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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유근군의 논문이 기존 프로시딩 논문과 얼마나 같은지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짧게 말씀드려 이번 논문은 2002년 프로시딩 논문의 90% 이상 카피 앤 페이스트인 작업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원 논문이나 잘 정리해놓은 링크들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제가 연구하며 살아가는 학계의 기준에 따르면 이 논문은 박교수의 자기 표절 논문입니다. 물론 자기 논문일 경우 프로시딩에 제출했던 카피라이트를 무시하고 조금 더 각색시켜서 저널에 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논란이 될만한 행위이고,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기 논문일 경우에도 충분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데 여기에 다른 사람을, 그것도 제 일 저자로 포함한다면 더욱 더 복잡해집니다. 기존 프로시딩 논문과 차별화를 만들어낸 제 일 저자의 기여도가 명확해야 합니다. 과연 송유근군의 식 하나의 기여가 그러한가는 해당 전공의 전문가가 판단해야 할 것 이지만, 논문의 해당 구절을 읽어보면 그러한 중요성을 볼 수 없습니다. 박교수가 풀고 싶어도 못한 장벽이 있었는데 그걸 송유근군이 새로운 아이디어나 가정을 통해서 풀어냈다면 모르겠지만, 그저 기존 식들의 조합과 대입입니다. 쉽게 말해 기여가 애매합니다. 소수의 교수들이 학생들 논문 실적을 위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놓아주곤 합니다. 역시 이런 관행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나라 학계가 이렇게 엉망이다라고 인정하고 다 눈감아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 교수의 자기 표절 논문에 수식 하나를 기여하는 업적’으로 박사 자격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박사란 이 사람이 이제 독립적인 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자격증입니다. 연구 윤리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 일은 학부생 졸업 연구 프로젝트나 석사생 연습용 첫 논문 수준으로 적당해보입니다. 수식 하나 막힌 것을 잘 푸는 것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박사는 해당 분야를 이해하고, 연구 주제를 잡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사람입니다.
2. 이 글을 쓸까 말까 조금 고민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시간이 아까워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송유근군 관련된 기사나 게시글에 우리나라 국민 근성이 못되서 무조건 잘나가는 사람을 끄집어 내려한다, 저널 에디터가 알아서 잘 했을 건데 니가 무슨 참견이냐 등의 댓글이 많은 걸 보고 그냥 글 하나 끄적여보기로 했습니다.
3. 저널에서 글이 출판되는 과정은 일반인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처럼 저자가 자기가 달아야 하는 레퍼런스를 달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리뷰어가 걸러낼 수 없습니다. 리뷰어도 사람이고 어디 노벨상 수상자들만 리뷰어를 하는게 아니라 평범한 대학 교수나 연구원 들이 합니다. 하지만 논문의 결과를 수많은 동료 과학자들에게 검증을 받는 것과 같이 논문의 윤리성 자체도 이러한 후속 검증 프로세스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학자적 명예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혹시라도 그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 이러한 상호 검증을 통해 학계의 자정성을 유지합니다. 저널 에디터는 신이 아니라 학계의 학문적 수준과 윤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보루일 뿐입니다.
사족이지만, 저널 리뷰 역시 사람의 일인지라 인간 관계나 개인적 이해관계로 많이 좌우될 수 있습니다. 대가의 이름이 공저자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저널 수준이 쉽게 바뀔 수 있고, 리젝 당할 논문도 몇번의 어필 후에 억셉될 ‘수도’ 있습니다. 저널에서 알아서 할것이므로 참견 말아라는 말이 위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4. 송유근군에 대해서 변호 하는 분들이 많이 하시는 말씀이 왜 귀중한 천재를 성장하게 놔두지 못하고 시기하고 끌어내리려고 난리냐는 이야기입니다.하지만 전 반대로 왜 우리는 그렇게 천재에 집착하고 우상화하려는지 묻고 싶습니다. 송유군근이 남보다 뛰어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학문의 길은 길고 그 끝이 없습니다. 남보다 조금 먼저 시작했다고 멀리갈 수 있는게 아닙니다.
모든 천재는 한계가 있습니다. 술술 보기만해도 이해가 되는 시기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끝나게 되있고, 그 이후부터는 인내력, 집중력, 많은 경험에서 오는 창의성 등 다른 요소들이 필요해지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천재인 시기가 있었을 겁니다. 그 어려운 한국어를 몇년 안에 마스터했으니까요.) 그 시기가 오면 누구나 실패를 겪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만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거죠. 더 의지를 붇돋아 돌파할 수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길을 찾아서 갈 수도 있는겁니다.그런데 주위에서 넌 실패해서는 안되는 천재야라고 압박을 주고,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제가 보기에 지금 송유근 군이 그런 케이스라고 봅니다. 아직 제대로 된 논문을 써 낼 수준이 안되면, 박사 학위 타이틀을 포기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조금 돌아가는 방향을 택해서 꾸준히 자기의 길을 만들어가면 됩니다. 어차피 지금부터 다시 박사 과정을 시작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보다 5년 10년은 빠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본인 혹은 주위 사람들의 욕심으로 옳지 못한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너무 천재나 한명의 메시아에 너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정치에서도 어떤 구세주가 나타나서 이 썩은 바닥을 싹 뒤집어주기를 기대합니다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작은 정치 활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박태환 김연아가 나타나서 금메달을 따오면 환호하지만 막상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는데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천재는 육성되기 보다 소비되는 존재입니다. 만일 송유근군이 박사 학위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명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어 미국 시민권을 따서 한국을 잊고 잘살게 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안좋은 말 하시는 분들이 꽤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재라는 단어 속에 나의 국가주의적 욕망(전문용어로 국뽕)을 투사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한 개인을 교과서에 어울리는 위인으로 박제화 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습니다.
*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도록 마음같아서는 해당 논문들의 pdf를 다운받아서 올리고 싶지만 저를 포함 제가 아는 어느 사이트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논문의 카피라이트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고, 함부로 공개된 사이트에 연구 논문을 올려서는 안된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과게에 다른 글이 두 논문을 잘 비교 분석했기에 링크 붙입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science&no=55400&s_no=55400&page=1
*처음엔 좀 서운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학계에 전공하시지 않는 일반인 분들이 송유근군을 옹호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태도이지 않은가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자기 표절이나 기여도를 직접 판단하기 힘든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 쉽게 휩쓸리기보다는 유근이를 믿고 기다려주신다는 거니까요.
출처 | 월급 루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