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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게시물ID : humordata_4671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파
추천 : 12
조회수 : 58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8/06/19 16:14:02
적도(敵盜)들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 본 안중근은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주석 22) 이와 관련하여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심경을 적었다. '하늘을 향해' 대한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했다. 안중근은 국적 이토와 그 수하들을 포살하는 일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었고, 그런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전해왔다. 악인이 법망을 피하거나 법망을 뛰어넘어 못된 짓을 할 때면 하늘이 일정한 형벌을 내린다는 인식이었다. <서경(書經)>에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은 반드시 쫓는다."(民之所欲 天必從之)라 하고, <대학(大學)>에는 "민중의 마음과 뜻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의 마음과 뜻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得衆測國 失衆測失衆國)라고 했다. 맹자는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한다."(以討虐民之罪)라고 주장했다. 모두 천명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기 나라의 군주가 포악무도해도 '백성 학대하는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의 요체이거늘, 하물며 이적이 침략하여 국권을 오로지하고, 백성을 살육하는 마당이라면 방치 방관하는 것을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하늘에 고하는 심경으로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세 번 불렀다. 안중근은 의거 뒤 러시아 병사들에게 끌려서 국경지방재판소에 구치되었을 때 벽에 걸린 그리스도 상(像)에 절하고 성호를 그은 뒤 "조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한국말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이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상태이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계제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안중근의 총격으로 환영식장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 3국은 물론 러시아에서까지 최고의 실력자로 알려진 일본 정계의 거물이 불시에 피살되었으니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차가운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렸다. 총성은 연속적으로 울렸다.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그와 동시에 이토의 몸이 튕겨지 듯 흔들렸고, 이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 듯 뒤로 물러섰다. 거의 틈도 없이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토의 뒤에 있던 가와카미, 모리, 다나카 세 명의 몸이 휘어졌다. 이토의 약간 앞에 있던 코코프체프가 돌아보며 오른손을 내밀어 이토를 부축하려 했다. 무로타, 후루타니, 나카무라만철 총재가 달려와 이토를 부축했다. 무로타 등은 코코프체프의 지시를 받아 이토를 열차 내 객실로 옮겼고, 중앙의 큰 테이블에 모포를 겹쳐 깔고 즉석 침대를 만들었다. 이를 보고 있던 코코프체프는 소파에 있던 쿠션을 가져와 이토의 머리 아래로 넣어줬다.(주석 23) 천벌을 받은 이토(와 그 무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열차 내 객실로 옮겨지고, 안중근은 러시아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권총을 빼앗기고 끌려갔다. 이때 안중근을 끌어간 러시아 장교는 니콜라이 니키포로프 기병 1등 대위와 노그라조프 기병 1등 대위, 보병 바데츠키 중위 등이었다. 수천 명의 군대는 모두 흩어져 도망치거나 했지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으며, 헌병과 장교들은 칼을 차고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지난 뒤 탄알이 떨어지게 되니 총소리가 멎었다. 군민들은 그제야 몰려들어 중근의 권총을 빼앗아 헌병에게 넘겨주었다. 중근은 곧 라틴어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고 포박 당하였다. 중근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내가 도망칠 줄 아느냐? 내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면 죽음 터에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얼빈시의 러시아재판소에 붙들려 들어가게 되었다.(주석 24) 코코프체프 대장대신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안중근이 적도들을 포살하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피신할려면 피신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안중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이토의 죄상과 일제의 침략죄악을 밝히고,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옥중투쟁을 통해 만국공법의 원칙을 밝히고 국제 열강의 지지를 받아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생각이었다. 열차 특실로 옮겨진 이토는 피격 30분 만인 오전 10시 경에 숨졌다. 당년 69세였다. 수행 중이던 의사와 거류민단의 일본인 의사가 응급치료를 했지만 워낙 상처가 커서 회생이 불가능했다. 이토는 숨지기 전 몇 마디를 남긴 것으로 전해왔지만, 여러 가지 자료와 정황으로 보아 현장에서 절명한 듯 하다는 주장도 있다. 의사 고야마(小山善)는 거류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와 있던 일본인 의사와 러시아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이토의 옷을 벗겼다. 오른쪽 가슴과 복부에서 선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의사들은 상처에 거즈를 댔고, 이토에게 브랜디를 권했다. 무로타는 이토를 치료하면서 "저도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라고 힘을 북돋으려 했다. 무로타는 미토 번 출신으로, 유신 무렵 도쿠가와 막부 진영과 싸울 때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았었다. 이토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자네보다는 내가 많이 맞았네." 이토가 말했다. 무로타가 이토의 손을 잡았다. 이토가 물었다. "누가 쏘았지?" "아직 모릅니다." "나는 이제 글렀네. 또 누구 다친 사람은 없는가?" "모리가 부상한 것 같습니다." "모리도 당했는가"라고 말한 뒤 이토 히로부미는 눈을 감았다. 의사들이 피하주사를 놨고 붕대를 감았으나, 이토는 고통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 측에서 대한제국인 한 명을 저격범으로 체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로타가 이를 알리자 이토가 신음하듯 "그런가. 어리석은 녀석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사람들이 들은 이토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토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루타니가 이토의 입에 귀를 대고 "각하, 뭔가 유언을……."이라고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무로타가 쥐고 있던 이토의 손에서 맥박이 점차 약해졌고, 오전 10시 완전히 멈췄다.(주석 25) 주석 22 - <안응칠역사>, 88쪽. 23 - 미요시 도오루, 이혁재 옮김, <사전(史傳) 이토 히로부미>, 702쪽, 다락원, 2002. 24 - 박은식, 앞의 책, 86-89쪽. 25 - 미요시 도오루, 앞의 책, 702~703쪽. 퍼옴- 김상웅의 안중근 평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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