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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조선일보 칼럼] 헌법재판소는 죽었다
게시물ID : sisa_55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rLeonis
추천 : 11
조회수 : 364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04/05/14 11:07:38
드디어 조선일보가 미쳐버렸군요!!!!!!!!

[박종성] 헌법재판소는 죽었다

“김홍집,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의 기사다. 무슨 뜬금 없는 소리였는가? 저 개명천지(開明天地)에. 전(前) 내각 총리 대신 김홍집, 전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를 백성들이 죽여버렸던 것이다.(‘前內閣總理大臣金弘集. 前農商工部大臣鄭秉夏. 爲民衆所殺害’). 일본의 정치깡패들이 중전 민자영을 죽이고 나라의 근본조차 지키기 어려울 만큼 난세로 접어들자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배후에 분명 내통한 실세가 있다고 판단한 백성들은 당대 최고의 친일 수뇌를 까맣게 에워싸고 숨을 끊어버린다. 

스러지는 나라를 바로 세울 분노의 혁명은 못 일으켰어도, 조정(朝廷)의 꼴을 그 모양으로 어긋나게 한 단서를 칼 같이 낚아채며 ‘꼬임’과 ‘설킴’의 실타래를 숨돌릴 겨를 없이 제거해버리는 데 조선 민중의 원한은 그렇게 준엄했다. 그렇지 않아도 분노로만 끝났던 세월의 감정이 어딘가 화끈한 종말 처리 대상을 갈구할 때, 길거리 담장이든 골목길 장작이든 발길질로 달래고 침 뱉으며 토악질해 대던 세기 전 스크린의 장면 장면들을 우리는 단숨에 뇌리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다. 

성난 군중이 하지 못할 일 무엇이 있겠으며, 가지 못할 곳이 어디이겠는가. 하지만 백 팔년 전 저들의 함성이 오늘 또 다시 수백, 수천만의 목소리로 되살아나고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이 땅의 숱한 울기가 그 날의 분노와 고스란히 겹쳐지기만 하는 ‘얄궂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디 저 옛날 을미사변의 전후사(前後史)와 오늘의 탄핵 '뒤 끝'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겠는가마는 전혀 다른 역사가 나사못 같이 돌고 돌아 허허(虛虛)롭고 아슬아슬하기만 한 집단의 심리를 불붙이고 있는 이 세월의 복제품은 이제 어느 박물관 선반 위로 보내야 할까. 

소수의견의 공개 여부는 법리(法理)상의 문제이며, 그걸 꺼리는 이유 또한 제아무리 테러 때문이 아니라 변명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끝날 설득이 아니다. 재판관의 엄정성, 객관성, 치밀함이란 게 물론 신의 영역까지 넘볼 초월적인 힘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래서 구름에 달 가듯 둘을 섞어 보자고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왜 아니 무서웠으랴. 가스통 집어던지고 어디 꼭 불을 질러대야만 기가 죽을 일이었으랴. 

이제 곧 그렇게 될지 모를 것이란 염려가 초침(秒針)의 진동을 큰 북소리보다 더 우렁차게 요동치게 했을 것이고, 평생 고고했던 법관의 말로가 무엇 때문에 가혹한 역사의 주문 앞에서 얼룩지며 꾸겨져야 하는지를 진저리치며 끌탕하는 동안 두 달의 세월은 이십년보다더 길었을 것이다. 그 분이 뉘신지, 그 판관(判官)이 무엇 때문에 다수 앞에서 자신의 정의의 날개를 조촐히 접어야 했는지 우리는 그 속사정을 모른다. 단지 묻고 또 묻고 싶을 뿐이다. ‘그런 줄 모르고 그 일을 맡았었는가’ 하고. 

관념이든 육체로든 승복하지 않고 소수란 이름의 ‘그들’ 앞에 모여들 자 모두가 입다물라 외치는 ‘저들’을 향해 여전히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물음은 이제 간명해진다. 그렇다면, “탄핵의 정당성은 드라이 아이스였는가 ?” 연기(煙氣)였는지, 증기(蒸氣)였는지 모를 몽롱한 기운으로 주위를 어지럽혔으며 시간마저 흐드러지게 뒤흔들었다는 역사의 채무는 이제 법의 명령으로 깨끗이 변제되는 것인가. 아니 스스로 없어져야 할 특수 고체의 운명 앞에서 기꺼이 사라져야만 하는가. 다수가 ‘아니라’ 하면, 소수는 정말로 ‘아닌’ 게 되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무서워 말못하든, 어느 덧 쪼그라들어 다시 허리 펼 여력조차 없든 ‘아닌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었어야 했던 ‘까닭’은 ‘까닭’ 그대로 고스란히 남는다. 소수의 정당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탄핵의 정당성이 보유하는 정의(正義)의 질량은 오늘의 판결과 관계없이 불변으로 남는다. 그저 단지 묻힐 뿐이다. 함성의 먼지 속으로. 그것을 애당초 승리와 패배로 가르려는 저 못된 정치의 논리가 법리의 판단을 요구하며 네트를 넘길 때부터 공의 표면에 흙은 묻어야 했고 거죽은 긁히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구르다 구르다 터지도록 더 굴러 이제 잠시 잔디 곁에 머물러 있어도 공은 공이고, 발은 발이다. 

언제 우리의 사법권력이 정치권력을 이긴 적이 있었는가. 단죄의 서슬이 푸르고 푸르러 통째로 구조를 뒤바꾸며 판을 갈아엎도록 규범으로 휘갈기거나 제 스스로 그리 하도록 정신차리게 야단이나 한번 제대로 친 적 있었는가. 선거사범에게 벌금 몇 푼 때리거나, 또 잡혀 들어오면 자격정지나 재확인했을 뿐, ‘법’이 ‘정치’를 붙잡고 길을 일러 목적지에 이르도록 겁나는 파수꾼이 된 적 있었다는 얘길 들어본 적 없는 우리다. 죽어가면서도 아닌 걸 아니라고 부르짖었던 판관이 있었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했던. 

국론분열이 걱정스럽다는 쪽으로 기울자고 애써 작정했다면, 안 그래도 싸우다 지친 그 판관의 손은 죽는 날까지 떨리지 않을 자신 있을까. 당신 집 뒤 뜰 찔레꽃 물줄 때나, 안방에 앉아 인삼차 마시는 혼자만의 그 시간에도 편안할 수 있으려나. 여론의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는 이 밤, 그는 정말 원 없이 잠들 수 있을까. 

‘고뇌했다’고 말하는 것은 들끓는 ‘고뇌’ 그 자체에 대한 배신이다. 고뇌가 언제 주인님께 생색내 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는가. 하루라도, 아니 한 순간이라도. 만일 그랬었다면 그 주인에겐 딴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으며 모두가 한결같다는 말이 대체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반대가 있긴 있었으되,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없는 오직 묵시의 항변이었다고만 말하며 무대를 떠나려 함은 관객모독도 보통의 모독이 아니다. 

판결을 뒤집느니 차라리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감내해야 할 것이리라. 그리할 수도, 그대로 갈 수도 없는 삶이 모두의 고통으로 다가온다면 그런 줄 모르고 그 일을 감당했었노라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그리도 두려웠는가. 아니 아직도 두려운가. 사형도, 징역도, 집행유예도 아닌, ‘탄핵은 정당했었다’고 한마디 홀로 말한다는 것이. 

화려한 변명과 두터운 판결문도 이젠 과거로 묻힌다. 탄핵의 정당성과 그것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우물거림’과 함께. 그러나 말해야 할 자 말하지 않고, 기어코 커튼 뒤에 숨어 객석의 숨결만을 훔치려 들 때 공연은 어차피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운현궁의 봄’이나 한길 건너 ‘가회동의 봄’이나 이제는 그냥 거기서 거기다. 백 팔년 세월의 꼭지점을 아무리 이어 붙여봐도 여전히 꿉꿉하기만 한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소시민적 자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헌법재판소의 저 육중한 석벽(石壁) 마저 이제는 초라해져만 가는 궁터의 울기 닮아 핏기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 대답도 혼자 끌어내야만 하는 날이다. 


(박종성·서원대학교 교수·정치학)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5/2004051401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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