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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근현대사 선택 안한 분들을 위한, 문과생이 쓰는 근대사-하
게시물ID : humorbest_5564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므
추천 : 31
조회수 : 1063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11/01 23:27:57
원본글 작성시간 : 2012/10/31 21:39:26

제가쓴 근대사 상편 http://todayhumor.com/?history_6166 여기있고

근대사 중편은 http://todayhumor.com/?history_6167 여기있습니다.

하편이 이 글.

 

 

26.

아 죽겠다 20분 쉬긴했지만 4시간째 붙어있는데 근대사도 끝날 기미가 안보여 살려줘

10분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원래 있던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대통령:손병희) & 서울의 한성정부(집정관총재:이승만) & 상하이의 상해 임시정부(총리:이승만)통합한 겁니다.

졸라 간단하게 끝내버릴까 했는데 백범김구선생님과 한인애국단 나오니까 해야겠음

 

1919년에 3.1 운동 이후에 나라의 머리, 정부가 있어야 겠다는 생각에 해외에 있는 임시정부들을 통합했습니다.

논의 결과 위치 후보지가 2개로,

이동휘를 필두로 하는 만주의 무장투쟁파와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상하이의 외교파가 있었는데 상해가 이김.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시작합니다.

공화정제에 대통령 이승만 / 총리 이동휘 (수장이 외교파고 부 수장이 무장투쟁파라니 이미 갈라서기 충분한 조건이었음) 였고

삼권 분립도, 자금줄도, 비밀연락망도, 군대도, 사료편찬소까지 있는 탄탄한 시작이었음.

 

근데 여기서 이승만이 병크를 하나 터뜨린게 국제연맹(현 UN)에 위임통치청원서를 아무도 모르게 혼자 제출해버렸습니다

(이게 왜 병크냐면 나라 독립하려고 난리인건데 국제연맹에 니들이 통치해주세요 신청서 넣은것임. 뭐여.)

 

21년에 비밀연락망 들킨데다 위임청원서 제출사실을 알게되죠.

이 때문에 이승만 탄핵을 논의 하다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만들자는 창조파(신채호 등)와 이승만 밀어내고 이어가자는 개조파(안창호 등)로 나뉨.

나뉠때부터 임시정부의 위상은 하락(23년)하기 시작하여서,

이승만을 탄핵해내고 2대로 박은식을 앉혔는데 사망함. 또 위상이 추락하고

국무령체제니 집단지도체제니 온갖방법 써가며 임시정부는 빈사상태가 됩니다(26년).

걍 다 떠남. 거의 다 떠남.

 

근데도 혼자 꿋꿋히 남아계신분이 있었으니 그분이 김구선생님이라,

 

김구선생님이 31년에 한인애국단을 만드셨는데 일본국왕마차에 이봉창이 폭탄을 던졌죠.

실패로 끝나나 中신문에서는 "안타깝게 실패했다"며 칭찬했고 이에 빡친 일본은 상하이 사변을 터트리죠.

이 상하이 사변이 일본원숭이들 딴에는 성공적으로 끝났다면서 연회를 열더이다.

 

여기에 도시락폭탄들고 들어가신분이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일본 육군장군 7명을 병신만들고 나오죠.

이에 장제스가 1억 중국인이 못한것을 1명의 조선인이 해냈다며 극찬.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계기가 되고

32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확연히 살아나게 됩니다.

 

 

27.

30년대엔 한인애국단이 있었다면

20년대엔 의열단이 있었죠. 20년대라고 의거를 하지않은것은 아닙니다.

1919에 3.1운동 터지고 김원봉이 만든 단체인데 이 단체도 활동내역이 빛납니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수류탄 두 개와 권총 두자루 들고 들어가서 의거하신건데 잡히지도 죽지도 않고 영화같게 살아서 도망치심.

김익상은 조선총독부을 공격하셨구요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러 가셨는데 하필 폭탄이 불발되서... 자결하심ㅠ

 

근데 20년대나 30년대나 이런 건물을 부수고 일본인을 공격하는 식으로는 조국독립을 시킬수 없다고 생각해서

(건물은 세우면 되고 대체인원 넣으면 그만이니까)

한인애국단원과 의열단원들은 군관학교로 가게 됩니다.

 

28.

1930년대, 1940년대는 민족말살통치 시기였습니다.

일본이 다른 열강들 건드릴대로 건드려대서 스스로도 주체가 안되는 상황이었음.

10대 학생들까지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탄광으로 끌려가고

여자들은 군수품 만든다고 정신없고 금속이랑 금속은 총알만든다고 놋쇠까지 빼가고...

 

내선일체라며 보통6년이던 조선의 학제를 일본처럼 소학교6년으로 만들었죠 (이후 41년 돼서 소학교는 국민-학교라는 명칭 씁니다)

근데 조선어는 전면 금지에 강제 신사참배.

개판이던 시기입니다.

 

10년대도 20년대도 30년대도 많은 항일무쟁투쟁단체가 있었습니다.

1940년에 김구와 지청천이 한국광복군 창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세했습니다.

이 한국광복군은 우리힘으로 일본에 정면승부를 걸어보겠다는 국내 진공작전 시도하려했으나

일본이 미국한테 핵 두 대맞고 찌그러져서 미국을 등에 업은 광복을 맞았죠...

 

신간회 좌우합작운동 스킵.

10년대 20년대 30년대 40년대 항일무장투쟁사는 스킵할게요

근데 안썼다고 투쟁을 쉰건 아니라는거 알아주세요ㅠㅠ

조선의병과 일본군인이 전투한건데 역사흐름상 큰 영향없음

10년대엔 임병찬, 김좌진, 박상진, 이회영, 이상설, 손병희 등이 힘써주셨고

20년대엔 홍범도, 김좌진, 서일 등이 힘써주셨고

30년대엔 지청천, 양세봉, 김일성 등이 힘써주셨음.

김일성은 북한 그분 맞습니다. 항일무장투쟁 특히 보천보전투에서 쌓은 명성으로 지금 그 자리 갈수 있었던거예요

남한 교과서엔 보천보전투 한토막 글귀로 배우는데 북한 걔네들은 어떻게 늘렸는지는 몰라도 1권 내내 그이야기라고 하던데

 

신간회, 10년대 20년대 30년대 40년대는 요청시 따로 글 올리겠음

 

 

 

29.

붙든지 5시간짼데 옆에서 티비에서 김장훈에 이외수작가님 나오셔서 다시한번 힘내봅니다

조금만 있으면 6.25다 힘내자...

 

언어 보면 많은분들이 바라신 조국 광복의 날이자

2차 세계대전에일본군이 연합군에게 패배한 날

1945년 8월 15일.

 

근데 이전에도 광복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 되었습니다.

43년카이로에서 미국 루즈벨트/영국 처칠/중국 장제스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최초로 약속한 회담이 있었구요

45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이 얄타에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얄타회담이 이거예요. 미국이 소련에게, 너네가 진격하는만큼 땅을 가져가라.

미국 본심은 일본이 하도 안무너지니까 소련이랑 일본이랑 아웅다웅하고있을때 종전해버리려는거였는데

실제 참전하고 나고선 진짜 무참하게 일본이 쪽도못쓰고 소련에게 지고있었죠.

싸우기는 미국이 싸우고 끝에 잠깐 발담근 소련이 꽤 이득을 봅니다.

미국, 죽쒀서 개줌.

45년 7월.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에게 패배를 권고하는데 일본이 뻗댐.

그러자 미국이 일본에 히로시마 원폭투하(8/6). 게다가 소련군의 참전(8/8)까지 겹치고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폭투하(8/9)

포츠담 선언을 8/10일 받아들입니다.

근데 떡실신된 일본은 싸우자는 파벌이 극세라 항복을 되니 안되니 서로 싸우다가

일본 왕이 8/14일 패배 수락하겠다고 못박아버림.

그리고 8/15일 방송으로 패배를 시인하는데

 

이것들 말하는것도 꼭 말장난이 쩔어요. 지들이 졌다라곤 안하고 "이 시간 이후로 모든 일본인은 철수하겠다"고 이렇게 말함 개새들.

근데 한국쪽에다가 일본물러나겠다고 제일 먼저 연락넣은사람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파의 여운형이란 사실.

 

얄궂게도 소련의 참전은 한반도를 갈라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시죠? 북한의 소련군정과 남한의 미 군정기...

 

 

 

30.

광복직후의 상황은 북한이 더 나았습니다.

북한은 일본이 공장을 다 북쪽에 세워서 물자도 있었고

소련은 북한의 단체들을 인정해줬거든요. 그래서 안정적이었죠

그래서 이때 북한은 친일파 청산도 하고 토지개혁도 하고 남녀평등도 하고

(근데, 남녀평등한게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킨게 아니라 여자도 사람이니 일해라 이거임)

 

근데 남한은 미군이 들어서는데

솔직히 일본이나 북한인이나 남한인이나 백인시선에선 다 같은 동양인이거든요

그래서 남한의 단체를 싹다 불허합니다.(맥아더포고령1호) 안정이 늦었어요

그와중에 우리는 극좌 좌파 중도 우파 극우 다섯 갈래로 나뉘어서 아웅다웅아웅다웅...

 

 

 

 

31.

대한민국이라는 현재의 우리나라를 닦는 기틀은 3년이나 흘러야 됐었어요

 

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아 못하겠다 새벽 12시 45분.

 

안녕하세요? 오후여덟시입니다 시작합니다

 

 

 

자 다시, 모스크바 3상 회의부터 시작합시다.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회의한겁니다.

세계2차대전이후에 대해 논의한건데 배우는건 한국의 근현대사니 다 스킵하고

 

배울건 세가지, 최대 5년간 신탁통치 하게 못박고 임시정부를 수립케 했으며

남한과 북한을 먹고 있는 미국과 소련 공동위원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이죠

 

근데 여기서 이 회의 내용이 국내에 잘못알려져서 외국에서 한국을 신탁통치 하겠다! 라고만 퍼진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다 들고 일어남.

후에 최대5년간임이 알려져서  좌파는 수락하는데 / 우파는 다 필요없다고 외세는 다 나가라고 반대하죠.

 

근데 이게 문제가 된게 미국소련 공동위원회를 개최해서 빨리 남북 문제를 해결해야하는데

미국소련 참가하고 당사자인 한국도 참가해야 하잖아요? 근데 좌파는 찬성이고 우파는 반대잖아요?

그래서 소련이 반대하는사람들 데려와봐야 좋은소리 못들으니까 찬성파(좌파)만 입장시키려 했는데

이걸 미국이 가만 놔둘 리가 없죠? 좌파들만 들어오면 자기 세력이 반토막 나는건데. 우파가 자기세력이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느니 해서 좌파우파 둘다 입장시켜야 한다고 아웅다웅하다

결론이 안나서 휴회되버립니다.

 

 

하도 남북문제가 결론이 안나니까 이승만이 이때 신의 한수를 놔요.

정읍에서 남한만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말해버림. 솔직히 다들 이러고 싶은생각이야 다 있었는데 몰매맞을까봐 말을 못했죠.

근데 이거 아세요? 이승만은 이씨왕조의 후손이고 임시정부때부터 요직을 맡고있었던 인물이예요.

사람들이 찬성한다고 의견이 몰리기 시작한거예요.

 

곧 나라가 갈릴거같은데 이걸 보고만 있자니 초조한게 중도파의 여운형입니다.

1947년. 좌우합작운동을 펼쳐요 초기엔 미국도 지원해줬구요. 그래서

지도자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휴회된 미소공위를 속개하라고 촉구하고

토지개혁 하자고 하고 친일파 청산문제까지 다루십니다.

 

근데 실패해요. 미국이 지원 잘랐거든요. 게다가 좌파와 우파의 참여율도 낮았구요.

무엇보다 여운형이 암살당함. 누가 지시한건지는 뻔하겠네요.

 

 

일단 제 2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긴 했는데 결렬됨. 그대로 끝.

 

 

이 꼴을 국제연맹(유엔)서도 못보고 있는거예요

1948년. 유엔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난 결론이

인구비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해라!! 인데,

솔직히 그때 북한쪽 머릿수가 적었거든요. 그래서 소련이 유엔의 입국을 거절함.

 

안되겠어서 유엔소총회 엽니다

남한만 단독선거 하라고 나온거예요

 

 

 

그래서 국제연맹(유엔)에서 남한만 단독선거 하라고 하네요?

이렇게 되니까 나라 갈릴게 뻔히 보이는 분들이 반대를 하시더이다. (좌파가 되겠죠?)

 

김규식과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 어찌어찌 합치자고 제의하려했는데 실패로 끝나구요

제주4.3사건이 납니다. 극좌에 해당하던 남로당 제주도당 에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무기를 들고 경찰서를 습격하며 일어났죠

(이때 경찰의 인식은 친일하던 사람들이 경찰하는 사례가 많아서 우파의 대표였음.)

미군정은 이를 향해 경찰력을 파병해 총을 발사하여 진압하죠  근데 사람이 과하게 죽은 면이 있음.

집에 한명만 없어도 무장봉기해서 도망친거라고 판정내고 일가족 죽이는 식이었고 마을을 재판없이 불지르는 등 불바다였음.

게다가 이렇게 무고한사람까지 인명피해가 났는데 살아남은 사람들한테도 빨갱이로 매도됨.

그래서 지금도 제주도에 제사날이 같은 집이 많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차원에서 4.3사건에 관련해 사과했죠.

 

 

 

5.10에 총선거가 있었습니다. 4.3사건으로 총선거 3곳 중 2곳이 무효되었습니다.

7월에 제헌국회가 구성됩니다.

그리고 한달을 기다려 광복된 날짜를 맞춰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게 되죠.

이게 대한민국의 첫날이예요.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고 부통령에 이시영 앉습니다.

 

(덧

여기 앉은 이시영은 듣보잡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임.

이씨가문은 고구려백제신라때부터 명문가문이었어요. 조선때만 이 가문이 영의정 11명 배출했구요,

오성과 한음 아시죠? 이 오성인 이항복이 이 이시영가문의 조상임. -우당 이회영 선생이 이항복의 11대손-

이렇게 명성높은 가문이니 재산이 많은것은 당연했고 일제강점기때 친일파를 제의받았는데

형제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나라녹을 언제때부터 먹고 살았는데 등을 돌릴수 없다고 해서

전재산 -환산하면 현재로 쳐서 3000억정도입니다- 들고 헌병경찰이 돌아다니는 무단통치시기 10년도에 서간도가서 독립운동했습니다.

이 가문의 아들이 이시영인것임.

게다가 3000억 들고 서간도 가서 독립운동 한 이씨 형제분들은 아사로 죽을만큼 결코 돈을 헛되게 쓰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시영 아들이 이종걸/이종찬인데 30대의 파릇한 나이에 그 당에서 메인인물만 뽑는 종로구 의원으로 당선됨.)

 

 

 

1948년 8월 15일. 우리가 정부를 수립하자

북한도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정부를 수립합니다.

여튼. 이게 우리가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의 수립순서예요.

 

 

 

 

 

 

근데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은 있었잖아요? (제주4.3사건)

이를 미 군정이 무력으로 대응했죠. 게다가 단독정부가 수립 되어버리기까지 했어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미군정이 싹 빠져나간건 아닙니다.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고 제주도 진짜 정신없이 밟았어요

 

계속 탄압을 하는데 경찰력과 병력이 모자라니까 가까운 여수/순천에다 제주도 이거 밟는것좀 도우라고 파병명령내렸는데

그때 제주도는 섬이니까 육지로, 가까운곳인 여수/순천에 간 제주도 장병들이 많았단 말이예요

명령내려온게 자기 고향사람들한테 총질하라는건데 이 명령을 누가 들어요?

고향사람들에게 총을 겨눌수 없는 일부 군인들은 무장한채로 봉기했고 들고일어서자 세력이 확장되어서

이 군인들은 과격하게도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 인사나 경찰 죽이고 여수순천지역을 장악했고

(이 세력은 극좌 가 되겠지요. 근데 4.3사건때 가족잃은 군인들도 많아서 이 울분이 우익인사처단으로 간게 아닐까싶음)

이에 또 군대가 파병되어 진압되었고 지리산으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이사람들이 빨치산(프랑스어로 파르티잔) 입니다. 

 

이걸로 호되게 당한 이승만 정부는 철저한 반공 정책을 펼쳤죠.

 

근데 근현대사 교육에선 학원에서도 정부수립에 반대해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10.19사건이 있었다

정도로 배움. 나머지는 세부내용은 검색.

 

 

32.

자 이승만 정부 시작합니다

이승만-장면내각-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대중 이렇게 쓸거예요

근데 6.25는 언제인거냐!!하시면 6.25는 1950년대에 터졌어요 이승만쓰면서 쓸거예요

정부들 다 배우고 북한문제도 배우긴 하는데 남한의 현대사의 흐름이 아니므로 스킵.

근대사 상중하 끝냈고 현대사는 내일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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