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6. 10. 월요일
독투불패 baegopa
난 천재였다.
1부
나는 몰랐다. 누구나 그런 줄 알았지. 어려서 부터 누구나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줄만 알았다. 특별할 것도 의식할 것도 없었다. 부모님도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다른사람과 조금 다르다는 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어머니의 권유로 웅변학원에 등록하며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면서 였다. 당시 속셈, 웅변, 컴퓨터학원 이 세가지가 인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유치한 기억력 테스트였다. 주어진 시간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물어보면 답하는 식. 나는 아는대로 모두 답했다. 내가 뭔가 특이한 걸 이 날 어머니가 알아채셨다.
멘사자격을 훌쩍 넘는 남들보다 높은 IQ(레이븐스 메트릭스 테스트 99%-IQ156이상)를 갖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순간(절대?)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 전까지 부모님은 내가 남들보다 글을 읽고 쓰는 게 조금 빠른 줄만 알았다. 그리고 조금 똑똑한 줄 알았다.
구구단을 외지 못하는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민학교 시험과 받아쓰기를 다 맞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해전 어느날 집에 놀러온 손님들이 입은 옷의 색상을 모두 외우는 게 당연한줄 알았다.(난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학 MT에서 내 시야에 들어온 친구들의 첫 날 입은 옷색상과 브랜드, 둘째 날,셋째 날 갈아입은 옷을 모두 기억한다.)
신기해 하는 시선들... 신문 기자가 찾아오고 기사가 나가고 소문을 들은 선생님들은 나를 구경 했고 시험해 보았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날 시험하고 부모님을 만나고자 여기저기서 찾아왔다. 칭찬보다는 신기함과 시기어린 시선(?), 뭔가 활용해 보려는 그런 시선들... 아직도 그 시선들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저기서 조기진학과 영재교육 권유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셨다. 이 시절부터 아버지의 강권으로 공부대신 예체능을 하였다. 아직도 난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학교 진학까지 이런 일은 계속 되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필기를 한 적이 없다. 교과서는 단 한 번 읽을 뿐이었다. 그래도 두툼한 교과서 몇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읊어댈 수 있었다. 칠판에 선생님이 필기한 내용은 외웠다가 그대로 다음날 다시 쓸 수도 있었다. 공부를 따로 할 필요도 없었다. 예체능계라 오후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항상 평균 성적은 95~98점을 맴돌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음이었다. 하루 하루가 다르게 기억력이 안좋아짐을(아니 평범한 쪽으로 약간 이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재수 없지만 그 일은 사춘기무렵의 나에겐 큰 충격과 공포였다. 재수 없겠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나마 한번이라도 읽던 교과서를 손에서 놓아버리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첫 가출을 감행했던것도 이무렵이었다.누구를 향한 반항심인지 모르지만 시험 때는 알 건 모르 건 대충 찍기 일쑤였고 수업과 학교도 여러차례 째곤 했다. 의외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하셨다. 왜 그러는지 다 안다는 듯 혼을 내기보다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음을 자책할 필요가 없음을 매일같이 설명했다. 이때 나는 예체능을 그만두었다.
중3 내신이 뒤에서 맴돌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 영향도 있었지만(그래도 붙긴했을거다.) 어머니의 한사코 반대로
과학고 진학을 포기하고 일반계고 입학시험을 치루었다. 안좋아졌다 해봐야 남들보다 좋은 기억력 덕분인지 도내 순위권의 성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당시 공개된 도1등 성적과 비교했을 때 2등~3등정도 였으리라 기억된다.
이제 기억력만으로 예전처럼 하기는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보다 특별해야한다는 강박증이었을까... 중3 때의 트라우마 였을까... 1학년 때부터 난 공부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 하셨다. 부모님은 나를 학원을 보내지 않으셨다. 과외도 시키지 않으셨다. 심지어 방학 때 당연히 하던 자율학습도 참석하지 못하게 막으셨다. 대신 빈손으로 시골집에 보내버렸다.
내 기억력은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까지도 다른 아이들보다 좋은 기억력은 갖고 있었다. 그 예로 나는 1학년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 현대어 풀이 전문을 토씨하나 안틀리고 쓸 수 있었다.
고3까지 월등한 성적을 유지했고 수능을 치루었다. 아버지는 의대진학을 한사코 반대하셨다. 나는 서울대 심층면접에서 면접관이 낸 수학 입체 도형 문제를 칠판을 사용하지 않고 암산으로 풀어 15초만에 답하는 기염을 토했다.(지금도 그 문제와 답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면접관 교수가 즉석에서 낸 2문제를 더 풀었다.(역시 기억한다)
또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1학년이 끝나자 마자 반수를 한것도 아닌데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유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2부
입시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고 요즘말로 잉여로워져서 였나보다. 머리 깊숙히 밖혔던 많은 기억들이 슬슬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수년간 차곡차곡 쌓여있었던 일들이 곱씹어졌다. 몇 해전 그날에 느끼고 사라졌어야 할 서운함과 미안함, 또는 억울했던 그런 당시의 기억들 하나 하나가 뇌리에 남아 계속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로 쓰려니 참 어렵다. 뭐 어쨌든 잊어야 할 사실들을 잊지 못하는 상황이라 해두자. 뭐 중요치 않다. 그것도 견딜만 했던 거 같다.
3월이 되었고 대학생활과 낯선 서울생활은 즐거웠다. 초중고 12년간 나는 '신기한 놈'이었다. '신기하다'라는 이 표현이 적절하다. 난 언제나 '잘한다'보다 '신기하다'라는 표현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로 칭찬에 목이 말랐던 것도 같다.
어느날부터 난 칭찬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전교 1등을 했어도... 서울대에 합격했을때도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저 당연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어쩄건 그랬는데 여긴 나같은 놈들이 넘쳐보였다. 그 상황이 거꾸로 신기했다. 이유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어느날 동기들과 수다를 떨다 무의식중에 나는 같은과 여학우가 몇달 전 OT때 2박 3일간 입은 옷과 브랜드를 기억해서 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억해낸 사실을 말했을 때, 그 여학우는 나에게 얼굴을 찡그리며'너 무섭다'라고 했다.
짧디 짧은 '너 무섭다'라는 그 말은 아주 깊숙히 그 표정과 함께 귀를타고 뇌리에 파고 들었다. 멘탈이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는 상황에 이게 결정타였을까...(사실 그 여학우에게 마음이 조금 있기도 했다. 귀엽고 예뻤다.)
'신기한 놈'에서 '무서운 놈'이 돼 버렸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부터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져 갔다. 사람을 보는 게 무서워졌다. 곧 우울증이 찾아왔다. 극심한 수면장애를 동반한 채... 내 남다른 기억력은 조금씩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게 아니고 이랬다 저랬다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마치 치매같이...
어렸을 적 누군가가 내가 가진 기억에 대한 능력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해준 적이 있다. '순간적으로 장면과 상황을 기억하는 능력'과 '남들보다 아주 오래 기억하는 능력'이라 했다. 뭐 맞는 말인지 믿을만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전문가라는 사람이 그랬으니 그냥 그랬나보다 하고 있을뿐이다.
그런 사례가 각각 종종 있다고도 하였다. 그럴싸한 의학적 설명도 덫붙였으나 관심도 없었고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인데 예전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다. 우울증의 영향인지 지우고 싶은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상의 한마디 없이 1년을 못채운 채 자퇴서를 던지고 서울대를 뛰쳐나와 자취방에 쳐밖혀 있을때 아버지는 조용히 나에게 '집에가자'라고 한마디 하셨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많이 속상해 하셨다.) 심리치료와 약물의 결과였는지, 가족들의 영향이었는지 뻔뻔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르게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집에만 있자니 심심하기도 했고 생각이 많아질까봐 뭔가 관심을 집중할 곳이 필요했다. 나를 보는 가족들의 안쓰러운듯한 눈빛도 왠지 모르게 슬슬 신경이 쓰여갔다. 눈치도 보였다. 이제 뭘 해야 될까 고민했다. 사실 할 게 없었다. 그래서 군대를 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셨다.(도대체 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나라가 날 거부했다. 난 '현역병' 대신 '제2국민역'으로 등급 외 판정되었고 군필증을 받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군인대신 민방위대원이 되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3부
정신적으론 불안한 외줄타기를 계속 하던 와중에도 어쨌든 대학입시까지 잘 버텨왔는데 결국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군대에서 조차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은 불안하고 초조한 나와 달리 이상하리 만큼 평온하셨다. 여러 부담감에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상의하여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자취하는 친구집으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당장 꺼지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직도 반가워하는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친구집에 얹혀 살면서 난 생활을 위해 과외알바를 하고 밤에는 그 친구가 일하는 PC방 일을 거들었다. 원래 건축업을 꽤 크게 하다 IMF에 망한 PC방 사장은 날 마음에 들어했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맡기곤 했다. 과외는 나와 절대적으로 맞지 않았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몇몇 학생들을 거치며 곧 적응이 되긴했다.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한적한 지방도시의 집세와 물가는 둘이서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를 아끼던 누이들은 가끔 나에게 용돈을 보내주었다.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차 내 기억력은 평범함에 극히 근접해 있었다. 기억력의 널뛰기도 점차 없어졌고 모든게 적응되어 갔다. 뇌리에 밖혔던 기억들도 뒤늦게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도 매우 안정되어 갔다. 사정을 딱히 여긴 고교 선생님의 소개로 고향소재 작은 대학에서 단기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머릿속에 우겨넣은 잡지식은 꽤나 쓸모있었다. 대충 혼자 던져놔도 사람들과 아는척하며 대화하고 일을 풀어갈 수 있었다.
점점 업무에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서울로 가자고 친구를 꼬득였다. 이 바보같은 친구는 휴학계를 던지고 나를 따라나섰다. 덤으로 학교를 안다니던 다른 한 놈이 더 따라 나섰다. 학교 근처에 셋이 돈을 모아 월세 집을 구했다. (서울에 아는동네는 서울대 근처뿐이었다.)
인터넷 관련 일을 시작했다. 잘 안됐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별 생각없이 즐거웠다. 사실 돈을 쓸 데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친구들보다 새로운 일을 쉽게 쉽게 익혔다. 그 이유로 친구들과 가끔씩 트러블을 일으키키도 했다. 나는 간간히 친구들을 답답해 했고 종종 짜증을 냈다. 아마 그때까지도 나는 사람마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믿지 않았던 거 같다.
다행히 이런저런 사람들과 부딪기고 일하면서 곧 서로가 적응해갔다. 내 예민하던 성격도 점점 누그러져 갔다.
나와 달리 친구들은 도중에 군대를 가야했다. 한 친구가 먼저 떠나고 몇 달 터울로 곧 다른 한 친구도 군대로 떠났다. 친구를 훈련소까지 배웅한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후로 나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이런 저런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수입은 그저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사정으로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간 모은돈으로 밑천을 삼아 동네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매상은 신통치 않았다. 금방 장사를 접었다. (망했다)
그동안 내가 하는 일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아버지가 그제서야 한마디 하셨다.
'이제 학교가라'
재입학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거 같다. (내가 학교를 그만 두던 당시 부터) 며칠을 상의한 끝에 부모님의 뜻대로 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재입학 허가가 났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 사이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여 거의 학교를 떠난 후였다. 군대를 다녀오고 제때 졸업을 못한 극히 일부 5학년들이 졸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나에게 '무섭다'라고 했던 바로 그 여학우가 아직도 학교에 있었다. (졸업 후 학교에 남아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기억했고 매우 반가워했다. 나도 반가웠다. 당연히 그녀는 과거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4부
그녀가 소개해준 까마득한 후배들은 다행히도 나를 잘 따랐다. 나도 후배들을 이뻐했다. 후배들의 도움으로 학교생활은 순조로웠다. 후배들의 권유로 짧게나마 동아리 활동도 했다. 나는 늘 후배들을 조심스럽게 대했고 후배들은 나를 어려워 하지 않았다.
2년반만에 학교를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자퇴전 이미 1년을 다녔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생애 처음으로 내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그 사이 군대를 다녀온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그녀가 찾아와 밤늦게까지 술과 함께 나를 축하하였다.
졸업후 나는 취업을 하지 않았다. 교수의 권유로 잠시 공부를 더 해볼까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원래 하던 일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그일에 관심을 갖은 후배와 선배가 나를 도왔다. 친구들도 졸업 후 다시 합류하였다. (여전히 수익은 뭐 그저 그렇다.)
나는 지금도 그녀와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요즘도 자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어느 날 그녀에게 혹시 과거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웃으며 '내가 언제!!'라고 했다.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녀는 멋쩍게 웃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 하다 커피나 마시러 가자며 손을 잡아 끌었다.
내 기억은 다행히도 모두에게 이제 '그저 지나간 일'이었을 뿐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