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생활 체육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종목은 어떤 걸까. 공식적인 집계를 떠나 전국적으로 가장 잘 정착된 종목이라면 내 생각에는 족구만한 게 없을 것 같다. 군 시절이나 회사에서 족구 한 번 안 해본 남자들이 있을까. 오늘도 우리나라 어딘가에서는 배 나온 아저씨들이 족구를 하며 땀을 흘리고 국군 장병이 포상 휴가를 걸고 족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세 명이 모이면 고스톱을 치고 네 명이 모이면 족구를 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오늘은 ‘족구 전문 칼럼니스트’인 내가 우리의 족구 역사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껏 족구를 그저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거 이 정도로 무시할 만한 종목이 아니다. 역사와 체계가 어마어마하다. 근로자도 한다. (사진=연합뉴스) 군대에서 처음 시작된 족구 삼국시대부터 마른 풀이나 짚, 돼지 오줌보 등을 이용해 족구와 비슷한 경기를 했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체계를 갖추지 못해 이걸 족구의 기원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본격적으로 족구가 생겨난 건 1960년대였다. “마냥 대기하기도 심심한데 공 좀 가지고 놀아볼까?” 1966년 김포에 있는 공군 제11전투비행단 정덕진 대위와 안택순 중위는 비상대기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종복을 입고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을 떠올렸다. 축구를 하기에는 여건상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봤더니 때마침 배구 네트가 보였다. 이들은 배구 네트를 땅으로 내려 공을 발로 넘기는 놀이를 시작했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족구의 시작이었다. 규칙도 없었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축구공으로 배구의 방식을 빌려 세 번에 상대편 진영으로 차 넘기는 방식이었다. 나름대로 운동도 되고 시간을 보내는 재미도 있었다. 족구라는 이름이 있지도 않을 때였다. 이들은 이 운동을 족탁 또는 족탁구, 발공치기 등으로 불렀다. 이 부대에서 몇몇이 즐기던 이 운동이 세상에 제대로 빛을 본 건 2년 뒤인 1968년이었다. 이 둘은 국방부에 이런 보고를 했다. “장병들이 좁은 공간에서 축구공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운동을 개발했습니다. 축구와 배구를 혼합한 독특한 종목입니다.” 국방부에서는 이 운동을 지켜본 뒤 최우수작품으로 선정하며 정덕진 대위와 안택순 중위에게 국방부 장관 표창과 부상으로 30만 원을 수여했다. 그리고는 이런 지시를 내렸다. “이 운동을 족구라고 명명하고 전군에 전파하게.” 공군이 주도하는 교육에 파견됐던 육군 작전장교와 하사관 1천여 명은 곧바로 공군에서 선보인 족구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맨 땅에 물주전자를 이용해 라인을 그리고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는 이 간편한 운동을 배워 자대 복귀 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해군 또한 공군작전사령부 주최 친선모임에서 족구를 처음 접한 뒤 사관학교 기수별이나 해군 대 공군으로 나눠 경기를 시작했다. 배 위에서 오랜 시간 생활하는 해군으로서는 좁은 공간에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족구가 안성맞춤이었다. 군대에서 족구가 퍼지니 사회에서의 보급 속도도 엄청났다. 군대에서 족구를 즐기던 이들이 제대를 한 뒤 복학하거나 회사에 취업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모여 족구를 하기 시작했다. 전대통령도 한다. (사진=연합뉴스) 족구, 예비역에 의해 퍼져나가다 하지만 지역마다 고스톱 룰이 다른 것처럼 족구 룰도 다 달랐다. 인원수도 달랐고 규격도 달랐고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이게 맞다니까.” “아니야. 족구를 어디에서 배워온 거야. 이게 맞아.” 사회에서는 족구를 하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겼다. 결국 처음 족구를 고안했던 공군 주도로 1974년 1월 공식적인 규칙이 제정됐다. 국방부의 ‘체력관리’라는 책자에 6인제 경기를 기준으로 한 족구 규정이 발표된 것이다. 이때 2m에 이르렀던 네트 높이는 이후 1978년 1m로 낮아졌고 6인제에서 4인제로 규정이 수정됐다. 지금은 규정이 많이 완화됐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무릎 이하만 사용한다는 규정으로 헤딩은 금지돼 있었다. 국방부에서 정확한 규칙을 정하자 보급 속도는 더 빨라졌다. 군대는 물론 사회에서도 족구가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족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다. 그저 군대에서 시간이나 보낼 때 했던 이 이름 모를 운동은 1990년 4월 대한족구협회 창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족구 경기 규칙을 제대로 완성하자.” 이들은 창립 다음 달부터 전국에서 이름 없이 활약하던 족구 스타들을 모아 전국을 돌며 회의를 해 통합된 경기 규칙을 완성했다. 그리고 1990년 7월 역사적인 첫 대회를 열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 대한족구협회는 아직 체계적인 족구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아 걱정했지만 참가 신청을 낸 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려 전국에서 352개 팀이 참가했기 때문이다. 올림픽체육관 체조경기장은 전국에서 ‘한 족구’한다는 이들로 가득 찼다. 이전까지 동네에서만 기량을 겨뤘던 고수들은 전국의 고수들과 만나 기술을 전수받고 발전해 나갔다. 대기업을 위주로 체계적인 족구 시스템이 구축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특히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은 무려 2백여 개의 족구팀이 활동하고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매일 족구 경기를 열었다. 이들 중 18명을 대표선수로 선발한 삼성전자는 전국대회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4백여 팀을 보유하고 있던 대우자동차는 아예 4월을 ‘족구의 달’로 지정할 정도였다. 이때쯤 대한족구협회도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이제 세계로 뻗어 나갑시다.” 이해 한강사랑 전국족구대회 우승은 수원 삼성전자였다. 대한족구협회는 한국 최강, 아니 세계 최강인 삼성전자를 호주에 보내 족구의 세계화를 시작했다. 처음 족구를 접한 호주인들은 이 독특한 종목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구미 삼성전자는 일본 도쿄에 가 족구를 전파했고 1994년 우승팀 기아자동차 역시 호주로 날아가 족구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 스님들도 한다. (사진=연합뉴스) 중계도 있고 스카우트도 있고 대학팀도 있다 1995년에는 사상 최초로 족구가 지상파에서 중계되는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광주에서 열린 제1회 문화체육부 장관기 전국족구대회는 SBS를 통해 녹화 중계돼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대한족구협회와 국민생활체육 전국족구연합회 등 전국적인 단체가 두 개나 돼 혼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문을 닫았다가 1994년 대한족구협회가 재창립 되자 혼란은 더 커졌다. 두 단체는 서로 전국대회에서 더 많은 팀을 유치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한족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족구 창안자 정덕진 회장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두 단체가 통합해야 합니다. 그게 전국 족구 동호인들의 위한 길입니다.” 전국족구연합회도 이에 동의했고 결국 1998년 이 두 단체가 대통합을 이뤘다. 이렇게 족구는 스스로 걸림돌을 해결했다. 군대에서 족구로 날리던 이들은 대기업에서 뜨거운 구애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내 족구 동호회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이런 스카우트 경쟁도 무척 치열해졌고 2003년에는 최초로 정식 실업팀 ‘매니푸니’가 창단되기도 했다. 2004년 학교 홍보를 위해 운동부 창단을 검토하던 한세대학교는 고민 끝에 이런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족구부를 만들자. 재정에도 큰 부담이 없고 좋겠어.” 당시 한세대는 생활체육으로 분류돼 있어 체육특기생 규정이 없던 족구부를 창단하기 위해 직접 전국의 족구대회를 찾아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사상 최초의 대학교 족구부를 창단하기도 했다. 한세대 족구부 졸업 선수들은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될 만큼 취업이 보장돼 인기가 높다. 족구는 2005년 전국체전에서 전시 종목으로 채택되더니 고등학교에 무료 족구 강의를 실시하며 엘리트 체육으로의 변화를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족구 단행본을 발간하는 일도 이뤄졌다. 그저 몇몇 군인들이 했던 놀이가 스포츠의 형태로 발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족구로서는 숙원 사업을 이때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족구가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1996년 대한체육회 가입을 노렸지만 결국 비슷한 종목이 있다는 이유로 대한세팍타크로협회 산하 단체로 인정을 받은 게 전부였다. 전국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종목이었지만 독자적인 스포츠로서의 자리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세팍타크로에서 독자적인 종목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던 족구는 무려 10년 만인 지난 2006년 대한세팍타크로협회에서 분리돼 독립적인 연맹으로 인정받게 됐다. 박지성도 한다. (사진=연합뉴스) 700만 명이 즐기는 국민 스포츠 축구선수들도 몸을 풀 때면 족구를 즐긴다. 2006 독일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의 공개 훈련을 지켜보던 외신들은 이 정체불명의 족구를 보고는 혼란스러워했다. 한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족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전했다. “한국 선수들이 이상한 훈련을 하고 있다. 전력을 감추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너무 즐거워보인다.”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은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는 족구로 가볍게 몸을 푸는 일이 많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는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려 염기훈, 박주영, 이승렬 등이 한 조를 이뤄 17만 원의 상금을 차지하기도 했다. 축구선수답게 다들 족구 실력도 대단하다. 유럽 축구팀들은 주로 럭비 등으로 회복 훈련을 하지만 한국 축구 대표팀에는 족구가 최고의 회복 훈련이다. 족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8천여 개 동호회가 등록돼 있고 비등록 동호인까지 합하면 약 700만 명 이상이 족구를 즐기는 것으로 추산된다. 연간 열리는 각종 시도별 족구대회만 해도 800여개에 달한다. 그만큼 족구는 대중적으로 완벽히 자리를 잡은 스포츠다. 처음에는 그저 군인들이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행했던 놀이였지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종목으로 성장했다. 지도자와 심판을 직접 길러내는 시스템까지 갖췄고 이제는 초등부는 물론 여성부 대회까지 열릴 정도의 국민 스포츠가 됐다. 전국에는 족구전용경기장에 벌써 여러 군데 들어섰다. 오늘도 전국 어딘가에서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 하나로 즐거워하며 땀 흘리는 이들이 있다. 세팍타크로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받기도 하지만 족구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유일한 구기종목이라는 걸 기억하자. “대한민국 족구하라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