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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트라이트 팀' 과 편집국장 마티 배런을 연기한 배우들 ⓒ 팝엔터테인먼트 |
전통적인 가부장사회에서 아버지는 권력과 권위를 한 손에 주무르는 존재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관습이 쥐여 준 무형의 영향력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권위의 힘이다. 그러나 각 가정의 권위를 구조적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 된다. 아버지들은 다른 가정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강제력을 행사하고 ‘아버지 아닌 자’의 권력 찬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이는 국가의 ‘시스템’이 되어 ‘권력’의 근간이 되고 이때부터 권력과 권위는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아버지들의 아버지였다. ‘하찮은’ 농노의 가정부터 고귀한 군주의 왕가까지 교회의 신자들이었다. 교황으로부터의 파문은 곧 모든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마저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는 막강한 군사력과 영지, 재력을 확보하며 권력자로 거듭났다. 교회의 영향력은 등락을 거듭했지만 역사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해던 다른 군주들처럼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권력으로부터 나온 권위는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사라지지만 권력을 낳은 권위는 권력을 거세해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현대 사회로 넘어서면서 교회는 ‘군사력’ 같은 표면적 권력을 거세당했지만 그 영향력만은 여전히 막강했다. 가톨릭은 신앙을 중심으로 병원, 자선 사업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1960년대 미국에서는 13000개의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가톨릭교회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몸소 실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역사회의 문화적 구심점이 되었다. 신자들에게 가장 내밀하고 친근한 곳으로 다가선 가톨릭 사제father들을 미국 사회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되어갔다.
아버지의 권위로 성추행을 제도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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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
ⓒ 팝엔터테인먼트 |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보스턴글로브가 가톨릭 사제의 아동성추행에 관해 취재한 실화를 다룬다. 당시 미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사제가 아동을 성추행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미국 사회의 추한 일면을 목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성추행을 제도화하는데 쓰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2002년 미국에서 사제의 아동 성추행은 전혀 새로운 담론이 아니었다. 1980년대 길버트 고테 사제의 아동 성추행이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신고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존 제이 대학의 2006년 조사에 따르면 2000년부터 3년간의 아동 성추행 신고 건수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의 신고 건수에 세 배를 넘어섰다. 그동안 감춰왔던 진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다. 문제는 ‘왜 같은 일이 반복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1976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존 게오건 신부는 36년간 성직에 몸담으며 6개의 교구에서 수십 명의 아동을 성추행했다. 교회는, 미국 사회는 왜 막지 못했을까.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미첼 개러비디언(스탠리 투치)이 남긴 말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지만, 한 아이를 학대하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자의 마을이 교육을 위한 시스템이라면 후자의 마을은 방관과 방조를 위한 시스템이다. 보스턴대교구장인 버나드 로 추기경 (렌 카리오우)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호사를 앞세워 피해자와 은밀히 합의하고 해당 사제는 병가, 전출 등을 통해 ‘또 다른 교구’로 보내는 방식을 ‘시스템화’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교회가 온 사회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잘못을 고발하고 피해자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아버지의 권위 앞에서 하나같이 침묵했다. 경찰서장은 범죄 정황을 모두 파악하고도 끝내 수갑을 채우지 않으려 하고, 검사는 기소를 망설이며 판사는 교회에 불리한 판결 내리기를 꺼린다. 사회 유력 기관들의 이 같은 권력 행사는 교회의 보이지 않는 권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적발할 수도 근절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포트라이트 팀장인 월터 로빈슨은 ‘SLATE’와의 인터뷰를 통해 보스턴에서 가톨릭교회의 힘을 절감한 사례를 밝혔다. 메사추세츠 주법에는 아동 학대에 대한 신고 의무자 조항이 있는데 의사, 교사, 간호사 등이 해당 된다. 여기에 성직자를 포함시키려 할 때마다 가톨릭교회가 제동을 걸었고 법은 통과되지 않았다. 교회에 문제를 제기해야 할 대목이지만 도시는 침묵했다. 교회의 권력이 아니라 권위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언론이 권위를 해체하지 못한 이유는 언론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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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월터 로빈슨과 그를 연기한 마이클 키튼의 모습 |
ⓒ 팝엔터테인먼트 |
‘권위와 권력’을 권력으로부터 해체하는 것이 사정기관의 몫이라면, 권위로부터 해체하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사제의 아동 성추행이 ‘현상(Phenomenon)’ 이라 할 만큼 시스템화 된 책임이 언론에도 있음을 지적한다. 영화는 이를 위해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을 상징적 인물로 그린다. 그는 1993년 보스턴글로브 ‘대도시국’에 있을 때, 아동 성추행 사제 스무 명의 명단을 투고 받았지만 후속 취재는 하지 않았다.
그게 가톨릭교회가 세운 고등학교를 졸업한 개인적 사정 때문인지 뉴스 가치가 되지 않는다는 기자로서의 판단 때문인지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도 월터 로빈슨은 ‘당시는 대도시국에 발령 받은 지 한 달가량 지난 때였고 그 때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어렴풋이나마 사건을 파악하고 있었으면서 충분히 대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침묵한 결과는 참담했다. 보스턴 내에서만 아동 성추행 가해 사제가 70명에 달했다. 영화에서 사제의 아동 성추행 문제를 하나의 현상 (Phenomenon)으로 이해하고 연구한 리처드 사이프가 제시한 6% (90명)에 근접한 수치였다. 그는 실제로도 미국 가톨릭 주교 위원회 (USCCB)의 연간 보고서를 종합하여 (2004, 2005, 2006, 2008) 195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내에서만 5600명의 사제가 성추행 혐의를 받았다고 추산한 바 있다. 이는 전체 (109,694)의 5.1%에 달하는 수치로 2002년 보스턴의 수치와 더욱 일치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언론은 다른 사회 유력 기관들처럼 침묵했다. 그리고 ‘사제의 아동 성추행을 제도화한 가톨릭 중심 보스턴 사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의 악행에 앞잡이(shill for) 노릇을 했던 변호사 짐 설리반이 월터 로빈슨에게 “(교회가 사제의 아동 성추행을 숨기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기에 이렇게 오래 걸렸나”고 따지고 드는 장면은 궁지에 몰린 악당의 적반하장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월터 로빈슨도 이를 자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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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은 1993년 아동 성추행 사제 스무 명의 명단을 투고 받았지만 후속 취재는 하지 않았다. |
ⓒ 팝엔터테인먼트 |
월터 로빈슨이라는 실존 인물이 ‘가상의 인물’로 거듭나는 부분은 여기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성추행 가해 사제 존 게오건 신부 너머에 도사린 구조를 지목했듯이, 영화는 월터 로빈슨이라는 등장인물 너머에 존재하는 ‘언론의 구조’를 손가락질한다. 월터 로빈슨이 보여주는 복잡한 행태처럼 언론은 때로 사명감에 넘쳐 모든 불의를 헤집어낼 것처럼 달려들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또 귀신같이 사라져 보이지도 않는다.
이는 기자들을 억압하는 거대한 불의나 악당 같은 내부자들 때문이 아니다. 기자들은 그저 언론인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가해자의 명단이 담긴 투고를 후속 취재도 없이 덮은 것은 뉴스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유력한 증거자료를 받고도 피해자를 외면한 것은 수많은 취재원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사제의 아동 성추행 같은 추악한 문제에 침묵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언론의 정상적인 구조가 자아낸 침묵이 사제의 아동 성추행을 비호한 시스템의 주춧돌이 된 셈이다. 이제 사회의 아버지로 군림하는 교회와 그 구조의 타락을 방치한 언론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언론이 침묵한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주춧돌부터 무너뜨리는 것이다. 결국 월터 로빈슨이 낙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보도를 미루는 모습에서 우리는 영화가 제시한 언론 침묵의 원인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성추행 가해 사제들에 대한 증거를 모으는 민간단체 bishop-accountability의 홈페이지에는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해뒀다. 그 중에서 한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한 고통을 Simon&Garfunkel 의 노래 The Sound Of Silence의 가사로 표현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나의 교회’와 사회가 자신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고 침묵하는 데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사회의 침묵 속에서 피해자들은 몸만이 아니라 신앙은 물론 사회에 신뢰마저 잃고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생존자 (Survivor)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고통을 준 구조는 ‘추행 이후’에 더 잔인하게 기능하고 있었던 셈이다.
침묵은 가장 적극적인 학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