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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바둑史 1-4 (브금)
게시물ID : bestofbest_558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lfl
추천 : 120
조회수 : 18161회
댓글수 : 3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1/09/08 23:47:53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9/08 07:22:19
1편 -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umorbest&no=385572&page=1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385572&member_kind= 2편 -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umorbest&no=385603&page=10&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385603&member_kind= 3편 -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umorbest&no=385650&page=8&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385650&member_kind= 일인 천하. 1980년 조훈현은 모든 타이틀을 획득하고 명실 상부한 1인자가 된다. 이 당시 일본에선 또다른 한국인 기사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한다. 조치훈. 대중은 양국의 일인자들의 대국을 열망했고 결국 1980년 연말과 1981년 연초에 걸쳐 2차전 대국이 성사되었다. 일본에서 유학한 천재 조훈현에게 국민의 기대는 컸다. 이벤트성 대국이었지만 당시 세계 바둑의 최정상 일본 바둑에 한국 바둑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2-0. 완패.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천재 조훈현에게 걸린 기대는 이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역시..한국 바둑은 안되는가." 일인자의 자존심에 한줄기 금이 갔다. 1984년 봄. 조금은 투박한 얼굴의 아이가 바둑판 앞에 앉아있다. 초등학교 3학년.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 우승자. 황제 조훈현과 두점의 지도기. 조훈현 특유의 빠른 행마는 두점의 이점을 금세 허물고 승부를 지었다. 어린 소년은 분명히 강했지만 특별한 재기는 보이지 않았다. 전주의 바둑신동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전영선 7단의 부탁으로 지도기를 두었지만..어린시절 그토록 지겹게 신동소리를 듣던 자신과는 너무도 달랐다. 둔해보이는 외모에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복기조차 서투른 아이. 한국과 일본 그가 무수히 보아온 천재들과는 전혀 다른 아이. 한참을 고민하던 조훈현은 조용히 말했다. "집을 옮겨야 겠군." 어떤 점이 조훈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아마 세고에 스승을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집에는 아이를 둘 만한 방이 없어... 방이 더 있는 집을 구해야 겠어" 제자에서 스승으로. 그렇게 그는 전주의 신동 이창호를 제자로 들인다. 1988년 4월 2일 동경. 황제의 칼날은 이날을 위해 얼마나 벼렸왔던가. 세계 최초 국제대회. 후지쯔배 세계프로바둑 선수권. 무대는 준비되었다. 한국에선 조훈현9단, 서봉수9단, 장두진6단이 출전 하였다. 조훈현 9단의 상대는 입단 동기 고바야시 고이치 9단. 너무나 조급했던 것일까...한국에서 지낸 날들이 일순 허무해 진다. 1회전 전원 탈락. 한국바둑의 위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큰 기대를 품고 떠나던 그들을 크게 다뤘던 언론은 참패의 결과를 단 몇줄로 덮어버렸다. "이건 말이 안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1988년 8월 20일. 중국에서 개최하는 세계 최대의 국제기전.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 선수권. 그러나 한국 바둑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에 단 한명의 대표만을 배정한것. 후지쯔배의 참패에 대한 결과인가. 그러나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굴욕적인 처사였다. 한국 바둑계는 주최측에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오히려 묵살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싫으면 참가하지 말라는 배짱. 분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조훈현의 눈빛만 빛을 내뿜었다. 후지쯔배 참상탓일까. 적진을 향해 홀로 출전하는 조훈현은 언론에서도 다뤄지질 않았다. 첫번째 대전상대는 대만의 대표. 왕 밍완. 그는 살기어린 조훈현에게 추풍 낙옆처럼 떨어져 나갔다. 8강전. 후지쯔배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조훈현의 상대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는 고바야시 9단에게 한수도 실수를 해선 안되었다. 그러나 너무 성급했던 탓일까. 조훈현은 커다란 악수를 두고 말았다. 고바야시는 철저히 이득을 챙기며 유리함을 이어나가고 그럴수록 조훈현은 더욱 무리한 수를 두게 되었다. 오직 조훈현만이 사투를 벌이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조훈현의 눈가에 핏기가 어린다. 크게 지든 적게지든 어차피 지는 것이라면... 이때부터 반상은 어려워 진다. 사방 팔방으로 이어지는 처절한 수들. 난전에 난전으로 유도하며 국면을 어지럽게 끌고 갔지만 대기실의 분위기는 고바야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결정 났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조훈현의 필패. 마지막 수가 두어지고 집계산으로 들어갔다. 모두의 예상은 당연히 고바야시 9단의 승리. 그러나 계산이 끝나자 고바야시는 고개를 떨구고.. 조훈현은 멋적게 웃었다. 4편 끝. 참고- www.chohunhyun.com (조훈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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