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를 돌아본다 ③-1] 일본의 조선침략 후원자 미국1)
“가쓰라-태프트 밀약” -1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다가 결국 1904년~1905년에 걸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우선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미국은 1900년대, 자신들의 힘이 태평양과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하기는 어려운 조건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에 주목,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였다. 미국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을 지원하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대표되는 협정을 통해 일본의 조선 점령을 지지했다.
조선 침략 야욕에 불타오르는 일본
일본은 조선에 대해 사활적인 이해를 가지고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런 일본의 조선 침략 의지는 미국의 주목을 이끌어내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후 서구열강을 따라 약소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나타났다. 정한론은 일본이 1854년 미국의 대 일본 침략외교에 굴복하여 개국된 것에 대한 와신상담의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쇄국논리를 펴던 양이(攘夷)론자들은 동북아시아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음으로써 서양열강에 대항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일본은 미국 등의 열강에 대해서는 비굴한 신의를 보내면서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에 대해서는 침략의 자세를 취했다. 특히 중국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정벌해야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2)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가 붕괴되고 일왕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정부가 수립되자 일본은 조선과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하려고 했다. 일본은 조선에 정부 간 주고받는 문서인 서계(書契)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이 자국을 황제의 국가로 자처하면서 중국과 대등하게 <조정>, <봉칙>, <황실> 등의 문구를 사용하며 조선에게 일본에 사대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자, 조선은 이런 행태가 조선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음모라고 분노하면서 서계 접수를 거부했다.
일본은 조선이 서계를 거부하자 바로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869년 12월 일본은 외무관원 3인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에 관한 광범위한 정탐을 실시했다. 이들은 정탐 후 외무성에 보고했는데, 여기에는 대중국 종주권문제, 강화도의 지리적 중요성과 개항 건의, 군비조사, 무역조사 등 강화도 침공을 위한 조사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구체적인 침공 및 군사작전계획까지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1873년 6월부터 정한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는데, 사이코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을 중심으로 한 정한파가 조선 정벌을 적극 주장하였다. 여기에는 봉건체제가 붕괴하면서 곤궁에 빠진 무사계급의 구제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의 목적인 중앙집권적 절대주의 체제 확립이 더 급선무였던 오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내치파가 조선정벌을 반대하여 정한론은 일시적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정한파이건 내치파이건 둘 다 조선을 정복해야한다는 것에는 동의했고, 다만 시기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내치파로 알려진 기도 다카요시도 1868년부터 정한론을 주장하고 있었다.3) 따라서 1873년 소위 정한파에 의한 조선정벌 취소는 정한 노선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은 ‘정한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감행했다.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서구열강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치외법권을 강요하는 불평등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일본은 전쟁까지 불사하며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태평양을 넘어 중국까지 넘본 미국
1890년대 미국은 이미 세계 최대 공업국가가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세계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미 많은 지역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여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미국은 식민지 개척에 뒤늦게 나선 국가로서 유럽 열강의 힘이 약한 지역인 태평양에서는 무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빼앗았고, 유럽 열강의 힘이 강한 지역은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 분할을 최대한 저지하며 ‘문호개방정책’을 펼치려 했다.
미국은 대서양과 인도양을 중심으로 하는 항로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열강에 장악되어 있었던 조건에서 아직 유럽열강의 입김이 닿지 않은 북태평양 항로 개척에 눈독을 들였다. 미국은 일찍이 1821년, 태평양함대를 창설하여 하와이 주변해역과 동태평양에서 군사활동을 했고 1835년에는 서태평양지역까지 함대 군사 활동 범위를 넓혔다. 1848년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정복을 완성하자, 미국은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개발하며 본격적인 태평양 진출에 나섰다. 미국은 북태평양 항로를 따라 일본과 조선을 침략하여 교두보를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으로 진출하려 했다.
1890년대 들어서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태평양 지역에 있는 국가에 대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다. 미국은 먼저 1893년 하와이 왕조를 무너뜨리고, 1898년 하와이를 불법 병합했다. 또한 미국은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스페인 사이의 독립전쟁에 개입하였다.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1898년 2월, ‘메인호 사건’4) 미국이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쿠바 아바나 항에 파견한 전함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 사고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언론과 당시 해군차관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정치권에서는 ‘메인호’ 침몰을 스페인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태평양 제해권 확보를 위해 스페인과의 전쟁을 바라던 세력은 ‘메인호 사건’를 빌미로 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태평양에 있는 괌, 필리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을 빌미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에서 스페인과 전투를 벌였다.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의 독립군에게 스페인에 맞선, 독립군을 돕는 국가로 행세했다. 그러나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독립군과의 약속을 깨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등을 강제로 점령했다. 이렇게 미국은 하와이-괌-필리핀 등 태평양에 있는 섬을 장악하여 태평양 항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이용, 침략의 대상이던 아시아 국가들과의 통상을 유지하려 했다. 타국이 관리하는 식민지에는 미국이 진출해 독점적 이익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특정 지역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무능력한 정부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힘이 약한 정부의 저항을 누르고 침탈하여 독점적 이익을 노려볼 수 있다. 미국은 자국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문호개방정책”은 서구열강의 식민지 분할을 반대하고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기 위해 미국이 주창한 것이다. 이렇듯 “문호개방정책”은 미국이 식민지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침략적인 정책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국은 1898년 3월 독일의 교주만(膠州灣, 자오저우만) 조차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열강에 의해 수 개의 세력권으로 사실상 분할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5) 이에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앞세워 중국 분할에 반대하면서, 중국 침탈을 노린 것이다.
태평양을 얻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다
미국의 “문호개방정책” 의도에 걸림돌이 된 존재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5년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차지했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바로 1898년 ‘여대조차조약(旅大租借條約)’을 중국과 체결하면서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대련에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여 군 병력을 대거 만주로 들여보내 만주를 사실상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했다. 자본주의 발전이 더뎠던 러시아는 미국이 주장하는 ‘문호개방정책’ 대신 자신이 점령하다시피 한 만주지역 시장의 지역적 독점을 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과 만주점령 움직임에 큰 위협을 느꼈다. 일본은 정한론에 따른 한반도침략을 넘어 내심 만주-중국까지 넘보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를 가지게 되면 일본의 만주진출이 가로막힐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만주 진출이 좌절되는 것을 넘어 러시아가 한반도까지 넘볼 수 있다는 위협까지 느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선은 대마도와 지척의 거리에 있다. ... 만약, 타국이 조선을 영유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일본)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다른 국가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밝혀 일본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6)
미국은 태평양의 제해권을 공고히 하고, 유럽 열강의 ‘중국 분할 정책’에 맞서서 ‘문호개방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중국을 침탈하려 하였고, 일본의 목적은 ‘정한론에 따른 조선 침탈’로서 제국주의 침략 정책이라는 점에서 같았다. 이들의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공통적으로 러시아였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해 미국과 일본은 연합했다. 미국은 러시아를 징벌할 군사력이 부족한 한편, ‘태평양 제해권 장악’의 측면에서 일본의 필리핀, 하와이 침략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군사력이 비교적 약했던 당시 조건에서 어쩔 수 없이 한반도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다. 동시에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인정하게 하여 태평양 제해권도 공고히 하려 했다. 이런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서 우선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 바로 1901년부터 1908년까지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백인우월주의에 기반한 ‘인종주의’와 군사력에 기초한 ‘문명국’ 논리를 앞세워 정당화했다. 루즈벨트는 ‘백인’만이 ‘문명’을 가지고 있고, 이 ‘문명’이 ‘비문명’ 국가에게 ‘전쟁을 통한 개입’을 통해서라도 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루즈벨트가 ‘비백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국가가 일본이었다. 루즈벨트는 1900년 의화단 사건 당시 일본이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일본이 타 아시아 국가와 다른, 소위 ‘문명국’인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7) 루즈벨트는 일본이 정한론을 앞세워 한반도에 침략하고 있는 것을 ‘문명의 전파’로 인식한 것이다.
실제로 루즈벨트는 조선에 대해서 “조선은 절대적으로 일본의 것이다. 물론 조선이 독립국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뜻함-인용자)에 의해 엄숙히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 조약을 시행하기에 무력하였다. ... 조선은 어떤 의미로도 전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었다.”고 하여 조선이 ‘비문명국’이기 때문에 ‘문명국’인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8)
- 글의 길이가 길어 두 차례로 나누어 올립니다.
주석
1) 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청나라를 중국으로 서술하였습니다.
2) 홍순호, <정한론, 근대 일본의 침략사상과 조선정벌정책>, 정치외교사 논총 제 14집 1996, 43p
3) 내치파로 알려진 기도 다카요시도 1868년부터 정한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홍순호, 위의 책.
4) 미국이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쿠바 아바나 항에 파견한 전함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 사고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언론과 당시 해군차관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정치권에서는 ‘메인호’ 침몰을 스페인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태평양 제해권 확보를 위해 스페인과의 전쟁을 바라던 세력은 ‘메인호 사건’를 빌미로 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태평양에 있는 괌, 필리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5) 김기정,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 관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3, 106p
6) 김기정, 위의 책, 2003, 134p
7) 김기정, 위의 책, 157-167p
8) 김기정, 위의 책, 16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