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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and, Louis, Pragmatism : A Reader [김동식 외 옮김] [서울 : 철학과 현실사], pp.14-16)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용주의의 설명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그 용어는 제임스(William James)가 1898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를 방문하여 행한 '철학적 개념과 실천적 결과'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강연에서 제임스는 '퍼스의 원리, 즉 실용주의의 원리'라고 불렸던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대상에 대한 사고의 완벽한 명확성을 얻기 위해서는 […]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감각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반작용을 대비해야 하는지 등 그것과 연관하여 인지가능한 실천적 효과만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효과에 대한 관념이야말로, 그것이 적극적 의의를 갖는 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관념의 전부이다." 나아가서 제임스는 이 원리가 '좀 더 포괄적으로'표현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어떤 진리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테스트는 실로 그것이 지시하거나 고취시키는 행위이다. […] 어떠한 철학적 명제라도 그 효과적 의미는,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언제나 미래의 실천적 경험 속의 구체적 결과가 되게 할 수 있다. 이때 초점은 경험이 능동적이라는 점보다는 구체적이라는 데 놓여 있다."
이때 제임스가 했던 일은 과학적 탐구의 한 원리를 사고 일반에 해당되게 확대시킨 것이다. 과학적 탐구의 원리란 '퍼스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념을 의미 있게, 혹은 퍼스의 말마따나 '명석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 관념을 그 대상이 모든 가능한 조건 하에서 나타낼 실세계의 행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퍼스가 든 예 가운데 하나를 이용해 말하자면, 어떤 것을 '단단하다'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유리를 긁을 수 있고, 구부러지지 않을 것이고 등을 의미하며, 그러한 실천적 효과야 말로 '단단함'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전부이다. '단단함'은 추상적 속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단단한 모든 것들이 행하는 바의 총합일 따름이다.
제임스의 아이디어는 과학적 개념에 대한 이 이해 방식을 우리의 모든 신념으로 확대시킨 것이었다. 신념을 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물었다. 그것은 그 신념의 합리적 자족성, 즉 그 신념이 논리적 정밀 검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 신념을 견지해서 우리가 세계와 더 유용한 관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철학 체계를 선택할 경우 초래될 실천적 결과 무엇인가를 묻는 일인데, 철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적인 제일 원리로부터 진리를 도출해 내려고, 그리고 다양한 철학 체계의 교의들을 합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려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허송하였다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실천적 경험에 있어 그 신념의 현금가치(cash-value)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신념이 참이나 거짓임에 따라 이 세계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벌어질 것인가?", 어떤 관념에 대해서든 철학자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9년 후에 『실용주의』에서 사용한 유명한 구절처럼, "진리란 신념으로서 좋은 것, 그리고 확정적이며 지정가능한 이유에서 좋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들에 대한 이름이다."
'실천적'이나 '현금가치'와 같은 용어들은 제임스를 유물론과 과학의 옹호자로 보이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 실용주의를 도입하는 제임스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며 과학적이라고 그가 간주했던 당시의 시대에, 신에 대한 믿음의 창문을 열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과연 증명될 수 있을지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단지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차이를 초래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할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만일에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절대적 증명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준, 즉 프래그머틱한(실용주의적) 기준을 과연 믿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선택을 행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 증명을 결코 바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결정은 오늘의 우주가 어떠하며, 내일은 그것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