈를 끌어내고 청소하러 감방에 들어온 교도소 직원은 똥으로 그린 빽빽한 원형 무늬 앞에 역겨움보다는 아연함을 느낀다.
벽에 바른 똥은 억압의 비참한 산물이지만 동시에 절박한 삶의 의지가 느껴지는 강렬한 저항이다.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저항의 권리마저 빼앗긴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제 몸 밖에 없다. 몸으로 할 수 있는 표현, 몸으로 할 수 있는 저항. 이를 불결하다거나 ‘극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무자비한 살수기가 물을 뿜어 한 인간이 자아낸 원초적이고 강렬한 저항을 지워버린다. 영화는 그 역겨운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봄으로써 약자가 맞닥뜨려야 하는 냉혹한 억압을 드러내고, 동시에 이 억압을 바라보는 사회의 냉혹한 시선을 관객에게 체험케 한다. 불결하고 역겨운가? 그런데 어느 쪽이? 라고 묻는듯하다.
이 질문은 복도로 소변을 흘려보내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재소자들은 불결 투쟁의 일환으로 애써 요강에 소변을 모았다가 복도로 흘려보낸다. 영화는 차가운 복도로 힘없이 흘러간 소변 줄기가 다른 감방에서 흘러온 소변 줄기들과 한데 합쳐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억압에 대항하는 약자의 연대는 이토록 적나라하고 힘겹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반면 교도관이 이 ‘연대의 흔적’을 지우는 장면은 섬뜩하리만치 차갑다. 마스크를 쓴 교도관은 심상한 동작으로 긴 복도를 오가며 화학약품을 뿌린다. 화학 약품이 철퍽 떨어지는 소리와 장화 신은 발이 연대의 흔적 위로 잘박거리는 소리가 빈 복도에 울리고 이내 대걸레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카메라는 연대를 짓밟는 이 불협화음을 복도 끝에서 가만히 관망하며 이번에도 관객들이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게 만든다.
낯설지 않다. 공권력 앞에 배를 까뒤집고 누운 사람들. 칼 같은 물줄기가 그들을 덮치고, 매운 화학약품이 비산하며 서로 맞잡은 손은 하릴없이 코를 싸쥔다. 아니 저 차가움은 낯설다. 우리는 그들의 적나라한 몸과 몸짓을 보지 못하고, 차가운 군홧발 소리와 바위라도 자를 듯 날 서린 살수기 소리는 듣지 못한다. 카메라가 편집한 시선 속에서는 시위대가 휘두르는 쇠파이프만 드러나고, 차가워지는 것은 우리의 눈빛뿐이다. 낯설다.
폭식으로 부른 배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폭력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영화 <헝거> 스틸컷. 단식으로 마른 바비 샌즈의 몸은 권력 철권에 구타당한 개인을 여실히 드러낸다. ⓒ 오드
공화주의자들은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저항권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분비물로 자아낸 목소리마저 가로막힌다. 아직도 남은 것이 있을까. 딱 하나가 남았다. 부분으로서의 몸, 전체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자네에겐 삶이 아무것도 아니잖나.” 불 꺼진 면회실 창문으로 은은한 불빛이 들어와 마주앉은 사제(리암 커닝햄 분)와 바비 샌즈의 옆얼굴을 비춘다. 영화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중단 없는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한 바비 샌즈와 그의 뜻에 공감하면서도 결국 ‘자살’하겠다는 불경스런 선언 앞에 분노하는 사제를 대면시킨다. 두 사람의 형상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빛이 군데군데 깎아냈다. 이제 두 사람은 재소자와 사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박탈당한 한 생명과 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바비 샌즈는 항변한다. “내겐 내 생명이 전부입니다. 자유가 전부고.”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그는 죽을 때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사제의 질문에 답변하며 점차 확신이 생긴다. 그에게 ‘중단 없이 단식한다.’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 우리 삶의 어느 한 순간에 가해지는 억압을 떨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삶을 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말한다. “신부님은 자살이라고 보겠지만, 나는 살인이라고 봅니다.” 그는 단식과 그로 인한 죽음의 이면을 보라고 요구한다. 누군가 단식으로 자신의 생을 내몰기 전에는 삶의 의지가 담긴 저항이 살수기 아래 흩어지고, 애써 내민 연대의 손 허무하게 지워지는 일이 반드시 있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결국 바비 샌즈는 고집스럽게 66일을 굶어 아흔 살 노인의 모습으로 사망한다. 그의 몸은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때문에 병리학 보고서에 바비 샌즈의 사인이 ‘자발적 기아’라고 적혔을 때 그의 가족들이 나서서 ‘기아’로 고쳐 쓰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단식 투쟁에 나선 이의 건강한 살갗이 움푹 팬 자리는 사회가 그들에게 휘두른 보이지 않는 철권(鐵拳)의 흔적이다.
2014년 7월 광화문.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저항의 수단마저 박탈당한 한 남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안고 단식을 이어갔다. 반면 그 옆에서는 ‘시민을 광장에게 돌려줄 것’을 주장하며 폭식 투쟁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면전에서 음식 냄새 조금 풍기는 것으로 단식에 나선 자들을 조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식투쟁자들이 코를 벌름거리면 죽을 의지가 없는 것이니 우습고, 전혀 그럴 의사가 보이지 않으면 삶의 의지가 없는 것이니 이 또한 우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식 투쟁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단식하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선택을 강요하며 조롱할 수 없다. 영화 <헝거>에서 보비 샌즈는 단식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산하를 그린다.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아무런 걱정도 없던 어린 시절. 보리밭 사이로 뛰어다니며 종달새와 노니는 장면을 끝도 없이 그린다. 그는 죽어가는 삶을 애처롭게 불러 세우면서도 종달새처럼 자유로웠다.
‘폭식 시위대’의 조롱은 무의미한 것이었고 오히려 의도치 않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단식으로 홀쭉해진 배가 사회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의지를 상징한다면, 폭식으로 부른 배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방조를 넘어서 직접적인 폭력 행위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 HM 메이즈 교도소 복도 끝에 선 차가운 시선처럼.
단식으로 죽어가는 내내 북아일랜드의 자유로운 산하를 그리워한 바비 샌즈 ⓒ 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