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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엔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고 하죠?
게시물ID : panic_498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쿰쿰한냄새
추천 : 22
조회수 : 288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6/10 01:36:13





편의상 말을 편하게 해도 될까요?

근데 일이 그닥 가벼운게 아닌데

그래도 이미 지난 일이니까 괜찮아요

헿헿





중학교 1학년이었던 몇 년 전.

당시의 내 키는 151cm에 체중은 38kg쯤 되었음

운동은 할줄 몰랐고, 체육대회 달리기는 6명중 늘 5등이었음

한마디로 운동신경 완전 호구...

머리가 아주 좋은 편도 아니어서 잔머리 빼고는 그저 그랬고, 그나마 학교 성적이 좋아 부모님의 기대를 등에 이고

논술학원에 다니고 있었음




그날도 논술학원에 가는 길이었고 그날의 시간과 내 복장까지 빠짐없이 모두 기억함

하늘색 물이 빠진 청바지에 흰색 티를 입고 그 위에 분홍색 조끼를 입었었으며 빨간색 코트를 입고 백팩을 메고 있었음



그리고 내게 시청으로 가는 길을 묻던 남자는 검정색 비니에 검은 목폴라티, 검은 자켓, 검은 바지, 검은 신발,

심지어는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음

어림잡아 키는 172cm정도에 마른체형을 가진 남자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음






그날 학원 시간에 늦어서 부랴부랴 가고 있는 길이었는데

시청은 어떻게 가는거냐며 묻기에

급한 와중에도 꽤나 섬세하게 길을 안내했던 것 같음


그런데 이 남자가

'저쪽에 내 짐이 있는데 너무 많고 무거워서 그러니까 같이 좀 들어줄 수 있느냐'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거임


그런데 난 그때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그것도 아니면 호구였던건지

'저 급한데.. 빨리 들어드리고 갈게요'

라고 말하고 그 남자 뒤를 쫓아갔음

지금 생각하니 나 아주 바보구나

(물론 이 일이 있은 후로 의심병이 생겨서 걱정은 없음)




근데 가도가도 계속 가는거임

내가 살던 동네가 아파트 동네가 아니라 다세대주택이 많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 길은 8차선 도로에 양옆으로 주택이 늘어선 곳이었음

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어서 한적한 편이었지만 간간히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이 많았음

그래서 딱히 의심도 안했고 걱정도 안했던 모양..



아무튼 그래서 그 남자가 날 이끌어 간 곳은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의 지하였음

꽤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구조인데 너무 어두운거임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짜증을 냈음


'어디까지 내려가요?! 저 빨리 가야돼요!'


근데 그 말을 딱 하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거임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리는 상태가 됨

촉감도 없었고, 후각, 청각, 시각.. 뭐 하나도 없었음

순간적인 멘붕을 겪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숨을 쉴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음

그리고 누군가가 내 허벅지를 꽉 짓누르고 있었음

시청가는 길을 물었던 그 남자였음




그리고 그 남자가 내게 말했음


'소리를 지르면 칼 꺼낼거야. 얌전히 있어.'


그러면서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멍하니 멘붕이 된 상태로 방치됨


반항없이 누워있으니 남자가 아직 열려있던 창고 문을 닫으려 일어섬

내 주머니엔 핸드폰이 있었고 나는 그걸 이용해서 미리 설정해둔 긴급메세지를 보내려고 했었음

물론 바로 뺏김

긴급메세지를 보내려면 볼륨키를 짧게 한번, 길게 한번 (혹은 반대로?) 눌렀어야 했는데

처음 한번을 누르자마자 핸드폰 액정이 켜짐ㅋㅋㅋㅋㅋㅋㅋㅋ

문 닫으려고 일어났던 그 남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핸드폰을 빼앗음


그때의 나는 패닉,패닉 그런 패닉이 없었음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이

'저 문이 닫히면 난 진짜 죽거나 아주 망하겠구나' 였음


그래서 그때 소리를 지름


사람 살려 부터 시작해서 나 죽네, 이 남자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었고, 안경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지하에 있다 이러면서 말도 안되는 이상한 말까지 많이 했음

아주 구체적으로 소리를 질렀던 것으로 기억함

그러나 내가 원하던 타인의 도움은 없었음



내게서 그런 목청이 나올 리 없는데 그날만큼은 정말 기차 화통을 삶아먹어도 나오기 힘든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음

그러자 당황한 그 남자가 내 목을 짓눌렀고, 내 얼굴과 머리를 향해 주먹질을 18번 했음

횟수까지 똑똑히 기억나는 이유는

그 순간부터 내 모든 상황이 아주 천천히 지나갔기 때문임

더불어 통증도 못 느꼈음


나중에 병원 ct에서 약간의 뇌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만큼 꽤 강하게 얻어맞은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당시엔 하나도 안 아팠음

더불어 내가 맞은 것만 8대지 피한건 10대가 넘음

그만큼 그 사람의 주먹이 아주 느리게 보였었음

운동은 커녕 동체시력도 엉망인 내가 반 넘는 주먹질을 피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내 목을 쥐고 있는 손을 쥐어 뜯어 또 소리를 질렀음

그리곤 내가 주먹을 휘둘러 그 남자의 얼굴을 명중시켰음

얼굴보다는 조금 아래 턱과 목이 만나는 지점을 강하게 쳤었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공격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뭔지 그 남자가 나가떨어졌음



그때부턴 소리도 느리게 들림



죽고싶냐고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아주 느리고 낮게 들렸음





그리고 그 남자가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감

격렬하게 저항하니 의욕이 없어진 것인지 몇대를 얻어맞아도 멀쩡히 소리지르는 여자애라 당황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밖으로 뛰쳐나감



근데 그때부턴 나도 머리가 좀 이상한게

저걸 쫓아가야겠다

지금 안 쫓아가면 못 잡는다

이런 생각이 화드득 지나가면서 그 남자가 뛰어나가는 뒤를 내 핸드폰까지 집어들고 쫓아감



계단이 17개였음

확실히 기억남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수가 17개



대문을 나서자마자 보인 것은 오른쪽 귀퉁이가 찌그러진 바구니가 달린 빨간색 자전거 옆에 서 있는 대학생같은 언니였고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엄청난 속도로 뛰는 남자가 보였음



근데 그 모습을 끝으로 맥이 탁 풀린 것 처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음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어지럽고 울렁거려서 가만히 서있지 못했음




부모님께 전화를 걸며 집까지 걸어가면서도

손발은 계속 떨리는데 주위는 계속 두리번거림





나중에 아빠가 말씀하시길

그때 내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고 함

상황을 매우 침착하게 잘 설명했고, 지금 집으로 가있을테니 경찰을 부르라고 까지 했다고 함


난 기억 안남

그냥 계속 바들바들 떨면서 집까지 기어가듯 걸어간 것 밖에 기억이 안 남

전화를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남





그리고 우리집으로 온 경찰들에게 사건 경위를 이야기 하고,

그 2층짜리 다세대 주택에까지 다녀옴

이미 사람 안 산지가 3년이 넘은 폐가였음

난 그걸 그때 처음 알았음

그래서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안 도와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






그런데 그 폐가가 4개월 뒤에 철거됐음

그 집 지하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건지는 모르겠음

한동안 경찰의 안전띠?가 거기에 둘러쳐져 있었고 일반인들 출입은 금해놓았었으니

꽤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함




내가 만약 그때 그 느리게 보이고 온갖 생각을 한번에 할 수 있는

인간적이지 못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음



신기하고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감사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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