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서북청년단, 그 실체가 첫 공개됐다
#"서북청년단 물건 구매에 냉담한 주민들에겐 '빨갱이' 매도 일쑤"
#"처녀들을 강제로 아내로 삼는 행위도 다반사"
김병길 선생은 중학생이었던 당시 목격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 몸서리를 치며 회고하였다.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것들이었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개나 돼지를 마구 잡아먹었고 항의하면 장독대 항아리며 집안 집기들을 마구 들부수었다.
어쩔 때는 성냥을 확 그어서 초가지붕에 대고 불을 붙여 가옥을 다 불태우기도 했다. 시골 초가라는 게 지붕이 낮아서 손을 뻗으며 닿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도 없었다.
몽둥이를 질질 끌고 몰려다니다가 그냥 아무나 패고 부수고 불 질렀다.
몽둥이가 없으면 패놓은 장작으로도 마구 사람을 팼다. 장작으로 패면 각이 지고 표족한 옹이와 가지가 있어 살을 푹푹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반일, 반미시위에 가담한 사람이 있는 집안은 서북청년단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오빠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의 여동생들은 서북청년단들이 날마다 찾아가서 성폭력을 동반한 온갖 악행을 다 가했다.
어떨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며느리와 자식들을 다 잡아다가 옷을 모두 홀라당 벗겨놓고 할아버지에게 며느리 등을 타고 넘으라는 고문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초주검을 만들었다.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 중에는 대부분 법도를 중시하는 양반가문이었다.
양반가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의 도덕관념이 얼마나 높은가.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에서는 목메 달아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金濟珍(78세, 한림읍 귀덕1리, 제주경찰학교 10기생, 2001. 11. 19 채록) 증언.
"서북청년회 출신 정 주임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여자들의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혀 놓았습니다.
난 벌벌 떠는 그들이 불쌍해 코트를 벗어 덮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습니다."
----- 高致敦(애월읍 광령리, 당시 외도지서 특공대원)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442회, 1999년 4월 23일).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
이들이 제주 4,3사태때 한 행위는 히틀러의 제노사이드(인종청소)와 미국 개신교 극우단체인 kkk단의 흑인학살과는 비교도 할수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양민을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장모와 사위를 잡아놓고 옷을 벗긴뒤 공개로 성행위를 시키고,죄없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애인에게 석방을 핑계로 강간을 하고,아편을 먹고 환각상태로 부녀자 겁간을 자행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서북청년단만큼 악마적인 단체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비공식단체이기 때문에 월급이 없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다녔습니다
주로 군과 경찰을 따라다니며 빨갱이색출 작업을 벌이며 부녀자 강간,이승만초상화나 태극기 강매,반반한 여자는 자기 마누라로 삼고 자기말을 안들으면 악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한 단체입니다.
현대사의 대학살사건인 대구노동자파업,거창학살사건,여순반란사건,
보도연맹(좌익들에게 전향의 기회를 준다고 등록하게 한뒤 나중에 무참히 학살한 사건입니다)등에 어김없이 나타나 양민을 학살한 자들이 바로 이 서북청년단들입니다.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