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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제령 사무소 5
게시물ID : panic_4972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스키튼
추천 : 26
조회수 : 143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08 21:29:28

“현재 당국의 본격적인 협조로 진행되고 있는 일명 ‘고속도로 연쇄 사고’의 실마리는 아직 잡히지 않은 가운데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평균 한 사고당 사망자가 3명에서 5명 내외였으나 이번 주말의 버스 사고를 기점으로 인해 열 배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경찰 측 비공식적 입장에 따르면 이 사건만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할 것이라는 의견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경찰은 그 구간의 도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차단 시 교통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관계로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시민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사건으로 인해 불안에 떨...”


“쯧. 시끄러.”
“무슨 짓이야, 다시 켜!”

“그냥 TV하나 사라. 내가 사주랴?”


비 내리는 습한 오후, 나는 은수의 가게에서 같이 물건을 살피고 있었다. 참으려고 노력 했지만 이 불쾌지수 높은 날에 웅웅거리는 라디오 소리는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안 사냐?”
“이젠 잊을 때도 됐잖아. 안 그래?”

 

아마 이년쯤 전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인가 은수가 가게 문을 여는데 낡은 텔레비전이 사무실 한가운데에 떡 하니 들어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신기해서 무슨 물건인지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그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든 처녀귀신(이라고 짐작한다)이 튀어나와 은수의 목을 조르고 칼을 겨누며 몸을 달라고 했었다. 다행히 때마침 찾아온 내 덕에 그 귀신은 부적에 돌돌 말린 신세가 되었고, 은수는 그 후로 TV라는 말만 들어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은수가 이렇게 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은수는 귀신을 알아보긴 하지만 퇴마 능력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표적이나 다름없어서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더 위험하다. 귀신은 정신이 쇠약해진 사람이나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주로 들러붙기 마련이니까.

 

“너 그러다 라디오 귀신이라도 찾아오면 라디오도 안 듣겠네?”
“누군 TV 안 보고 싶어 이러는 줄 알어?”
“흐음, 그래. 싫을 만도 하지.”
“넌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네 목숨이나 간수 잘해. 다섯 살짜리 꼬마 여자애한테 죽을 뻔 한 거 소문내기 전에 수련이나 좀 하라구.”
“생명의 은인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은수는 여전히 부어있는 얼굴로 선반의 물건들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 달은 물건이 너무 넘쳐나는걸.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잡귀들이 많아졌나 봐.”
“그 말은 지금 내가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뜻이야?”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단. 사실 너 말고도 퇴마사는 많이 있으니까. 물론 너 같은 사이비보다 나은 사람은 아마.. 백 명은 되나? 흐음- 아냐, 어쩌면 천 명일지도 모르지.”
“성격 알면서 그렇게 도발하는 거지?”
“불만 있으면 스킬이나 키우셔.”
톡 쏘는 말을 던지고 은수는 창고로 들어갔다.

 

나도 내가 실력을 더 쌓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은수가 말한 것처럼 근본이 사이비다. 영을 볼 줄 아는 능력과 좋은 영물들, 그리고 나의 사업적 수완으로 이 일을 할 뿐이었다. 영력을 더 쌓고 싶어도 하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잠재된 영능력도 없었다. 모두 부수적인 것들에 의존하고 있는 날 보고 어쩌란 말이야. 신내림이라도 받으란 소리야?

 

- 신내림을 원한다면 내가 특별히 네 몸 속에 들어가주지.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생각 읽지마."
- 싫으면 영능력으로 막으면 그만이다.
“………..”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들은 정말이지 밉상이다.


“안나가 할 수 있는 무술이 뭐가 있지?”
은수가 창고에서 나와 몸에 붙은 먼지를 털며 물었다.
“나? 태권도 2단하고 검도 약간.”
“검도는 필요 없고, 태권도? 언제 땄는데?”
“중학교?”
“...그걸 지금 무술이라고 말하는 거야? 가지가지 한다. 네가 무술이라도 잘하면 이거라도 구하러 갈 텐데 말이지.”
은수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흔드는 손에는 팩스 종이가 있었다.
“그건..?”
“모피(募皮)야. 이걸로 장갑이나 덧신을 만들면 그 부분으로 기를 집중적으로 모아서 영에게 물리적 타격을 줄 수 있지. 방어력도 상당하고. 무술이나 격투기가 가능한 영능력자에겐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인 물건이야. ”
“기왕 하는 거 옷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너 이걸 견딜만한 영능력이 없잖아. 입자마자 피 토하며 죽을 거라면 괜찮지만.”
- 안나는 싸움도 못하고 영능력도 없다.
“시끄러워 둘 다! 무술까진 아니어도 웬만한 자기 방어는 할 수 있어! ”
“어쨌든. 네가 무술이라도 잘 하면 이걸 사용해서 영들과 격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야.”
“하면 돼! 하면! 여태껏 내가 하겠다고 해서 못한 거 있어?”
나는 홧김에 팩스 종이를 확 낚아채 나와버렸다. 등 뒤로 배시시 웃던 호우와 은수는 보지 못한 채 말이다.


팩스의 내용은 현재 모피를 제작하는 사람들에 관한 업데이트 내용이었다. 모피는 제작하는데 있어 일반 가죽과는 다르게 분류된다. 우선 모피제작을 위해 사용되는 짐승은 주로 백호나 구미호 같은 영물들을 사용하고 가죽을 만드는 공정에 있어서도 영물과 사용자와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사람 한 둘은 갈아 넣는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돈을 받고 파는 물건도 아니거니와 모피장인도 외부에는 전혀 노출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팩스에는 모피장인의 명단과 은신처, 공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정도의 상세한 정보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또 설령 이 정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모피를 얻어 낸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백호를 잡아서 쓰는 사람들이니 그 힘과 영능력의 무시무시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도 이 일을 쉬이 해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호기롭게 가게를 나섰지만,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이 한 근씩은 더 무거워 지는 느낌이었다.

 

- 두렵나?

내 마음을 꿰뚫은 호우의 말 한마디가 내 가슴속에 울렸다.


“호우!!”


가게 앞 모퉁이를 막 돌아설 무렵 은수가 다급히 불렀다. 무슨 일인가 멈춰서자 은수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호우, 헉헉.. 호우, 너는 가지마,”
- 왜 그러는가?
“너, 너, 헉헉.. 아무리 영이라지만, 그 사람들에게 잡혀서, 모피에 갈려, 넣어지고 싶지 않으면, 헉헉.. 여기 있어,”
- ..........
저 표정은 분명히 호우가 자존심이 상했다는 표정이다.
- 나를 못 믿는 건가?
겨우 숨을 돌린 은수가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 사람들은 이미 백호를 잡는데, 이력이 난, 사람들이니까. 후아.. 헉헉,,”
- 됐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나는 평범한 백호가 아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하는 호우의 표정은 분명 오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한마디 더하려는 은수를 향해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짓고는 돌아서며 내 다리를 스쳤다. 빨리 가자는 신호다.


명단에는 총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림잡아도 모두 서울과는 한 시간 이상씩 떨어진 곳이었다. 가능한 가까운 곳부터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은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퇴촌이라는 곳이었다. 말 없이 나를 재촉하는 호우의 등쌀에 바로 버스를 타러 갔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라 그런지 어딘가 설레기도 했다. 버스 특유의 냄새에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창틀을 보니 오래된 버스인지 약간의 녹이 슬어 있었다. 무심결에 손으로 비벼 냄새를 맡았다. 으! 후회할걸 알면서 왜 그랬지!

 

크게 흔들리는 일 없이 도로를 평온하게 타고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머리를 유리창으로 기대어 자려고 했으나 허리가 휘면서 얼마 전 다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냥 가만히 목을 젖혀 머리받이에 기댔다.


요 며칠간은 제대로 잠을 잔 기억이 없다. 잠버릇이 좋지 못한 편인데, 상처 때문에 가만히 한 일자로 누워 잠을 자야만 했기 때문에 자다가 몇 번씩 깨곤 했다. 아침이면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잠을 못 자 신경이 있는 대로 날카로워지는 바람에 위염이 도져 입 냄새까지 났다. 버스의 리듬이 나에겐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나는 그녀 없인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온 생애는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내 눈동자엔 그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약간 납작한 아몬드 모양의 눈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는 그녀의 입술.

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가지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안돼!’
‘그럴 순 없어!’
‘안돼! 안돼! 안돼!’


나는 너무 놀라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건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한 남자가 되어 한 여자만을 그리워했다. 그 생생한 느낌...!


‘눈물?’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흘렀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 없었다.
“어..엉..엉엉…으윽…”
입술을 깨물며 참아도 눈물이 흘렀다. 옆에서 같이 잠시 눈을 붙이던 호우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 안나, 무슨 일이야?
“흐윽…흑…흑…”
설명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지금은 울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꿈의 영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던 한 여자. 나를 보며 밝게 웃던 모습이 떠올라 자꾸 눈물이 흘렀다.

 

‘안돼!’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텅! 텅텅!!!

 

쿠당탕---!!

 

- 안나!! 어서 일어나라! 정신을 차려!


검은 터널 끝에 호우가 보인다.

 

- 어서 일어나란 말이다!


호우에게 일어났다고 말하려고 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눈조차 뜨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 이봐! 이봐!


나는 다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 안나!!!!!


까무룩한 머릿속으로 호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죽고 싶은 건가! 어서 일어나!


다급한 호우의 말을 듣고 나는 일어나려 노력했다.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고 멍했다. ‘머리가 깨지는 느낌’은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간신히 눈을 반쯤 떠보니 앞에는 무언가 큰 물체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그 물체를 치우려 했지만 손이 뻗어지질 않았다.

 

- 정신이 든 건가!
“호우.....”
- 말하지마라, 내가 그냥 네 생각을 읽겠다.
‘호우.. 이게 뭐야..’
- 우리가 타고 가던 버스가 사고가 났다.
‘무슨 사고?’
-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 버스를 밀었다.
‘나.. 살아있는 거야?’
- ...보기에 좀 처참하긴 하지만 살아있다. 아까 경찰이 우릴 봤으니 곧 구조 되겠지.
‘아냐.. 나 지금 나가야 해’
-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모피 따윈 몸이 다 낫고 구해도 충분해.
‘아니야..아니야.. 그것 때문이 아니야..’
- 무슨 말이야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나를 꺼내줘...’
- 나 역시 너를 꺼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도리가 없다. 경찰을 기다리자.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하겠지..?’


저 생각을 끝으로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호우가 내 정신을 깨우려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지만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지안나씨?”
“누구?”
“이것 봐, 이 사람 지안나야.”

 

잠시 후 내가 눈을 떴을 때 여러 명의 경찰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드디오 정신 차리셨군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보니 아직 나는 병원으로 옮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어나기 위해 팔로 몸을 일으켰지만 빗물을 잔뜩 머금은 풀에 미끌어지고 말았다.
“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뼈에 금이 갔던지, 부러졌던지 분명 둘 중에 하나가 틀림없지 싶었다. 팔을 보려 시선을 돌리는데 목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악으로 고통을 참고 팔을 들어 목을 짚어 살폈다. 다행히 좀 심각한 타박상 같았다. 팔과 다리에는 응급조치가 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다리에 힘을 실어 몸을 일으켰다.
“아아악!”
부러지지는 않은 듯 걸음은 옮겨졌지만 퉁퉁 부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내리던 비는 이제 잦아들어 얕은 보슬비가 되었다. 여전히 풀이 미끄러워 걷기에 영 불편했다. 내가 타고 온 도로는 오십 미터 가량 멀리서 보였다. 주변을 뒤져 대충 짚을 만한 나무를 찾아 짚고 도로를 향해 갔다. 도로 주변은 사고로 차단 되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쉽게 사고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안나?”
낯익은 목소리의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불렀다.
“와아, 정말 안나네. 이게 얼마만이야?!”
크게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하는 이 남자는... 아, 내가 학교 다니던 때 같은 동아리 선배였다.
“안 그래도 소식은 좀 들었었는데.. 하하.. 얼마나 황당했는데? 네가 이런 일을 하다니.”
“아.. 네..”
잔뜩 갈라져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 몸이 이게 뭐야! 사고 난 거야?”
“네..죄송하지만 선배, 저 할 일이 있어요.”
딱 자르는 대답에 당황하는 선배를 뒤로 하고 나는 사고 지점으로 갔다.


- 괜찮은 거냐
‘응. 괜찮아.’


사고지점은 아수라장이었다. 보통의 전복사고 조사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경찰들이 동원돼 있었고. 또 수 많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조사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둘러보는데 유독 한 지점에서, 따뜻한 기운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저기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곳은 어떤 영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머무르는 자리였다. 너무나 따뜻한 이 영기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 곳에 앉아 나는 그 영을 부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 했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소용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배를 불러 경찰과 사람들을 진정시켜 주기를 부탁하려 했으나 나의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를 선배는 듣지 못했다.

 

- 내가 도와주겠다.


호우는 온몸의 털을 갈갈이 세우고 선배의 등을 통과해 지나갔다. 그러자 선배가 놀란 듯 뒤돌아 보았다. 아마 무언가 서늘함을 느꼈음이다.

 

“선배!”
“어?!”
선배는 황급히 달려왔다.
“선배, 나 부탁이 있어요.”
“응? 갑자기 무슨..”
“사람들을 좀 조용히 진정시켜줘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안나, 나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냐. 지금 아주 상황이 심각해”
“농담이 아니에요!”
“너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니? 지금 벌써 여기서만 연쇄사고가 스무 번은 일어났어! 지금 네 부탁 따위를 들어줄 때가 아니야!”
“네?”


순간 오늘 은수의 가게에서 들었던 라디오의 내용이 머릿 속을 스쳤다.

 

“선배, 나를 믿어요?”
뜬금없는 나의 말에 선배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나의 일에 대한 능력을 믿냐구요!”
“아니.. 글쎄.. 나야 잘은 모르지.. 그냥 사람들 말로는 잘한다고야 하지만..”
“제발 나를 믿어봐요. 내가 이 일을 해결할게. 어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주변을 정리해줘요.”
선배의 얼굴은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한번만. 만약 안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게.”
“..........”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선배는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손으로 다시 누르고 일어섰다.


“자자, 모두들 정리합시다!”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들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이번 사건은 지안나 사무소에서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협조 해 주시길 바랍니다.”
경찰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조사에 대한 모든 책임은 지안나 사무소에 있습니다! 염려 마시고 주위를 정리하고 조용히 해 주세요!”
역시 공무원은 책임이라는 말에 약한 것 같았다. 그 말이 끝나자 여전히 의아한 표정들로 웅성거리기는 해도 모두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변은 점점 조용해졌다. 모두들 사고구간을 통제하며 나를 바라봤다. 호우는 가만히 내 옆에 몸을 대고 웅크리고 앉아 나를 감싸주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긴장이 되긴 했지만, 나는 가만히 그 영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바라보았다.


손을 가까이 대니 따뜻한 느낌이 뭉클하게 와 닿았다. 부적을 꺼내 영을 부르려 하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순식간에 손을 타고 올라왔다.

 

‘나를.. 그리고 그 사람을 도와주세요.’


작은 환청이 들림과 동시에 나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 곳에서 난 어떤 여자였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사람은 나의 보물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존재 이유였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와 인생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와 결혼 해 주겠니?”

나는 너무 기뻐 얼굴을 묻고 울며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내 마음을 표현하며 말로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에 동이 하얗게 터올 때까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잠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을 지샜다.
평생 이러고 있어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양쪽 집안 역시 흔쾌히 결혼을 승낙하셨고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의 뱃 속에 우리의 아이가 생겨난 것이다.

그 역시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고 이 소식을 직접 전하기 위해 우리는 시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그는 몸이 상한다며 시골에 가는 것을 만류했지만.. 내가 투정을 부리며 우겨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웁.”
갑자기 토악질이 밀려왔다. 눈이 밝아지며 다시 사고 현장이 보이고, 무언가 내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도와주세요.’
‘그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와 아이를 지키겠다는 신념 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저렇게 자꾸 저를 깔고 가는 차들을 밀어버리는 거에요’


그 말을 남기고 영은 다시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 괜찮나 안나?
‘그래, 괜찮아’
갑자기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이를 꽉 물어도 소용없었다. 계속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허어엉!!!”
온 마음이 울었다. 심장이 터질 듯 슬펐고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울었다. 나는 그 둘의 슬픔을 너무나 깊이 받아 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울고 있는 내 앞에 한 영이 다가와서 섰다.
‘효진아, 효진이 너지!’
그 영은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흐느꼈다.
‘효진아..!!’
“저는 효진씨가 아니에요.”


나를 끌어안고 울던 남자의 몸이 굳었다. 나는 가만히 나를 끌어 안고 있는 팔을 내리며 말했다.


“효진씨는.. 아이와 함께 다른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영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효진이가.. 어디서 나를 기다리죠?’


대답을 하려는데 갑자기 울렁거리는 기분과 함께 여자의 영이 내 속에 들어왔다.

 

“저에요.”


남자의 영이 멈칫하다 다시 나를 응시했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당신이로군.’
“우리.. 늘 같이 있기로 했죠?”
‘물론이야. 난 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럼, 이제 그만 우리 같이 가요. 이 곳은 우리의 세상이 아니잖아요.”

 

여자의 그 말에 남자의 눈은 너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은 나에게 전해져 왔다.

그 눈은, 이 세상에서 여자와 그냥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본 마지막 영상은 두 영이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지며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간신히 “다 끝났어요” 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역시 또 병원이야. 요즘 내 사주에 무슨 마가 꼈나 봐.
“그만하길 다행이야.”
걱정스러운 표정의 은수와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함께 버스를 탄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어. 넌 정말 운이 좋아.”

이유는 모르지만, 아직도 내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그 둘 양쪽의 마음 모두를 내 가슴에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피는 너 다 낫거든 가. 이번엔 병원에 오래 있어야 할 거야. 온몸이 만신창이야.”
“그래.. 나도 좀 쉬는 게 나을 거 같아.”

눈을 감으니 눈물이 흘렀다. 나는 나의 눈 속에서 행복한 그 들을 보았다.

 

*

 

- 은수.
“응?”
- 이번에 보니 안나는 영매(靈媒)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
- 본인은 아직 모르는 거 같지만. 잘만 활용하면 좋은 퇴마사가 될 수도 있을 거다.
“후후.. 그럼 본인이 깨면 직접 말해주는 게 어때?”
- ...싫다.

 

아직 잠이 얕게 들어 둘의 말을 다 들었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무뚝뚝하고 쌀쌀맞지만 든든한 호우, 그리고 나의 동업자 은수.
그 둘의 보호 안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깊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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